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70화
이제 회사도 때려치우고 마땅히 할 일 도 없는 백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나름 정장까지 차려입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잠시 주차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덩치가 존나 크고 존재감이 남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이유림의 사촌 오빠인 한조.
“안녕하십니까. 민철 형님. 모시겠습니다.”
“호칭을 꼭 형님이라고 해야 되나...”
“외부인과의 만남에서 귀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긴 하지.”
내가 한조보다 나이가 조금 많긴 하니까 형님이란 호칭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 녀석이 그렇게 부르면 느낌이 조금 이상해진다.
거기다 한조가 타고 온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승용차에서 덩치 큰 두 사내가 내리더니 나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히며 ‘형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외치고있으니 지하주차장을 오가던 아파트 주민들이 슬금슬금 피해버린다.
한조의 동생들 쯤으로 보이는데 역시나 존나 무섭게 생긴 녀석들이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나의 호위라고 데리고 왔다는데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무슨 대통령 경호하듯이 뒷좌석의 중앙에 나를 앉히고 양 사이드로 덩치 두 명이 앉아있다.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이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서라도 한조가 직접 운전을 한다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내가 한조와 함께 향한 곳은 KC 엔터테인먼트였다.
3대 기획사답게 건물의 규모도 크고 무척 화려했다.
입구에서부터 경비들이 팬들의 무단침입을 막기 위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이미 입구에 마중을 나와 있는 직원 덕분에 우리는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1층에는 소속 연예인들만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카페가 있는데,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고 있지만 다들 얼굴도 작고 비율이 예술이다.
누군지도 잘 알고있다.
물론, 친분이 있다는 건 아니고 TV에서 자주 봐서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걸그룹이고 이제 활동을 시작한지는 5년이 조금 넘은 이들이다.
비록 지금은 내가 <겨울소녀들>에 푹 빠져있어서 조금 후순위로 밀려나긴 했지만, 예전에는 정말 좋아하던 아이돌이었다.
이렇게 실제로 보니 느낌이 새롭다.
KC 엔터테인먼트는 3대 기획사인 만큼 규모가 상당하고 수많은 연예인들이 소속되어 있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건 아이돌이지만 중견 가수들이나 배우들도 제법 있다.
그래서 복도를 오가며 벌써 몇 명의 연예인들과 마주쳤다.
내가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듯이 그 연예인들도 덩치가 존나 큰 한조와 그 동생들을 대동하고 걸어가는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내가 정신없이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동안 벌써 대표실 앞까지도착해버렸다.
대표실 앞에서 우리를 안내 한 직원이 노크를 했다.
“대표님, 손님들 오셨습니다.”
직원이 우리가 왔음을 알리고 불과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문이 열리며 나보다 겨우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아, 한조 씨. 어...어서 와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다 하고 무슨 일이라도...”
“저희가 꼭 무슨 일 있어야 볼 수 있는 그런 사이였습니까?”
“아...아하하. 당연히 그렇지는 않죠. 그것보다 이리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 합시다.”
확실히 이규철 대표의 말투나 표정을 보니 한조를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일정도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대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대표실에는 이규철 혼자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젊은 여성 한명과 대화중이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기겁했다.
“꺄악!”
“아니,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이 분들은 이번에 우리 소속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는 분들인데 그, 그...배역을 맡으신 분들이야.”
“아,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내가 이 분들과 좀 급하게 상의할게 있으니까 우리 나누던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자. 너도 바쁠 테니 얼른 나가 봐.”
“네, 대표님.”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여배우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데 이번 기회에 KC 엔터테인먼트로 들어오게 된 모양이다.
아무튼 이 여성은 한조를 비롯해서 덩치 큰 동생들이 한 번에 대표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존나 놀란 듯 하고, 이규철이 한조와 동생들을 조폭 역을 맡은 배우들이라고 둘러댔다.
여배우가 나가고 이규철이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그는 뭔가 비굴하면서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과연 한조가 무슨 일로 찾아왔을가 싶은 표정이다.
그런데 한조의 첫마디는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저 여배우도 스폰서 대상 명단에 포함 시키면되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스, 스폰서라니요...”
한조의 물음에 이규철이 손을 마구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려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이규철의 행동에 한조가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내가 모시는 형님입니다. 저희 사이에 비밀 같은 건 없으니 그냥 저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해도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네, 스폰서 제의 때문에 이번에 계약한 배우가 맞습니다. 원하시는 고객이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한조가 이규철에 대한 비밀을 많이 알고 있고, 깨끗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하더니 소속 연예인을 상대로 스폰서 사업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조가 중개하고 있다면 이규철 입장에서 껄끄러운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스폰서 명단 관리 때문이라면 굳이 이렇게 찾아오지 않으셔도 전화로 말씀 드리면 되는데...”
“당연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왔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규철은 한조의 표정을 보면서 점점 불안함을 느끼는지 계속해서 말끝을 흐리고 있다.
“제가 모시는 형님께서 여기서 일을 좀 하고 싶어해서 말입니다.”
“형님이시라면...여기 이분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규철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원래 어떤 직종의 일을 하셨습니까?”
“영업 관련 일을 했습니다.”
“그럼, 홍보 쪽이나 연예인들 관련 캐릭터 사업에 관련해서 영업을 원하십니까?”
그래도 영업 관련 쪽으로 직원이 부족한지 내 대답을 들은 이규철이 눈을 빛내며 빠르게 물어왔다.
내 외모가 그리 젊어 보이는 건 아니니 경험도 상당하고 생각 할 테고, 오히려 살짝 기대에 찬 눈빛이다.
어차피 거절하기 힘든 한조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부족한 인력도 충원할 수 있으니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 딴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영업 관련 업무를 원했으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이유도 없었겠죠.”
“그, 그럼 어떤 업무를...?”
“매니저를 해보고 싶어서요.”
“네에?”
매니저도 나름 등급이 있다.
당연히 경력이 쌓여야 실장급으로 진급이 이루어진다.
단순히 직책이 오르고 급여가 오른다는 개념보다는 그 만큼 이 업종에 베테랑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아무런 경력도 없다면 연예인들의 운전수 노릇을 하며 각종 잔심부름을 해주는 로드매니저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로드매니저의 임금은 최저시급이 이 바닥의 법칙이기도 하다.
지금 이규철은 상당히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이한조가 형님이라고 데려온 사람을 고작 로드매니저로 취업시켜주면 절대 가만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실장급으로 대우를 해주려니 업무 자체를 할 수 없을게 뻔하고.
나는 이규철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서 먼저 원하는 것을 말했다.
“로드매니저 업무를 보겠습니다.”
“저, 정말...괜찮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이규철의 표정이 또 다시 살짝 밝아졌다.
사실, 이 로드매니저라는 직업이 잠도 제대로 못자고 존나 힘든 3D업종인데 돈은 최저시급을 겨우 받는 정도라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항상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당연히 반색할 수밖에 없다.
“대신, 겨울소녀들 로드매니저를 시켜주세요.”
“아, 아니! 그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어차피 로드매니저면 운전하고 필요한 물건 사다주고 그게 끝 아닙니까?”
“무, 물론 그게 주 업무이긴 하지만...꼭 그 업무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다른연예인들은 몰라도 겨울소녀들은 현재 저희 소속사에서 가장 큰 수입을 내고 있는 애들이라서 일부러 경험 있는 매니저를 붙여놨는데...”
한마디로 나는 경험도 없고 불안하니까, 돈 되는 애들은 안 된다.
그냥 너는 아까 봤던 그 여배우처럼 스폰서로 쓰기 위해서 들어온 애들이나 따라다녀라.
이런 뜻이다.
이런 씨발 새끼가! 어디서!
나는 고개를 돌려서 한조를 바라봤다.
그냥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는 내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 것 같다.
내 시선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한조가 이규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규철 대표님. 그래서 뭐, 싫다는 말입니까?”
“아, 아니...그러니까....그게...”
“제가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여기 형님은 제가 진심으로 모시는 분이라고. 이 대표님에게는 제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까?”
“......”
“후우, 이거 섭섭합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한조 씨, 제 말을 한 번 들어보세요...저는 최대한 이 분이 힘들지 않게 일하도록 배려를 하는 마음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괜히 겨울소녀들을 담당해 봤자 스케쥴이 너무 빡빡해서 잠잘 시간도 많이 없고 5명이나 되는 애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 애들 스케쥴 대폭 줄이세요. 그리고 잔심부름 따위 못시키게하세요.”
“헉! 잔심부름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케쥴을 줄이라니요...지금이 가장 인기가 좋은 시기인데...”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지금 저와의 신뢰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손해일까요? 그리고 지금의 겨울소녀들이 있게 만들어준 사람이 누군지 잊었습니까?”
“하, 한조 씨가 방송국 관계자들을 잘 관리해 준 덕분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다시 대답을 듣고 저희는 이곳에서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오, 한조의 자신감이 겨우 스폰서 따위의 비밀에서 나온 게 아니었네.
생각보다 한조 녀석의 인맥이 넓은 것 같다.
말을 들어보면 방송국에 있는 거물들에게 주기적으로 룸 접대하고 스폰서를 연결시켜준 모양이다.
덕분에 겨울소녀들을 포함해서 KC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이 인기 있는 프로에 쉽게 출연 할 수 있는 것이고.
뭐, 이정도면 이규철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고 봐야지.
“서, 성함이 강민철 씨라고 했나요? 출근 날짜를 잡도록 하죠...업무는 겨울소녀들의 로드매니저로 하겠습니다.”
“네, 강민철입니다.”
그리고 한조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아차, 보수는 대표님이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요즘 실장들이 어느 정도 받는다고 하더라...”
“하, 하하...당연히 연봉은 실장급에 맞춰서 드려야지요...”
협상을 존나 깔끔하고 멋있게 해버린 한조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한조는 매니저 일을 하면서도 불편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말하라고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출근은 1주후로 정해지면서 드디어 백수를 탈출하게 되었다.
원래는 내일이라도 바로 시작하려고 했는데, 기존에 업무를 보고 있는 매니저를 생각해서라도 조금의 시간을 달라고 대표가 사정하는 바람에 인간적으로 수락해 주었다.
나는 1주일의 시간이 너무 더디게 지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그래도 6일 까지는 버틸만 했는데, 하루를 남겨두고 있는 지금은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다.
내일이면 드디어 출근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베개에 머리가 닿기만 해도 잠이 드는 난데, 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뒤척이고 또 뒤척이다가 거의 2시간 만에 잠이 들었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던 출근 날이 다가왔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KC 엔터테인먼트로 차를 몰았다.
일단 출근하면 바로 대표실로 오라는 말을 들었기에 그곳으로 향했다.
대표실 앞에 도착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예의상 노크 한 번 해주고 바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표실에는 이규철과 함께 5명의 인형이 서 있었다.
“앗! 새로 오신 매니저 오빠...가 아니고....삼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