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휴학하다. (2)
“그럼 여기선 아빠하고 친한 척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정도는 관계없지. 아빠라고 그대로 불러도 되고.”
“그럼 됐네! 뭐. 그래도 이따금 사랑은 해줄 거지?”
“그래, 인마. 그런데 효주 넌 정말 괜찮아?”
“응, 아빠 미안해.”
“아니라니까. 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해할 일이 뭐가 있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는 그놈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네 생각을 물어보기 위해서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런 개XX들을 그냥 놔두라고?”
효주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니, 다시 분함이 치밀어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일수록 우선 냉정함을찾아야 했기에,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하나 꺼내 효주에게 건넸다.
솔직히 가장 속 편하게 이번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은, 그놈들은 강제추행 및 강간 미수 죄목으로 고소하고 법의 처분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고소사건을 진행하면서, 효주가 받게 될 2차 피해다.
아무리 강간 또는 강제추행 사건과 관련하여 제도와 법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사건 피해자가 받는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강간 또는 강제추행을 당했던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욕스럽고 자괴감이 들 터인데, 그것을 제삼자인 경찰관과 검찰 수사관 앞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법정에서 일반 방청객이 참관하는 가운데서, 그 사실을 진술해야 하는 경우까지 있는 것이다.
물론 효주의 경우 강간을 당하진 않았지만 수치스러운 감정은 어쩔 수 없을 것이기에, 나는 효주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사건처리를 도와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내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또 그것이 억울하다고 울부짖어도, 대부분 세상 사람은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 당할 만한 행동을 했으니 그런 꼴을 당하지.’라면서 비아냥거리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 속마음이니 말이다.
그랬기에 나도 어젯밤은 그놈들을 패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서 잠조차 제대로 이루기가 힘들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만, 그렇게 분노를 표출한답시고 밀어붙이고 난 이후 뒤에 오게 될 파장을 생각하니 자연 망설여지는 것이다.
“괜찮아. 그 자식들 단 몇 달이라도 감옥에보내서 호적에 빨간 줄을 긋고 말 거야.”
“버틸 수 있겠어?”
“아빠 말대로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왜 죄를 지은 것처럼 스스로 위축되어 살아야 해?”
“알았어. 그럼 우선 변호사부터 알아볼게.”
“미안해. 아빠.”
“인마, 아니라니까?”
“아냐, 솔직히 나도 속으로 음탕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 아니었어. 그 새끼들 방법이 더러웠던 거지.”
“됐다.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하자.”
나로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효주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효주가 내가 듣기가 거북한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지금 상황에서 속 좁게 화를 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효주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처지도 아니었다.
내가 효주의 남자친구도 그렇다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도 아닌 이상, 효주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든 아니면 그 훨씬 이상으로 몸을 함부로 굴리든지 간에, 그런 일에 관해 내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변호사를 선임하는 일이야 그다지 어려울 일이 없었다.
부동산중개업을 하다가 보면 이리저리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중에서 변호사 직업을 가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알고 지내는 변호사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고, 그런 사건을 잘 처리하는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너희는 우선 저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어.”
“왜?”
“일단 믿고 사건을 맡길 만한 사람인지 그것부터 확인해 봐야지.”
소개받은 변호사를 선임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피해자인 효주의 얼굴을 드러낼 이유는 없었기에, 우선 나는 지혜에게 효주를 데리고 커피숍에 가서 내 연락을 기다리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소개받은 변호사는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점이 이름에서의 뉘앙스와는 달리 여자 변호사였다는 점이다.
강 변호사는 어젯밤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사건을 냉철하게 판단해야 할 변호사답지 않게 분노하고 있었다.
솔직히 효주가 정식으로 피해 사실에 대해 고소하고, 그놈들에게 그에 상당하는 처벌을 내리긴 원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물론 예전 같으면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설 수 없었겠지만, 원룸을 매입하고 아직 남은 10억이 조금 넘는 돈이 내게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에서는, 돈이라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울 수 있다는 판에 버젓이 증거까지 있는 사건이니, 그놈들에게 세상 뜨거운 맛을 톡톡히 경험하게 할 생각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강 변호사는 내게 잠시 밖에서 기다려줄 것을 이야기하고, 효주와 지혜를 데리고 유리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상담실로 향했다.
나는 여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강 변호사와 효주 그리고 지혜 세 사람의 이야기는 제법 오랜 시간 진행되었다.
“저에게 사건을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일단 둘을 다시 먼저 내려가서 커피숍에서 기다리게 하고 강 변호사님과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는데, 소개를 받아서인지 사건수임료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었다.
“변호사님.”
“예. 선생님.”
“사건 수임료가 지나치게 낮지 않습니까?”
“사건이 다른 사건도 아닌 강제추행 및 강간미수 사건이지 않습니까. 대부분 나이가 어린 친구들이 사건을 맡기러 오기에 이런 사건에 한해서는 수임료를 제 나름대로 낮춰서 책정한 것입니다.”
“저한테까지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 학생이 편모에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고 또 폭행을 당한 학생은 고아 출신이어서, 선생님께서 후견인 역할을 하시면서 돌봐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께 바가지를 씌워서는 안 되지요.”
물론 강 변호사가 하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강 변호사가 어떤 생각인지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생각으로 그런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는 사건과 딱히 돈은 되지 않으면서 귀찮은 일거리만 많은 사건을 대하는 마음 자체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그랬기에 강 변호사의 진정성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의 본성 때문에라도 제값을 치르는 것이, 효주에게도 또 혹시나 강 변호사와의 인연이 지속되더라도 제값을 치르는 것이 옳았다.
“이건 뭡니까?”
“아까 김상기 변호사님께 이런 사건의 경우 수임료가 대충 얼마쯤 되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넣어두시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사건처리에 최선을 다해주세요.”
“굳이 이렇게까지 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변호사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하시는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저도 먹고살 만하니까 이러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애들이 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던가요?”
“아니요. 저기 저 안에 있는 우리 사무장님이 선생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데요?”
“예?”
이 변호사사무실의 사무장이 나를 알고 있다는 소리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강 변호사는 직원을 하나 부르더니 사무장에게 잠시 밖으로 나오라고 이야기했고, 잠시 후 연락을 받고 바깥으로 나오는 사무장의 얼굴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희 씨, 여기서 일하세요?”
“제가 입주할 때 변호사사무실에서 근무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가 굳이 입주민의 신상까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깜빡하고 있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나처럼 사건을 의뢰하러 변호사사무실을 찾게 되면, 대부분 사무장과 상담을 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변호사와 직접 면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오늘은 소개를 받아 찾아간 덕분에, 바로 변호사님을 만나서 상담했던 것뿐이었고.
아무튼 충분하다느니 아니라느니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는 봉투를 집어 던지듯 하고서 변호사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이제 이번 사건은 강 변호사님께 맡겨두고, 강 변호사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끝을 보게 될 것이다.
“오래 기다렸지.”
“아뇨. 괜찮아요.”
나는 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해서 둘을 태우고, 다시 원룸으로 돌아와서 1층에 있는 내 사무실로 향했다.
“너희 둘 학교를 한 해만 휴학하는 것이 어떻겠니?”
“왜요?”
“아무리 너희 잘못이 없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남 말하기 좋아한다는 것이야 너희도 알잖아. 소송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소문은 나기 마련이니까 1년 정도는 휴학했으면 싶다.”
그놈들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먼저 석방되거나 그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놈들에게 면회를 가는 친구가 있다면 학교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간이다.
그런데 소문이라는 것도 당사자가 눈에 보이면 수군거리는 법이지만, 당사자가 아예 보이지 않으면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이 금방 잦아드는 법이었기에 둘에게 휴학을 권하는 것이다.
“등록금 아깝잖아요.”
“등록금 몇 푼 때문에 사람들 눈치 보면서 다닐래?”
“하지만......”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단지 등록금 때문이라면, 아빤 너희가 1년 정도는 휴학해서 쉬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이 둘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휴학함으로써 날려버리게 되는 등록금이야 얼마든지 대신 내줄 수가 있고, 또 먹고 자는 문제는 이곳에서 지내게 하면 될 일이니 딱히 부담될 이유도 없었다.
둘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아빠 사무실서 알바 할까요?”
“인마, 복덕방에 무슨 알바가 필요해. 그냥 너희가 하고 싶은 것이나 마음껏 해.”
“그럼 2층 식당에서는 알바 안 뽑아요?”
“식당 청소하고 그릇 씻고 하는 일을 할 수 있겠어?”
“당연하죠. 원룸 복도하고 계단 청소도 할게요.”
“알았다. 그럼 그렇게 하든지.”
“시급이 얼만지는 아시죠?”
“알아, 인마.”
어차피 식당에서 매일 파출부를 불러서 사람을 쓰고 있었고, 이따금은 펑크를 내는 통에 아예 정식으로 채용하려고 하고 있었기에, 식당일을 거든다고 하면 주방에서도 좋아할 것이었다.
그리고 일이 어설퍼서 제대로 하지 못해서 시원찮다는 반응이 나오면, 내 사무실 옆에 있는 비어있는 점포에 여자애들이 좋아할 만한 업종으로 가게를 차려줘도 괜찮을 것이다.
아르바이트로 식당을 하게 되자, 둘은 뭐가 좋은지 서로 손을 마주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정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