〈 55화 〉55화
현실로 돌아와서 회사에 출근했지만 크게 바쁜 업무는 없었다.
어차피 현재 연성종합병원의 계약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업무가 나에게 할당되어 있기 때문에 각종 잡무들은 모두 다른 직원들에게 배분되어 있는 상태.
병원장 주석진 덕분에 모든 업무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나는 제법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다른 곳에 집중했다.
바로 연성종합병원 내과 의료진과 함께할 스테이지를 구성하고 제작하는 것.
그래도 사무실에 보는 눈들이 있으니 대놓고 놀지는 못하고 나름대로 컴퓨터 모니터에 이런저런 계약 관련 양식들을 띄워놓고 노트에 볼펜을 끄적거리며 고민을 했다.
멀리서 누가 보면 존나 열심히 일하는 줄 착각할 것 같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부장님의 시선에 살짝 웃어주고는 다시 내 할 일을 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열정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어떻게 내과 의료진들을 재밌게 괴롭히면서 따먹을까 고민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다.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밖에서 식사하기로 결정했다.
곧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장님께 다가갔다.
“부장님, 오늘 점심은 연성종합병원에서 계약 관련해서 관계자들과 식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이 한창 바이어들 만나고 하느라 바쁠 시기지. 이 계약 마무리 될 때까지는 강 과장이 알아서 외근 다녀오고 그 후에 보고하는 걸로 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 번에 강 과장 덕분에 나도 이사진들에게 꽤나 칭찬을 많이 들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주라고.”
“네,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11시가 살짝 넘은 시간이니까 아직 늦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최유정 의사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냥 한유미 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참이나 받지 않아서 끊을까 하는 찰나에 전화가 연결됐다.
앗, 과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환자들 때문에 전화를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받으셨네요?”
원래는 받기 힘든데, 저희 상황이 이렇다보니 최 선생님께서 과장님에게 전화가 오면 무조건 받으라고 했거든요.
“그렇군요. 다른 게 아니고, 아무래도 오늘 저녁에 꿈에서 3층에 진입하게 될 것 같은데...사전에 서로 의견을 좀 나눠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안 그래도 아침에 잠시 저희끼리 간단하게 회의를 하긴 했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는 과장님이 없어서 좀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언제 오시려고요?
“점심식사 같이 하면서 간단히 상의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희는 괜찮아요.
“그럼, 제가 곧 출발 할 테니, 병원 근처 식당 중에서 조용한 곳으로 예약해서 연락주세요.
네, 최 선생님과 선배님들에게 그렇게 전해놓을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바로 출발했다.
차가 막히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여기서 병원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40분 정도가 될 것 같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한유미 간호사로부터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식당의 이름과 주소를 남겨놓은 메시지였다.
가게 이름을 보니 파스타 같은 것을 파는 곳인 것 같다.
뭐, 여성들이 좋아할 법한 음식이긴 하지만 나도 음식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상관은 없다.
가게에 들어와서 어렵지 않게 그녀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예쁜 여성 4명이 한 곳에 모여 있으니 확실히 눈에 띈다.
은근슬쩍 주변에서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남성들의 눈길도 보였다.
내가 그녀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앉을 때는 좀 더 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과장님 어서 오세요. 여기 앉으시면 돼요.”
“음식이 벌써 나왔네요?”
“네, 조금 더 있으면 진짜 손님들이 많이 몰려오거든요. 그래서 미리 시켜놨어요. 어차피 이 가게 메뉴도 잘 모르실 것 같아서 전화로 여쭤보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 같고... 그냥 이것저것 많이 시켰으니 아무거나 드세요.”
확실히 파스타 종류는 가격에 비해서 양이 너무 적다.
그래서 나름 배려를 한 것인지, 내 앞에는 2종류의 파스타와 밥 종류도 하나 놓여 져 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저라도 남을 것 같으니 모자라면 같이 드시죠.”
“네, 그럴게요. 맛있게 드세요.”
일단 회의에 앞서서 배부터 채우기로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우선 밥 종류로 나온 리조또를 빠르게 흡입했다.
이런 곳은 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생소한 음식인데, 짭짤하니 꽤나 맛있다.
순식간에 해치우고 파스타 하나도 클리어 했다.
슬슬 배가 불러왔다.
그런데도 아직 파스타 하나가 더 남아있는 상태였다.
나는 배가 고파서 조금 빠르게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다들 식사중이다.
아, 한 사람은 식사를 마친 것 같다.
바로 막내 한유미 간호사.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내가 손도 대지 않은 파스타에 고정되어 있다.
아무래도 자신이 주문한 파스타 하나로는 양이 부족한 것 같다.
하긴, 아무리 날씬한 체형의 여성이라고 해도 저 파스타 한 그릇은 솔직히 너무 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남아있는 파스타 하나를 한유미 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손 안 댄건데, 저는 배불러서 못 먹겠어요. 한 간호사님 드실래요?”
“앗! 그, 그래도 될까요...?”
한유미는 이미 내가 내민 파스타에게 손을 뻗고 있으면서도 최유정과 선배 간호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다들 한유미에게 잘해주기로 했을 텐데, 아직도 이런 걸로 눈치를 보는 건가?
하긴,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한유미 입장에서는 아직은 저들이 어렵겠지.
조심스럽게 내 파스타를 넘겨받은 한유미는 혼자서 다 먹지 않고 다른 선배들에게 조금씩 덜어주는 센스를 보였다.
박주연 간호사와 김지희 간호사의 표정을 보니 자신들도 양이 차지 않았는데 다행이라는 듯, 아주 적극적으로 한유미가 덜어주는 파스타를 가져갔다.
이런걸 보면 확실히 나와 한유미 간호사는 제법 많이 친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꿈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나와 내과 의료진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한명도 제대로 따먹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한유미와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다른 의료진들과 내가 사이가 나쁜 건 아니라서 회의를 하면서 직접적인 대화도 어느 정도 나누기는 했다.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대략 30분 정도 꿈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히 유용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한 건 없다.
어차피,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단지, 우리의 포지션을 확실히 정하고 역할 분담을 했다는 정도.
2층에서와 마찬가지로 나와 한유미 간호사가 우선 선두에 서는 건 이미 정해져 있었고, 이제 몽둥이를 소유하게 된 박주연 간호사와 김지희 간호사가 양옆을 맡으며 기습으로 돌격해 오는 짐승들을 막아내는 걸로 정했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될까요...?”
아직 포지션이 정해지지 않은 최유정 의사는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 하다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최 선생님, 혹시 내과 전문의이긴 하지만 외상에 대한 치료나 지식도 잘 알고 계신가요?”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기초지식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 부상자가 나오면 응급처지를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비상시에 서로 교대할 수 있도록 대비해 주세요. 보상 아이템 선택에 보니까 비상의약품도 있는 것 같던데, 오늘 목적지에 도달하면 획득해서 챙겨 두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꿈에서도 나를 제외하고는 다치면 상처가 나고 아플 테니까 의사에게 가장 적합한 역할을 맡겼다.
크게 유용한 정보를 교환한 건 아니지만 다들 만족하는 표정이다.
이제 의료진들의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과장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 꿈에서 잘 부탁드려요.”
“뭐, 저도 여러분과 같은 입장이고 혼자서는 이 어려움을 헤쳐가기 힘든 건 마찬가집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들 오늘 저녁에 봐요.”
나는 ‘각자가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말했다.
당연히 이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준비할 생각이다.
물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머리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기는 어렵겠지.
음식점은 병원에서 보도로 5분 거리에 있다.
나도 운동 삼아 걷는다고 생각하고 이들과 함께 병원 앞까지 가서 배웅했다.
다들 나에게 목례를 하며 인사했고, 막내 한유미는 병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나에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
초저녁부터 잠에 빠져든 나는 오늘 회사에서 구상했던 것들을 적용시켰다.
이런저런 함정을 만들고 괴물들도 좀 리메이크하고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가 되었다.
사전에 다들 11시 전까지 잠들도록 노력하기로 약속을 했었기에 소환을 시도했다.
불면증에 시달린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는지 다들 수면상태였고 내 꿈속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휴유, 이제 잠들기 전이 가장 두려워요.”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니 어쩔 수 없겠죠.”
“그건 그렇죠...그럼 출발 할까요?”
“3층은 2층과는 다르게 또 뭐가 있을지 모르니 일단은 천천히 움직입시다.”
“아, 괜히 더 무서워 지내요...”
한유미는 몽둥이를 꽉 쥐고 내 옆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살폈다.
내가 방향을 잡고 움직이면 같이 이동하겠다는 행동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바로 열쇠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는 없으니 일단 한 시간 정도는 괴물들을 때려잡으면서 몸 좀 풀어볼까.
이번에는 병원의 구조도 내가 마음대로 많이 바꿔버렸기 때문에 의료진들은 많이 당황했다.
원래 길이 있는 곳이 막혀있기도 하고 막혀있어야 할 곳이 길이 되어 있기도 하고 완전 엉망이었다.
그러다보니 괴물들이 어느 쪽에서 달려들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선두를 책임지고 있는 나와 한유미 뿐만 아니라 양 옆을 담당하고 있던 박주연 간호사와 김지희 간호사도 꽤나 고전하고 있는 중이다.
수시로 옆에서 고양이들이 점프해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헉...헉...확실히 3층이 많이 힘드네요...”
“후우, 일단 10분만 쉬도록 하죠.”
내가 10분간의 휴식을 권유, 아니 명령하자마자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뿐 호흡을 내뱉었다.
오직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서로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10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이 끝나고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기, 앞에서 미친개 한 마리가 달려오네요. 다시 출발 합시다.”
나는 붉은 눈을 빛내며 정면에서 달려오는 개의 머리통을 몽둥이로 후려쳐서 날려버리고는 일행들을 바라봤다.
다들 지쳐 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제 너무 잘해서 오늘은 난이도를 살짝 올렸더니 확실히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다.
특히, 한유미가 조금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다.
이 정도면 그래도 1단계 힌트 정도는 개봉해도 될 것 같다.
나는 이들을 이끌고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장소로 향했다.
우연인 척 책상 서랍을 열어서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를 보자마자 다들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다.
“여, 열쇠일까요...?”
“왠지 아닐 것 같은데...”
이제 겨우 1시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열쇠를 발견할 거라는 기대감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상자에 힌트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다들 가지고 있었다.
나도 긴장한 척 조심스럽게 상자를 개봉했다.
[지도(1)를 획득했습니다.]
[지도에 남성의 정액이나 여성의 애액을 바르면 지도(2)의 위치가 나타납니다.]
상자에는 바로 지도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2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도를 획득함과 동시에 허공에 알림음이 들려왔다.
지도를 사용하는 방법도 같았다.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지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열쇠의 위치가 아니었다.
현재 우리가 얻은 지도에 1이라는 번호가 적혀있었고, 남성의 정액이나 여성의 애액을 바르면 다음 번호의 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지도의 번호가 몇 번까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도에서는 열쇠의 정보를 찾을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없는 정보는 절대 아니다.
좀더 고급 정보가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지도(2)를 얻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지도에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이 문제였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다들 시선이 어디론가 향했다.
최유정 의사를 비롯해서 박주연 간호사와 김지희 간호사의 시선이 나와 한유미 간호사에게 향해 있었다.
그리고 한유미 간호사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