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9화
진세희 저 씨발 년이 박 부장을 위층으로 치워버리고 마음 편하게 나와 노닥거릴 생각으로 벌인 일인 것 같다.
부사장을 삼촌으로, 대주주를 남편으로 두고 있는 진세희에게 박명호 부장을 이사로 승진시키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무능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어차피 박 부장은 작년부터 이사로 이름이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다만, 그 공백을 채움에 있어서 나를 승진시킨 것은 꽤나 고생했을 것 같다.
그나마 이번에 내가 성공적으로 계약을 따낸 연성종합병원이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진세희를 회의실로 불러서 확인한 결과 역시나 이년의 짓이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듯 나에게 아양을 떨며 안겨왔다.
후우, 진급시켰다고 욕을 할 수도 없고, 대충 떡 한 번치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비록 차장으로 승진을 했다고 해도 귀찮고 어려운 일은 진세희 이년에게 다 떠넘기면 되니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이제 박 부장이 이 사무실을 떠나면 뭔가 좀 많이 허전할 것 같다.
욕을 하고 윽박질러도 나를 챙겨주던 사람을 그 양반 밖에 없었으니까.
잠시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누군가 내 옆에 다가왔다.
김상우 대리였다.
김 대리도 뭔가 마음이 심란한지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강 과장님, 이제 박 부장님 없으면 우리 접대 업무도 끝난 거 아닙니까?”
“그렇겠지.”
“후우, 이제 무슨 재미로 회사를 다니나.”
김 대리가 담배를 한껏 빨아 당겼다가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나도 고민이 되긴 한다.
나는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서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리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이라는 것을 통해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같이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즐기는 남자 직원들.
서울이 연고지가 아닌 나에게 유일한 인맥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직원들이다.
그래도 꿈속에서 이상한 시스템을 얻고 나서부터는 여자들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형성되고 있긴 하다.
그래서 잠시나마 이 회사를 떠나서 다른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돈을 떠나서 재밌게 할 수 있는 그런 일.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려보니 김상우 대리 역시 뭔가 고민이 많은 얼굴이다.
“김 대리는 이번에 승진 못해서 많이 섭섭하겠다.”
“섭섭한 것 까지는 아니고...사실, 친구 추천으로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는데면접 한 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이직...?”
“네, 대기업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지금 제 연봉보다는 훨씬 높더라고요.”
“음, 돈을 많이 주는 만큼 일이 힘들겠지. 잘 생각 해.”
“에이, 과장님. 저 여기서도 매일 새벽까지 일해요. 어딜 가도 여기보단 업무강도가 높진 않을걸요.”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업무 강도가 존나 센 편인데 나만 편하게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더 이상 내가 해 줄 말은 없다.
결정은 본인의 몫이니까.
한 달 후.
“그 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회사를 떠나게 되어 많이 아쉽네요.”
“김 대리, 정말 이렇게 가는 거야?”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 축하해. 대기업으로 간다는데 섭섭해도 축하할 일이지.”
“감사합니다. 강 과장...아니 강 차장님. 이제 승진도 하셨으니, 일 열심히 하시고 임원까지 쭉쭉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김상우 대리는 친구가 다니고 있다는 대기업에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다.
그리고 우리 회사를 떠났다.
나에게 매일같이 잔소리하며 욕을 하던 박 부장도 임원들이 사용하는 위층 사무실로 이동했다.
내가 차장으로 승진을 하고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업무는 끝없이 밀려드는 부하직원들의 결재서류.
이걸 승낙해야할지 기각시켜야할지 제대로 구분도 못하겠고 부담감은 늘어갔다.
도저히 내가 결정하지 못할 것들은 진세희에게 떠넘겼지만, 모든 업무를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마음먹었다.
씨발, 나도 이 회사에서 도망쳐야겠다!
진세희는 자신의 책상위에 올려 진 내 사직서를 보고는 절대 안 된다고 괴성을 질렀다.
진세희 뿐만 아니라 서연이 까지도 나를 말렸다.
심지어 위층에서 박 부장도 내려와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나의 여유롭고 즐겁던 회사 생활에서 멀어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과감하게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렇게 나는 하루아침에 개백수가 되어버렸다.
***
나는 현재 이유림의 할아버지가 마련해준 강남역 근처에 있는 아파트에서 이유림과 유서연, 그리고 박민지와 동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약 70평대를 자랑하는 이 아파트에는 방이 무려 5개나 된다.
전용 드레스 룸이 존재하는데 이것도 방으로 치면 6개다.
일단 가장 큰방은 나와 이유림이 함께 지내는 곳으로 정했고, 서연이와 민지가 각각 방 하나씩 차지했다.
그래도 아직은 3개의 방이 남아있다.
이런 큰 집에 나 혼자 남아있으니 뭔가 허전했다.
다들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 출근한 상태였고, 백수가 되어버린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내가 1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그만두었더니 존나 허전하다.
조금이라도 이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TV를 틀고 내가 좋아하는 예능방송을 시청했다.
운이 좋게도 때 마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 아이돌 그룹 <겨울소녀들>이 게스트로 등장해서 귀엽게 개인기도 하고 재밌었던 경험담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 모두 22살이 되었을 그녀들.
5명의 멤버들이 모두 존나 예쁘다.
이들은 각자의 컨셉이 겹치지 않게 섹시, 귀여움, 청순, 시크, 지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어느새 나는 TV앞에 달라붙어서 흐뭇하게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일도 하고 있지 않다보니까 계속 잡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겨울소녀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런 생각은 예전에도 하고 있었지만, 이들과의 접점이 없어서 도저히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녁이 되어 유림이가 퇴근하고 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겨울소녀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검사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유림이는 내 말에 조금 당황한 것 같다.
하지만 <겨울소녀들>이 가문의 재앙을 막기 위해 필요한 그 기운을 품고 있다는 말 한마디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는 대충 둘러대며 그녀들에 대해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했다.
“안 그래도 저와 민지, 그리고 서연이만으로는 기운이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잘됐네요.”
“그래, 가문의 재앙을 막기 위한 일이니까. 알아 봐 줄 수 있지?”
“내일 출근해서 알아보고 바로 연락할게요.”
“그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나는 기쁜 마음에 오늘 특별히 민지와 서연이를 방으로 들이지 않고 유림이와 단독으로 떡을 쳤다.
이유림은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는다.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필요한 기운을 흡수하는 과정이 성관계라는 걸 들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여성들과 섹스를 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질투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유림은 자신의 약혼자인 나에게 어떻게든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중이었다.
“민철 씨, 또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민철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예요.”
이유림은 분명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특명을 받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나와 결혼까지 골인하라고.
그리고 아버지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이미 내가 자신의 가문에서 가지는 권력을 봤을 때, 남편감으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
다음날 오전.
검찰청으로 출근한 유림이로부터 톡이 날아왔다.
내용을 보고 나는 입 꼬리가 올라갔다.
어제 내가 요청했던 <겨울소녀들>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사회 권력층과 가까이 지내고 있으니 너무 편하다.
아니, 편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일단 나는 빠른 속도로 5명의 주민등록번호를 암기하기 시작했다.
진짜 초인적인 힘이 작용했는지, 학창시절 제법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암기를 마쳤다.
아직도 시간은 오전.
혹시, 이 시간에 자고 있는 멤버가 있을까?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아이돌 가수가 이 시간에 자고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 때문에 결국 나는 침대에 누웠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퍼질러 자놓고도 역시나 베개에 머리가 닿고 10분 쯤 지나자 곧바로 잠들어버렸다.
꿈속으로 들어온 나는 <겨울소녀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차례로 입력해나갔다.
숫자 하나하나 입력할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역시, 첫 시도는 실패.
당연하게도 수면 중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을 소환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주민등록번호를 저장만 해두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계속 이어지는 실패 대행진.
후우, 이제 마지막 한명이 남아있다.
[현재 진혜주는 수면상태입니다.]
[해당 인물의 영혼을 불러 오겠습니까? YES/NO]
어?...진짜?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신인은 벗어났지만 그래봤자 아직 활동시기가 몇 년 안 되기 때문에 개인 활동은 거의 없고 어느 방송에 출연하더라도 단체로 움직인다.
그런데 4명의 멤버가 수면 중이 아닌 시점에, 진혜주가 수면상태라고 나타났다.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깨어나기 전에 얼른 소환을 하는 게 먼저였다.
잠시 후, 내 눈앞에 귀엽고 깜찍한 인형이 하나 나타났다.
TV에서 보던 것 보다 더 예쁘다.
진짜 진혜주의 영혼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직은 동기화과 되지 않은 상태여서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
일단은 나는 모습을 감추고 주변 환경도 적당히 깨끗하게 꾸며놓았다.
시간이 지나고 진혜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당황하며 주변부터 살피던 그녀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했다.
나는 ‘진실의 눈’을 진혜주에게 사용해서 그녀에 대한 신상정보를 털었다.
사소한 정보까지도 모두 알아낸 나는 현재 왜 진혜주 혼자서 수면상태인지도 알게 되었다.
현재 <겨울소녀들>은 지방 행사가 있어서 차량으로 장거리 이동 중이고, 진혜주는 잠시 차에서 잠이 든 상태였다.
뭐, 이런 정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진혜주의 성격부터 취미나 특기 등등 모두 다 알게 되었다.
여중, 여고, 연습생, 데뷔의 과정을 거치면서 연애 한 번 못해본 순수한 아이였다.
혜주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다른 멤버들 역시 비슷한 처지였다.
그래, 씨발 바로 이거지.
남자가 뭔지 내가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다.
내가 좋아하고 있을 때, 혜주의 상태가 불안정해졌다.
좀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신호였다.
아쉽지만 혜주를 이만 보내주기로 했다.
늦은 새벽시간.
이쯤이면 다들 잠이 들었겠지 싶어서 <겨울소녀들>을 모두 소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두 수면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씨발! 소속사 개새끼들이 어린 아이들을 얼마나 굴리고 있으면 아직도 잠을 못자고 있는 거야?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면서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렇게 새벽 4시 정도가 되었을 때, 모두가 잠들었다.
꿈에서는 이 아이들의 성격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알아내는 걸 목표로 현실에서 상남자의 맛을 보여주고 싶다.
강도 높은 스케쥴을 소화하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꿈에서라도 즐겨보라고 편의를 봐주었다.
이미 멤버들의 성향은 다 파악했으니 적당히 취향저격을 해서 먹고 싶은 음식과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꾸며주었다.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꿈속에서 놀고 있는 <겨울소녀들>을 보고 있으니 자꾸 삼촌의 마음이 되어 흐뭇하게 웃게 된다.
잠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현실에서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연예기획사는 방송 관계자들과친하게 지낸다고 알고 있는데 혹시, 이유림의 집안사람들 중에 관련 종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만만하고 편한 이한조에게 연락했다.
네, 이한조입니다.
“난데, 뭐 하나 좀 물어보자.”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 드리겠습니다.
“혹시, 집안사람들 중에서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 있어?
당연히 있습니다. 유림이 큰아버지가 SBC 방송국에 국장입니다.
“오오, 좋아.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마련 해봐.”
“알겠습니다. 그런데, 귀인의 용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 사전에 자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겨울소녀들>이 몸담고 있는 소속사의 이름을 말하며 여기에 있는 몇몇 연예인들이 기운을 품고 있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확실히 이 가문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가장 잘 먹힌다.
내가 기운을 많이 흡수해야지 자신의 가문에 닥쳐올 재앙을확실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설명을 들은 한조가 갑자기 큰아버지를 만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들은 나는 존나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귀인께서 말씀하신 ‘KC 엔터테인먼트’의 이규철 대표가 저와 잘 아는 사입니다. 그가 대표의 자리에 앉은 과정이 사실 깨끗하지는 않았습니다. 저희가 돈을 받고 뒤에서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제가 그의 비밀을 알고 있기도 하고 이규철 씨가 저를 좀 많이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만나시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