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화
이른 새벽4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최고급 아파트에 비해서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 비싸 보이는 아파트 앞에 검정색 밴을 주차해두고 대기 중이다.
여기가 바로 겨울소녀들의 숙소.
여성 스타일리스트가 그녀들을 깨우러 들어갔으니 곧 나올 것이다.
원래 매너지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가 직접 깨우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걸 상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렇게 나의 로망 중 하나가 막혀버린 상황.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조금 더 친해지면 내가 직접해야할 업무 리스트로 점찍어두었다.
30분 정도가 지나자 좀비마냥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5명의 소녀들이 보인다.
차에서 이동 중에 잔 시간은 빼고, 집에 도착해서 제대로 잔 건, 겨우 3시간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피곤할까.
겨울소녀들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그대로 스르륵 다시 잠들어버렸다.
첫 스케쥴은 7시에 시작되지만 메이크업을 하고 촬영 장소까지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지금도 여유롭지 못하다.
그래도 메이크업을 하는 샵에 도착해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직원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잠이 좀 깬 것 같다.
연예인들이 흔히 방송에서 말하는 샵 동기들도 많이 보였다.
나는 곁눈질로 다른 연예인들도 봤지만 확실히 우리 겨울소녀들 보다 예쁘진 않은 것 같다.
벌써 한 달 째,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지만,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예쁘다고 생각한다.
나도 샵 직원에게 건네받은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대폰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제법 큰 샵이기에 이런 새벽시간에는 주변에 널린 게 빈 소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 옆에 앉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다가 나는 저절로 입이 벌어지며 미소가 지어졌다.
“혜주가 1등으로 끝났네?”
“오늘 제 컨셉은 그냥 단정한 스타일이라서 별로 꾸밀 게 없거든요. 나도 화려하게 꾸미고 싶었는데...”
“원판이 워낙 예쁘니까, 최대한 덜 꾸미는 게 더 좋아.”
“헤에~ 진짜요?”
“당연하지.”
내 말에 혜주가 해맑게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직 다른 멤버들의 메이크업이 끝나려면 1시간 이상 남았으니 심심한 모양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뭘 하나 봤더니 아주 익숙한 장면이 보인다.
“어? 혜주 너도 게임 같은걸 하니?”
“이거 저희가 모델로 광고한 게임이잖아요. 처음에는 광고 때문에 게임하는 장면을 연출해야한다고 조금은 해보고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계속 하고 있어요. 다른 멤버들도 다 같이 해요. 근데, 삼촌도 이 게임 해요?”
“최근에는 좀 뜸했지만 진짜 열심히 하던 게임이지.”
“오오~ 레벨 몇인데요?”
“레벨이...145던가.”
“우왕! 진짜 높다. 우리도 이 게임 출시하고부터 계속 해오고 있어서 나름 고렙인 편인데, 삼촌한테는 안 되네요.”
요즘 대부분의 모바일 게임이 그렇듯, 겨울소녀들이 모델로 광고를 했던 이 게임도 자동사냥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사냥만 주구장창 돌리는 것과 직접 컨트롤하면서 어려운 사냥터를 돌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파티를 해서 보스몹 레이드를 주로 하는 경우의 성장 속도가 같을 수는 없는 법.
겨울소녀들의 빡빡한 스케쥴만 봐도 직접 플레이할 시간은 거의 없다.
대부분 자동사냥을 돌려두었을 테니, 나와 레벨 차이가 나는 건 당연했다.
혜주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며 나는 살짝 자랑하듯 한마디를 보탰다.
“한 때는 서버 랭킹 10위권 안에 들었어.”
“서버는 어딘데요?”
“12서버. 너희는?”
“헛! 우리도 12서버!”
서버마저 똑같다는 걸 알고부터 나와 겨울소녀들 사이에는 처음으로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혜주가 내 캐릭터를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나는 직접 확인시켜주었다.
“대, 대박! 장비도 엄청 좋아!”
혜주의 눈이내 휴대폰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어느새 나와 완전히 밀착해서 앉아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오로지 내 휴대폰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향수 같은 걸 전혀 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그 살결 냄새가 나를 자극했다.
아무리 매니저와 소속 연예인이라고 하지만 너무 다정하게 딱 달라붙어서 즐겁게 웃고 있으니 주변에서 조금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때, 하나 둘씩 메이크업을 마친 멤버들이 몰려왔다.
“혜주야, 뭐해?”
“다들 와서 매니저 삼촌 캐릭터 좀 봐봐!”
“응? 무슨 캐릭터?”
“삼촌도 <더 월드>유저라는데 우리랑 같은 서버야. 그런데 완전 고렙!”
“진짜? 진짜?”
“와! 장비 짱 멋있다!”
겨울소녀들은 밴에 올라타서도 잠을 자지 않고 휴대폰을 들고 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원래는 대충 자동모드로 해놓고 잠을 자야 정상인데, 자기들끼리 파티를 맺고 직접 플레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뭔가 내 캐릭터를 구경한 이후로 불이 붙은 것 같다.
나는 잠도 자지 않고 저러고 있는 겨울소녀들을 보며 살짝 걱정이 됐다.
괜히 촬영 중에 피곤해서 졸면 안 되는데.
“저기, 얘들아. 피곤할 텐데 조금이라도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에이, 자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낙은 게임밖에 없는데요?”
“맞아 맞아. 연애 같은 건 진짜 소속사에서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으니까 감히 꿈도 못 꾸고, 매일 차안에 있거나 촬영장에서 대기하는 게 대부분인데, 모바일 게임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삼촌 가입된 길드 없죠?”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
“그럼 우리 길드 가입해요!”
“응? 너희 길드도 있어?”
“혜주가 길마인데 우리 멤버들이랑 친한 연예인들 몇몇 가입되어 있어요.”
“상관은 없는데...너희들이 워낙 바빠서 같이 할 시간은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은 만들면 되는 거죠~”
겨울소녀들의 매니저로 취업하면서 접기로 했던 게임을 얼떨결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볼 때는 잠잘 시간도 부족한 이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혜주가 만든 길드에 가입하고 시간 날 때 같이 게임을 하기로 했다.
***
겨울소녀들이 존나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가끔씩 하루 정도는 스케쥴 없이 쉬는 날도 있다.
특히 돈 되는 행사를 연속으로 뛰고 나면 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휴일이다.
내가 매니저 일을 하고는 아마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일인 것 같다.
보통 이렇게 내가 맡은 연예인의 스케쥴이 없다고 해서 매니저도 함께 쉬는 건 아니다.
회사의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매니저는 회사에 나와서 다른 잡무들을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매니저들과는 경우가 다르기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가 충전되는 겨울소녀들이라고 해도 나도 체력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늦게까지 퍼질러 자려고 했다.
그런데 미친 듯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깰 수밖에 없었다.
짜증나서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 그래...혜주야, 오늘 휴일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니?”
삼촌! 만나서 같이 게임해요~
“어, 어....그러니까, 혜주야 오늘 같은 날이 자주 있는 게 아니야. 우리 다 같이 푹 쉬면서 에너지 충전을 하는 게 어떻겠니?”
에이, 삼촌이랑 파티 맺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레벨 올렸는데요. 지금 다른 멤버들도 다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끄응, 삼촌이 지금 너무 피곤한데...”
숙소에 오시면 저희가 맛있는 것도 만들어 드릴게요~
“으응? 방금 숙소라고 했어?”
네, 오늘 아주머니도 없어서 오셔도 돼요.
아무리 피곤해도 겨울소녀들의 숙소는 한 번 구경해보고 싶다.
과연 이 인형들이 사는 곳은 어떤 곳일까.
오늘이 아니면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 한 번 가봐야겠다.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좀 그러니까...
“음, 잠시 생각 좀 해보고...”
이러기에요? 길마의 소집에 불응하는 길드원이라니!
“그래, 알았어. 갈게.”
히힛, 빨리 와요~
혜주의 귀여운 애교에 무장해제 된 나는 곧바로 간다고 대답했다.
피곤하긴 하지만 우리 귀염둥이들을 보러 간다는 생각에 금세 잠이 달아났다.
비록 숙소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직접 그녀들의 숙소에 입성했다.
“삼촌! 어서와요~”
“이렇게 숙소에서 보니까, 뭔가 느낌이 새롭네요.”
“삼촌, 빨리빨리 사냥하러가요!”
“나는 요리 해야 하니까 잠시 파티에서 제외 시켜줘.”
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우르르 뛰쳐나온 겨울소녀들이 동시에 자기 할 말을 쏟아내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각자가 하는 말은 솔직히 내 귀에 전혀 들리지 않고, 내 눈은 열심히 집안을 훑어보다가 겨울소녀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다들 잠잘 때나 입고 있던 짧은 반바지와 반팔 차림이었다.
화장도 전혀 하지 않은 순수 본래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나는 그게 더 예쁘게 보였다.
아직 나이도 어려서 피부가 워낙 좋으니 솔직히 화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나는 겨울소녀들에게 연행되듯 양팔이 붙잡혀서 소파에 끌려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어 <더 월드>에 접속했다.
나와 함께 하는 첫 파티 사냥에 들떠 있는 모습이다.
요리를 곧 잘하는 승연이는 부엌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뭔가를 만들고 있고, 나머지 혜주, 은설, 연희, 나연은 나와 함께 게임을 시작했다.
나도 겨울소녀들과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이 상황이 좀 어이없기도 하고 은근 재밌기도 했다.
대부분의 레벨을 자동사냥으로 올렸다고 해서 무시했는데, 의외로 다들 컨트롤이 괜찮았다.
특히 길마인 혜주는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았다.
물론, 내가 더 잘하긴 한다.
“으헤헤~ 삼촌이랑 같이 하니까 너무 재밌다. 장비도 좋고 컨트롤도 좋아서 사냥이 너무 쉽네~”
“오오! 레어템 떨어졌어!”
“아싸! 내 직업 전용이네.”
“아, 아쉽다...”
겨울소녀들이 이 게임의 광고모델인 만큼, 각 캐릭터에 겨울소녀들의 외형이 존재한다.
그리고 겨울소녀들의 캐릭터는 각기 다른 직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겨울소녀들은 자신의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선택했기에 직업이 겹치지 않고, 이렇게 아이템이 떨어지면 싸울 일도 없이 쉽게 분배가 가능했다.
그런데 문득 내 캐릭터를 보던 혜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삼촌은 제 외형의 캐릭터를 골랐네요?”
“음, 전사 캐릭터가 젤 재밌을 것 같아서.”
“에이~ 삼촌 혜주 팬이구나?”
“아, 너무 섭섭해서 눈물 나. 히잉~”
내 캐릭터가 혜주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사실에 다들 나를 놀려대기 바빴다.
나는 진짜 겨울소녀들을 편견 없이 모두 다 좋아한다.
혜주 캐릭터를 선택한 건 그저 내가 전사 캐릭터를 좋아해서일 뿐인데.
“나는 <겨울소녀들> 팬이거든. 그냥 캐릭터 자체가 내 취향일 뿐이야. 자, 다시 던전이나 한 바퀴 더 돌자.”
“네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같이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승연이가 만든 닭볶음탕이 나왔다.
요리를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나 싶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알고 보니 승연이의 어머니가 식당을 하는데 중학생 때부터 종종 가게 일을 도우면서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삼촌, 쉬는 날에 자주 놀러 와요. 또 만들어드릴게요.”
“그래. 그래. 자주 올게.”
“아, 빨리 또 쉬는 날 다가왔으면 좋겠다. 삼촌이랑 게임하니까 너무 재밌어.”
“지금까지 우리 담당했던 매니저 오빠들 보다 삼촌이 백배, 아니 천배 좋다. 히히.”
“맞아. 지금까지 매니저 오빠들은 맨날 회사 눈치만 보면서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기록해서 보고하고. 이건, 이래서 안 된다. 저건, 저래서 안 된다. 어휴, 아이돌이니까 연애하는 걸 감시하는 것 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너무 모든 사생활을 간섭하니까 무슨 죄인 된 기분이었다니까.”
“진짜, 삼촌은 대표님이랑 잘 아는 사이에요? 전혀 우리를 감시한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너희들이 알아서 잘 하는데 감시가 왜 필요해.”
“아, 처음에 대표실에서 삼촌 처음 봤을 때, 또 꼰대가 왔나 싶어서 너무 실망했는데, 완전 좋아요!”
그래, 이유야 어찌됐건, 비호감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겨울소녀들을 진정한 여자로 성장시키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을 해봐야겠지만, 이런 식의 시작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나마 게임이라는 관심사로 더 가까워지긴 했는데, 그 이상의 진도를 어떻게 나가면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꿈속에서 들어왔더니 오랜만에 반가운...아니 좆같은 유료업그레이드에 관한 메시지가 나를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