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음계록(蔭界錄) - 1999[판타지](8)
동혁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한다.
“ 난 이곳에 와서 많은 눈물, 땀, 오줌, 똥을 쌌고 너한테 먹이기도 했어. 니 말대로라면 그걸 일일히 회수해야 되잖아. 내가 돌아가려면 그래야겠네 ”
“ 맞아. 걱정 마. 그거 모으는 건 일도 아냐. 어차피 내 몸 안에 몽땅 있으니까 ”
“ 너한테만 먹인 게 아닌데 ”
“ 그래봤자 나랑 이어진 애들이었잖아 ”
“ 잘 됐다! 보내 줘 ”
“ 아이 참. 돌려보내는 방법을 모른데도. 너랑 맨처음 만날 때부터 줄창 말하지 않았냐. 더욱이 이제 넌 사람의 아들임과 아울러 음계의 아들이기도 해. 음계의 에너지가 니 살이의 많은 조각들을 책임지고 있잖아. 따라서 니가 음계를 빠져나가면 음계는 멈춰버리게 될 꺼야. 하긴 그건 쉽게 풀 수 있지. 너에게 있는 음계의 에너지들을 조금씩 음계로 보낼 수 있도록 계약을 짜면, 순조롭게 음계를 다시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을 거야 ”
“ 나의 이시스, 보내 줘! ”
“ 이시스? 그럼 넌 오시리스가 되고 싶니? 그러러면 힘들텐데. 먼저 아우한테 맞아 죽어서 나일강에 빠져야 되고, 나한테 붕대에 묶여야 되고, 아우를 때려 죽여야 하고, 저승에서 심판해야 하고, 다른 자아들과 뒤섞여야 돼. 초존재가 되어도 힘들겠다 ”
“ 훗. 초존재? 그건 자연 과학이라는 종교의 신이야. 모든 종교는 마음을 지닌 초월자랑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야. 따라서 사람 가운데 오직 나만이 종교를 버릴 수 있어. 난 이미 너랑 만나고 있으니까 ”
디도가 눈을 멀뚱거리더니 쏘아붙인다. 그녀의 말은 허공에 쓰여져 동혁의 이해를 돕곤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 음계(蔭界)는 음계(淫界)랬으면서. 나랑 수루치더러 음계의 갈보라며. 내 음부를 걸레 삼아 창틀을 닦은 게 누군데 그딴 말을 하는 거야. 부끄럽긴 하나 보네, 벌게진 걸 보니까 ”
동혁도 영장목 사람속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들어 있으므로 성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달고 있을 밖에 없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를 더하여 남자 몸은 모두 보기 안 좋다고 여기고 있다. 여자끼리의 동성애는 예쁜 짓이라고까지 하면서도 남자끼리의 동성애는 떠올리기도 싫은 까닭도 그와 같다. 목숨이 태어날 때부터 나타난 이중성은 그렇게 동혁에게 힘을 뻗치고 있다.
디도가 말한다.
“ 너 나랑 헤어지긴 싫지 ”
“ 물론. 언제든지 음계로 갈 수만 있다면 좋지. 번잡한 일상을 잊을 수 있는 도피처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좋잖아. 어마어마하고 날 선 싸움질을 잊을 수 있는 성역을 지닐 수 있다는 것도 아주 좋지 ”
“ 무책임하군 ”
‘ 뭐! 입 닥쳐 ’
동혁이 디도와 입맞춘다.
갑자기 디도가 옆에 또 하나 나타난다.
“ 왜. 그룹 섹스 할려고? ”
디도가 나누어진 건 아니다. 그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디도가 지닌 통합성은 동혁이 알 수 없는 높은 데(고도, Goddot)에 머물러 있다.
“ 아니. 이스비니가 총공격을 해오고 있어. 같이 가자 ”
“ 그러지 ”
다음 순간 동혁은 싸움터 한복판에 놓여진다. 이쪽엔 디도 혼자지만 저쪽엔 끝없이 많은 군세가 있다. 온갖 흉물스런 괴물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생김새들. 겉보기만큼이나 사악하고 야릇할 그들의 됨됨이가 느껴진다. 선봉에도. 가운데에도. 너머에도 이스비니가 안개처럼 서 있다.
그들은 디도를 벵 둘러 그물에 넣고 온갖 잔혹한 짓을 저지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침략, 방화, 고문, 윤간, 살해, 억압, 착취, 약탈, 소름끼치고 공동체의 착함과 효율을 해치는 움직임들. 동혁이 디도에게 가르쳤기에 마침내 음계 모두가 배우고야 말 것들. 지구에서는 그같은 움직임들은 귀족주의자들에게도 마침내는 환영받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런 움직임들은 높은 수준의 진화를 결코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음계에서는 다르다. 끝없이 늘어나는 파라브라자의 힘은 다른 가치를 바랄 가능성을 뿌리부터 뽑아버릴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마성적인 에너지주의가 지닐 수 있는 끄뜨머리 알(구극)의 섬뜩함.
이스비니는 제 제국 모두를 끌고 나타난 것 같았다. 마하 지바가 지닌 끝모를 의지가, 헛된 움직임을 벌이는 한 아한카라를 혼내기 위해 나타난 듯하다.
“ 뭐야. 음계는 집단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 . 계약이라는 건 싸움을 위한 게 아니라고 했고 ”
“ 맞는 말이야. 계약은 아한카라 안의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흥정하는 거야. 그냥 놀이로 말야. 놀이기에 바꾼 걸 무거이 다루지는 않지. 때문에 더디게 나아가. 오히려 뒤로 돌아갈 때가 많지. 에너지계의 지성들에겐 모든 걸 다 가진 이들의 오만으로 보이겠지 ”
“ 음계는 느리게 나아지겠구나 ”
“ 응. 걱정 마. 저 군세는 모두 이스비니야. 스스로의 모든 만트라를 단숨에 일으킨 것 뿐이지. 이번 한 판에 모든 걸 걸어버린 거야. 그렇다고 감동할 건 없어. 지더라도 이스비니가 잃을 건 너희 지구인의 범주에서는 아무 것도 없지 ”
디도가 대군세를 향해 돌진한다. 이스비니와 아까 싸울 때 쓰던 총을 다시 들고 마구 쏘아대며 날개를 세차게 친다.
누가 그랬던가. 우리는 [나]가 아니라 [내 것]을 가지고만 고민을 해댄다고. [내 것]을 잃는다고 [나]가 포기되는 것은 정녕 아닌데 밤잠을 설쳐대며 열을 받는다고. 사랑, 가정, 재산, 권력 따위는 모두 [내 것]이지 [나]가 아니기에 집착할 것이 없다고.
그 말은 옳다. 에너지계가 아닌 음계에서. [나]는 지바이고, [내 것]은 지바를 뺀 아한카라인 곳에서만. 그는 누리를 잘못 짚었다.
카오스나 프렉탈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주는 빈틈없이 이어져 있다. 적어도 사람 사는 누리는 그렇다. [내 것]을 잃는다면 [나]는 살아가기 매우 고달플 것이다. 물리 변수들은 [내 것] 뿐아니라 [나]를 이루는 것들이기도 하다. 1960년대 유럽을 휩쓴 구조주의는 벌써 낡았다. 그러므로 푸코나 라캉도 구닥다리다. 사람을 만드는 게 얼개라면 얼개를 만드는 건 물리 법칙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론을 스스로의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다. 물리 법칙들은 사람이 깨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사람의 나쁜 고이(악덕)들이 사람의 조건에서 그대로 떨쳐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면, 구석기 시대의 혁명가들이 아름다운 누리를 이 땅 위에 펼쳐냈을 것이다. 혁명가들의 광기, 열정, 슬픔, 애씀을 생각하면 그건 될 수 있었던 일이다. 그들이 실패한 까닭은, 사람의 나쁨들이, 착함들과 마찬가지로, 서슬 푸르고 장엄한 물리 법칙들에 메달려 대우주의 고갱이에 살이를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만이나 노장이나 소승 따위는 집어치워라. 대승이나 과학주의조차도 버리라.
에너지는 복잡한 회색. 모든 색깔이 뒤엉켜 이루어낸 회색이다.
사랑은 주관의 곡두에 갇힌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선이란 것이 그랬듯이. 박애를 책 속의 곡두라 비웃는 권력도 이기적 유전자의 꼭두각시이다. 가치 판가름이란, 여러 주관의 곡두가 쌓여 만드는 문명이 중립의 객관을 상대로 벌이는 야바위 놀음이다. 물론 주관의 곡두도 살이이지만. 이 틀에서 모든 가치와 뭇 살이는 무시무시한 곡두의 평등 속에 벌려 서고, 에너지주의를 통하여 모든 것은 섬뜩한 힘의 불균형 안에 갈무리된다.
모든 건 한 덩어리다. 사람이 깨닫지 못하든 말든. 초 끈 이론이 말하는 바도 그러하다.
사람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해 갈 수는 있겠지만, 에너지라는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또 보다 높은 곳은 모두 너무나 작은 확률만을 지니고 있다.
그게 다니까 그는 만족한다. 그리고 지금 그걸 절실하게 여기고 있을 필요는 없다. 동혁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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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는 땀을 흩날리며 힘차게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스비니도 물러설 꿍꿍이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는다. 이스비니는 온통 가득찬 채 넉넉하면서도 차갑게 때리고 끈덕지면서도 어딘지 빈틈이 있어 보이도록 막아내며 되때림을 노린다. 드센 걸음. 빠른 움직임. 스스로 서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틀이 잡힌 큰 병력의 긴 줄.
끝없이 펼쳐낸 만트라를 한 손처럼 넉넉잡게도 가이없이 많은 손처럼 힘있게도 움직이는 이스비니도 놀랍지만 그걸 쉽사리 막아내며 한 발자욱도 내주지 않는 디떼도 대단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 하나가 동혁에게 덮쳐든다. 온 몸에 가시가 돋친, 리플리랑 싸우는 에일리언을 닮은 것 같은 짐승. 저건 버그다. 아니 저그다. 울부짖을 때마다 온갖 벌레들이 끈끈한 물에 싸인 채 튀어나와 딱딱거린다.
겁에 질려 움직일 수가 없다. 동혁이 외친다.
“ 디도! ”
하늘에서 커다란 다리가 내려와 발뒤꿈치로 괴물을 뭉게버린다. 하늘에서 해처럼 디도의 음핵이 빛난다. 온갖 곳에 있는 디떼 스타. 모든 곳에 스며 들어 이스비니와 겨룬다.
높이도 너비도 없이 쌓인 주검의 산과 한때 모든 걸 안에 갖고 있던 한처음의 물 만큼 많은 피의 바다가 한데 엉켜 돌아다닌다.
그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디도와 이스비니가 벌이는 참상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다.
저건 만트라일 뿐이다. 아한카라의 한갓 놀음이다. 이렇게 느껴지지만 그런 것 뿐이다. 사람이란 느끼는 이이다. 느끼는 게 사람에겐 참됨이다. 모든 걸 밖과 안으로 가르는 주관의 곡두기이에.
내장과 터져 버린 살집을 드러낸 디도의 주검이 피떡이 되어 그 앞에 날아든다. 만트라거나 아비디야일 것이다. 그 옆에 곧바로 와 쌓이는 토막 난 괴물.
“ 그만! ”
동혁은 눈을 감아버린다. 온 몸을 갈겨대는 폭음. 코를 뻥 뚫고 파고들어오는 피비린내.
모든 게 잠잠해진다.
그가 눈을 뜬다. 수루치가 그의 얼굴을 핥고 있다.
“ 이곳은 디도 님 안이에요. 마음 놓아요. 이마가 뜨거워요 ”
수루치가 동혁의 이마에 입술을 살며시 댄다. 그가 묻는다.
“ 넌 아픔을 아니? 아픔이란 건 외부 충격에 대한 반응이지. 객관으로는 말야. 난 너에게 마음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야. 물질의 별난 생김새인 마음. 주관의 곡두인 그것. 그게 있다면 아주 조금은 서로 이해할 수 있겠지 ”
“ 있어요 ”
“ 정말? 니가 날 속이는 거라도 좋아. 나를 짓밟기 위해 돌아가는 상황일지라도. 이런 식의 생각은 음계 아닌 지구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공상이니까. 너에게 있다면 디도는? ”
“ 있어요. 낭군 님과 똑같은 짜임새의 마음은 아니지만, 동혁 님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겠지만, 있어요. 열이 좀 내리나요? ”
낭군이라. 듣기 나쁜 말은 아니다.
마음이 있지만 그와는 많이 다르리라. 부끄러움도 없고 거의 아픔을 못 느낀다. 아픔의 가지도 많이 다르다. 짝짓기할 때 소리를 지르기는 하지만 그야 알 수 없는 일이다. 흥미거리도 같은 데가 거의 없다. 동혁이 짐작한 바로는 그랬다. 그거야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동물과도, 다른 사람과도 그런 거야 다소 다르지 않는가.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건 점에 지나지 않고 홀로의 만족만이 있지만, 덩어리진 대우주의 엄정하고 아름다운 절대 진리가 있기에 사랑이나 윤리 같은 것을 위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가 말한다.
“ 니가 좋아. 난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도 주인공 보다는 조연에게 더 마음이 끌리곤 했었어 ”
작고 애처롭게 떠는 수루치가 동혁을 안아준다. 가볍고 따뜻한 몸이 그를 포근히 감싼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끝없이. 하지만 잠은 깃들지 않는다, 음계에 있는 한. 그가 한 번 더 그 점을 저주한다.
그녀가 속삭인다.
“ 지금쯤 싸움은 끝났을 거예요. 전 지금보다 세어질 수는 없지만, 같은 마르가의 아한카라들과 더불어 파라브라자를 적잖게 모아 올 수는 있었지요. 디도 님은 꽤나 많이 세어지셨을 거예요 ”
디도가 나타난다.
“ 양반은 못 되겠군 ”
“ 훗. 그런가. 되고 싶지도 않지만. 우리가 이겼어! ”
그가 말한다.
“ 알고 있었어. 너에게 마음이 있다며. 그러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아한카라들이 음계에 많아? ”
“ 거의 없지. 아픔을 느끼는 이로 따진다면, 아한카라 뿐아니라 아비디야들 가운데서도 꽤 있어. 난 큐티에호비호렙한테 얻어맞았을 때 꽤 아팠었다구. 걱정 마. 내 몸 안에 아픔을 느끼는 아비디야 따위는 안 키워. 아, 수루치. 넌 이제부터 팅킨 마르가의 라자(Raja)야. 마르가에 라자라는 시스템이 덧포게어진 거라구. 그에 걸맞는 계약은 니가 스스로 맺으면 될꺼야. 이번엔 내가 뒤에서 밀어줄께 ”
“ 고맙습니다 ”
라자스라는 말이 있다. 번영기. 타파스, 곧 수행으로 힘을 얻은 누리는 라자스로 들어간다. 가진 이들의 날. 그 다음은 타마스. 어둠으로 덮이는 가라앉는 때. 죽음에 이르는 큰 길. 최대 가능 엔트로피로 향하는 아득한 어둠. 그는 라자라는 말로부터 두려움을 느낀다. 한창 때 두려워할 줄 알아야한다.
동혁은 그 말을 빼먹지 않는다.
디도가 말한다.
“ 라자스 따위는 잊자구. 다를 수도 있잖아. 걱정 마. 조심은 할 거니까 말야. 이스비니의 제국이 내 것이 되는 바람에 난 이스비니랑 처음 싸울 때보다도 8.0385 곱하기 931구골 플랙스 제곱 17구골 제곱 5무량대수만큼 세어졌어 ”
“ 나 넘어진다, 잡아 줘! 거품 물고 쓰러지겠다. 그 년의 곱셈 좀 그만 할 수 없냐 ”
“ 메롱. 난 할 거당 ”
“ 그래. 마음대로 놀아라. 그 곱셈 제대로긴 한 거야? ”
“ 고럼. 사실은 숫자가 더 정밀한데, 너한테 말해줄 수가 없어서 간추리고 있어. 소수점 아래로 끝없이 나가거든 ”
“ 알았다. 믿지 뭐 ”
동혁이 디도를 본다. 디도에겐 마음이 있다고 수루치는 말했다. 에너지의 한 꼴인 마음이 파라브라자에도 있다는 말.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디도도 자연 과학으로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사람에 관한 것에만 슬기를 던질 수 있으며, 형이상학은 모름의 산물이다. 하지만 형이하학인 자연 과학은 모든 것을 두루 밝히는 철학이다.
“ 자연 과학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때? ”
“ 자연 과학? 그걸 들여온다면 나쁠 건 없겠지. 근데 너 자연 과학을 얼만큼이나 아냐? 그래야 우리한테 방법론이라도 가르칠 수 있을 거 아냐 ”
동혁이 잠깐 말을 하지 않는다.
“ 대중 자연 과학책 몇십여권 읽었지. 한참 모자라는구나. 좀더 많이 읽어둘껄 ”
디도가 손벽을 치더니 말한다.
“ 동혁아, 동혁아, 사랑하는 동혁아. 니가 재미있어할만한 애들이 있어서 끌고 왔어. 다들 이스비니한테 에너지를 조금씩 바치던 아한카라들이야. 다들 옛날의 큐비 보다 5.1354 곱하기 10의 500자 제곱 2470 구골 플랙스 배 가까이나 더 센 애들이야. 이스비니 다음 가는 벼슬에 있던 애들이지. 물론 이스비니와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파라브라자는 내가 빼앗았지. 지금은 지바 안에 갇힐까 말까 밖에 파라브라자가 없어. 그런다고 내게 메달릴 필요는 없지만, 계약으로 묶었지 ”
지금은 머슴이나 계집종들이라 이거군. 그는 억눌리고 짓밟히는 이의 슬픔을 짐작할 줄 안다. 윤리는 남의 불행을 느끼고 그를 돕는 것이다. 지금 그들의 느낌은 어떨까. 알 수 없다. 아픔도 불행도 느낄 수 없는 이들일 가능성이 더 크다. 큐티에호비호렙 사마엘처럼 말이지. 음계의 대다수가 그런 식이라고 들은 바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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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이 그들 셋에게 다가간다.
한 음계의 딸은 톨킨의 엘프 같았다. 크고 훤칠한 키. 길고 금발인 머리카락. 빵빵한 몸매를 받치고 있는 가는 허리. 하늘의 소리를 귀걸이 없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이 뽀족하고 큰 귀. 서글서글한 푸른 눈은 매력이 넘친다.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톨킨의 그것이 지닌 높은 철학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훗날 사람이 생체 공학으로 만들어낼지도 모르는 기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꿈을 잃어 버리고 팬시 상품으로 떨어진 것 같아 보여 씁쓸하다.
그가 말한다.
“ 이스비니도 가지고 놀 수 있어? ”
“ 물론. 데려다줄까? ”
“ 아니. 일단 니가 준 선물들이나 훑어보고 ”
다른 하나는 힌두의 여신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소녀의 몸엔 몇 가지 붙임꼴이 있다. 네 개의 팔. 짧은 보라빛 머리카락에 덮인 뒷머리에서 뻗어나온 염소뿔 하나. 어께 아래에도, 가슴 바로 위에도, 가슴 밑에도, 배꼽 옆에도, 허리에도, 허벅다리에도 주먹만하게 솟아오른 또다른 젖들. 아까 본 욕망의 피사체와 비슷한 느낌이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빛들을 지나친다.
동혁이 눈살을 찌뿌린다.
“ 이런 애를 내가 좋아한다고? ”
“ 넌 별나게 생긴 걸 좋아하잖아 ”
진짜 못생겼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초라하지는 않았고 젊긴 했지만. 먼저 기다랗고 뚱뚱한 얼굴을 보자.
이리저리 비뚤거리는 눈코입귀. 작고 뀅한 눈, 큰 들창코에 나있는 콧구멍은 무척 크고, 엄청나게 두꺼운 입술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길게 찟어져 있다. 주근깨가 아주 많다. 눈썹은 맞붙어 있다. 검은 솜털이 가득하다. 인중은 군데군데 시꺼멓다. 콧구멍엔 털이 삐죽이 나와 있다. 떡 진 머리엔 비듬이 수북이 앉아 있다.
뭔가에 짓눌린 듯한 얼굴을 지난 아래는 더 볼만하다.
붉은 버짐이 온 몸에 퍼져 있다. 날씬한 가슴에 빵빵한 허리. 짝짝이인 작은 가슴 아래론 똥배만 불룩하다. 기형으로 보일만치 넓은 어께 아래론 살찐 팔이 달려 있다. 늘어진 엉덩이는 짝짝이다. 엄청나게 굵은 다리 사이에 있는 음부는 잔뜩 메말라있다. 똥똥하고 작달만한 몸뚱아리다. 진짜 진짜 느끼하다.
동혁이 한 번 훑어보다가 말한다.
“ 사람이었다면 많은 아픔과 슬픔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야겠지. 하지만 음계의 딸이니까 ”
그가 다가서다가 멈짓한다. 그가 아무리 그들을 괴롭혀도 아픔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슬픔을 줄 수는 있다.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다치게 하기는 싫다.
“ 저들에게 마음이 있어? 이 경우에는 슬픔마저 느낄 수 있는 그런 고등한 마음말이야 ”
수루치가 말한다.
“ 있어요 ”
“ 정말? ”
“ 조금은 아파하는 것 같아요 ”
“ 그렇다면 일단 마음을 다독거려주고 즐겨야겠어. 뭐가 슬픈 거지? ”
디도가 말한다.
“ 나라 잃은 슬픔 따위는 아니야. 주체성을 잃었다는 데서 오는 것도 물론 아냐. 넌 아마 그런 것들을 예상하고 있었을테지. 너와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알 수 있어 ”
“ 바로 맞혔군. 그럼 뭐야? ”
“ 그들은 놀라고 있어. 내가 파라브라자를 앗아갔기 때문에. 정체성을 잃을까 봐 시름하고 있는 거야. 그것 뿐이야 ”
“ 그럼 내버려두겠어. 나랑 비슷하게 슬퍼하는 이도 찾으면 있을 지도 모르겠네 ”
“ 그럴 지도 몰라. 나도 조금은 너랑 비스무레하니까 ”
“ 아비디야 가운데서도 ”
“ 만약 그들이 그렇다면, 더 슬플 거야. 그들도 파라브라자와 에너지로 되어 있지만 지바가 없으니. 그들은 스스로를 만든 아한카라에게 메달려 있어. 아한카라가 없에려하면 없어질 밖에 없거든 ”
그가 포로 셋에게 묻는다.
“ 사실이야? ”
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동혁이 말한다.
“ 팔 넷 달린 음계의 딸. 넌 이름이 뭐지? ”
“ 브라자미 ”
“ 엘프 같이 생긴 넌? ”
“ 이리시 ”
“ 마지막 넌? ”
“ 세르기 ”
동혁이 디도를 돌아보며 말한다.
“ 마음을 지닌 이들을 모두 모아서 음계에 영역을 만들자. 아마 잡탕 소굴이 되겠지. 온갖 선악이 저질러지는. 아니지. 음계에선 굳이 싸울 필요는 없으니까 그쪽으로 나아가지는 않겠지. 틀려? ”
“ 아니. 계약만 잘 만들면 돼. 그리고 난 계약 만드는 데에 지나치도록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먼저 파라브라자가 아주 빠르게 늘거든. 남들 걸 빼앗으니까 ”
“ 그건 남들은 못 하게 해야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 에너지계에게선 악행이지만, 음계에선 별로 나쁜 짓 같지 않군.”
"마음을 지닌 이들의 땅을 도란돔이라고 하자. 그리고 수루치, 디도, 내가 함께 다스려보자 “
수루치가 동혁을 껴안으며 말한다.
“ 좋죠~~ ”
디도가 말한다.
“ 바빠지겠는걸! ”
그렇게 도란돔은 세워졌다. 처음엔 아주 작았다. 그때까지 디떼 스타가 정복한 아한카라와 아비디야 가운데 마음을 지닌 이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적다곤 하지만, 동혁이 온 볼 수 있는 우주에 있는 모든 쿼크와 렙톤을 더한 것보단 많았다. 적은 게 맞긴 맞는 건가? 보는 누의 다름이지 뭐.
동혁이나 디도나 수루치도 도란돔의 백성이 되었다. 디도가 마음을 지닌 이를 들여놓음에 따라 도란돔은 끊임없이 커질 터였다.
팅킨 마르가들은 뜻밖에 수루치를 아주 잘 따랐다. 그게 팅킨 마르가의 속성 가운데 한 조각인 듯싶다. 그래서 수루치는 팅킨 마르가에 대해 음계치고는 꽤 높은 구속력을 낼 수 있었다. 수루치는 마르가의 힘을 통해 대단한 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디도에 비하면 택도 없지만.
디도 카젤은 말한다.
“ 도란돔은 마하 지바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야. 하지만 이것이 미친 영향은 그보단 커. 이스비니를 쓰러뜨리고 도란돔을 세운 바람에 마하 지바는 비로소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어. 아주 조금이지만 말이야. 드디어 니가 말한 게 물 위에 드러나고 있는 거라구 ”
“ 이거 잔치라도 벌어야겠는 걸 ”
“ 좋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