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99화
당사자인 아영이는 끝까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듯, 아영이의 의견 따위는 아예 무시해버렸다.
결국, 참다못한 아영이는 할아버지인 이유권을 찾아갔다.
당연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정리해 주리라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유권의 방에서 나올 때 아영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아영이는 최후의 수단으로 가출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코웃음을 치며 한조를 통해서 다시 잡아올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가출했다가 잡혀오면 감금시켜버릴 테니 알아서 하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나는 아영이의 부모님이 말한 파격적인 조건에 대해서 한 번 고민해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림의 사촌동생을 첩으로 들인다는 것이 좀 어이없기도 하지만 제법 솔깃한 제안이기도 했다.
며칠 뒤.
이유권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나를 급히 찾았다.
아무래도 아영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싶다.
오늘은 운전하기도 귀찮아서 나를 모시러 오겠다는 한조의 말에 동의하며 좀 편하게 이동하기로 했다.
한조의 차에 올라서 넌지시 물었다.
“할아버지가 왜 나를 보자고 하는지 혹시 알아?”
“아무래도 아영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제 추측일 뿐입니다.”
“역시 그렇지? 내 생각에도 그 내용일 것 같긴 하다.”
“어떤 결정을 해도 상관없으니, 눈치 보지 말고 형님의 뜻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지만 막상 이렇게 말해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역시 한조는 지금까지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마음을 비우고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벌써 이유권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는 내가 깨어날 때 까지 그냥 대기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냥 깨워.”
“알겠습니다.”
벌써 2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차에서 내려 이유권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보다 꽤나 많이 늦었지만 이유권도 나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차를 다시 가져 오거라.”
식어버린 차를 다시 가져오라는 말이 전부였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방을 구경하는 척 하며 말했다.
“제가, 잠시 차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허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늦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걸까?
평소 이유권의 모습은 항상 여유가 넘쳐흐른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나에게 할 말이 있는데 몇 번이나 속으로삼키며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먼저 운을 떼보기로 했다.
“혹시 아영이가 제 첩으로 들어오는 문제 때문에 그런 겁니까?”
“아아, 그건 크게 문제될 것 없습니다. 귀인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지?
괜히 불안해지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차를 들고 들어왔다.
기분도 전환할 겸, 나와 이유권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비싼 차라서 그런지 향도 좋고 마음이 차분해 지는 느낌이다.
이유권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는 줄 알지만,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크흠, 제가 알기로 현재 귀인께서는 한조의 소개로 그...연예인들의 사무실에서 운전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KC 엔터테인먼트에서 로드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게...아직유림이와 결혼식을 올린 건 아니지만 슬슬 귀인을 저희 가문의 사람으로 주변에 소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대외적인 직업이 좀...”
“소개라고 하시면...?”
“조만간 정계의 인물들이나 기업을 운영하는 임원들을 만나면서 안면을 익히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유림이의 직업이 검사이기도 해서 그들과의 만남을 피할 수는 없으니...”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딱히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괜히 긴장했다는 생각이 들며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뭐, 이제 겨울소녀들과의 관계는 확고해졌으니 매니저를 그만두어도 아무런 상관은 없다.
문제는 이 가문에 어울리는 직업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다.
돈이라면 이제 존나 많으니까 사업가로 변신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사업을 잘 할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다.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긴 했지만 그 과정이 좀 오래 거릴 텐데, 괜찮겠습니까?”
“업무를 배우는 데 오래 걸린다는 말씀이신지?”
“제가 귀인께 추천 드리는 직업은 교수입니다.”
“네?”
“일단 귀인의 학벌이 그리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 학문에 조예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석사와 박사 과정을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살짝 당황스럽다.
석사와 박사 과정을 아무리 빠르게 거친다고 해도 몇 년은 걸릴 텐데.
이유권이 어렵게 나에게 말을 꺼낸 만큼 나도 좀 더 신중하게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원래 박사 학위를 따기 어려운 이유는 학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당 교수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논문을 어떻게든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이런 건 이유권의 인맥으로 모두 해결 해 줄 테니 의외로 학교생활이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놀러 다닌다고 생각하고 몇 년 투자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솔직히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라도 정교수가 되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런데 학위만 취득하면 떡하니 교수자리까지 주겠다고 하니 욕심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당연히 정규직이겠지?
혹시나 싶어서 이유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제가 만약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면 정규직 교수로 임용되는 겁니까?”
“당연한 말씀입니다. 한국대학교의 총장이 저와 아주 친한 사이기도 하고 경영학과 쪽에 교수진들 대부분이 저희 가문의 도움으로 임용되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나쁘지는 않은 조건이네요. 그런데 제가 학업에 손을 놓은 지 워낙 오래돼서 경영학 개론에 대한 지식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만...”
“허허, 공부는 천천히 다시 하시면 됩니다. 성적은 어차피 좋게 나올 수 있도록 제가 말해놓을 테니까요.”
“그럼 내년에 바로 석사과정을 등록하도록 하겠습니다.”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예상치도 못했던 학생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갈 운명이 되었다.
그래도 성적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대학원생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없을 거다.
수업이 많아봐야 하루에 2과목정도.
물론, 수업이 없는 날도 있다.
원래 대부분의 시간은 교수의 잡심부름이나 하고 논문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 과정을 모두 생략할 수 있으니 백수와 그리 큰 차이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다.
바로 파릇파릇한 여대생들이 많다는 것.
특히 경영학과는 여성 비율이 꽤 높기 때문에 나름 재밌을 것 같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재밌고 짜릿한 대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일단, 학부생들과 친하게 지내려면 역시나 조교를 하는 게 좋겠지?
아, 그리고 아영이도 내년에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할 거라고 했었는데.
비록 나는 대학원생이고 아영이는 학부생이지만 함께 한국대학교의 경영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 셈이다.
이거 뭔가 상상만 해도 존나 재밌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KC 엔터테인먼트에서 퇴사를 하고 1년이 훌쩍 지나서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석사과정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내가 퇴사를 할 때, 겨울소녀들이 울면서 매달리는 바람에 달래주느라 꽤나 고생했다.
반면에 대표인 이규철과 배윤지의경우는 아쉽다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 존나 좋아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그래서 나는 배윤지에게 매니저 일을 그만두더라도 자주 집으로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당연히 배윤지는 기겁하며 이제 제발 좀 그만 괴롭히라며 사정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몇 번 찾아가서 괴롭히긴 했는데 막상 매니저를 그만두고 나니 점점 시들해지면서 요즘은 거의 방문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1년 동안 좀 심하게 괴롭혔으니 이제 놓아줄 때도 되긴 했다.
덕분에 성격도 많이 변한 건 사실이다.
착해진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은 고쳐졌다.
앞으로 교수가 되어서도 인성이 더러운 학생은 배윤지처럼 교육시키면 금방 뜯어고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과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학생들도 내 방식대로 채벌을 해야지.
아 생각만 해도 존나 흥분된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나는 거의 십년 만에 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뭔가 어색하기도 하면서 긴장이 되기도 한다.
아, 그리고 아영이는 정말로 천재가 확실한 것 같다.
설마 했는데 진짜 1년 재수해서 한국대 경영학과에 합격을 해버렸다.
내가 수능 전날에 합격하라고 엿 대신에 떡을 준 것도 분명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먹는 떡 말고 내 자지로 아영이의 보지를 쑤셔주며 직접 떡을 쳐줬다.
가문 회의에서 아영이는 내 첩이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그녀도 어느 정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래도 종종 반항기 있는 모습을 보이긴 한다.
하지만, 귀여워서 웬만하면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1주일 후.
드디어 한국대학교에 대학원생으로 입학을 했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학교에 등교를 하고 있으니 에너지가 넘치고 한층 젊어진 느낌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교수들과 함께 모여서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다들 헤어졌다.
그런데 학장이 나를 호명하며 잠시 남아달라고 했다.
함께 입학한 대학원생들은 내 태도가 불량하거나 해서 벌써부터 찍힌 건 아닐까 하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하지만 다른 대학원생들이 나가고 나서 교수들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하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쓸데없는 인사말을 많이도 한다.
이유권을 통해서 이미 나에 대한 정보가 넘어왔을 테니, 미리 잘보이고 싶은 거겠지.
그래도 내 성적을 책임질 교수들이니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로 했다.
“조교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보통 조교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하는 건데,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저희가 알아서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신청하는 겁니다.”
“아, 뭐. 그렇다면 당연히 자리를 만들어 드려야지요...권 교수, 먼저 지원했던 대학원생 탈락 시켜.”
“네, 학과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수업도 들어야 하고 학부생들 관리도 해야 할 테니, 조금 바빠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