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복수? (7)
통장을 건네받으면서 자경이 이야기한 것처럼, 틈날 때마다 몇백씩 찾아서 현금화해서 꼬불쳐 둔 돈이 2억이 조금 넘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경이가 선견지명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2~3억 가지고’라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한꺼번에 현금으로 억 단위의 돈을 인출하게 되면, 분명 어디엔가 주목하는 곳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돈이 인출된 후에 그에 상응하는 용처가 나타나지 않으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건 뭡니까?”
“두 개 들었다. 우선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이 이것뿐이니 챙겨두고, 나머지는 네가 나온 후에 챙겨줄게.”
“에이~ 이 정도까지 필요 없다니까요. 그냥 실력 있는 변호사나 하나 붙여달라니까요.”
“변호사야 당연히 찾아야지. 그렇지만 이건 나를 대신해서 고생하는 대가이니 받아서 챙겨 둬.”
아침 일찍 종수를 만나 2억이 들어 있는 돈 가방을 전했고, 종수는 부담스러운 표정이지만 돈 가방을 받았다.
물론 종수가 이 돈 가방을 들고 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를 믿지 못하고서는, 종수가 경찰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모두 자기가 돈을 벌기 위해서 혼자 저지른 범죄라면서, 혼자 끝까지 독박을 쓸 것이란 사실 또한 완전히 믿기가 힘든 법이다.
“형님.”
“응?”
“형님은 지금 이 순간부터, 이번 일을 전부 머리에서 지우세요.”
“그건 무슨 뜻이야?”
“변호사는 이 돈으로 제가 알아보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형님이 이 일에 개입했다는 흔적이 남아봐야 결코 형님에게 유리할 일이 없거든요. 나중에 제가 학교 갔다가 나오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종수 표정이 결연했다.
어쩌면 종수가 체포될 때까지 걸릴 빠르면 1, 2주 길면 1, 2개월이란 시간을 이용해서 그사이에 도주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로서는 어쩔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중 뉴스에서 종수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확인하고 또 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까지 보게 되면, 그때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일이 끝이 나면 꼭 나한테 다시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악수를 하고 종수와 헤어졌다.
“아빠, 요즘 왜 그렇게 바빠?”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럼 이제 바쁜 일은 끝이 난 거야?”
“대충은. 그런데 가게는 제법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더라?”
“아직 개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일단 몇 달은 더 지켜봐야지.”
종수를 만나고 와서 ‘혜, 주, 민’에 얼굴을 내밀었더니, 지혜를 비롯한 가게 문을 열 준비하고 있던 세 놈이 반가운 표정으로 난리를 친다.
내 눈으로 매출을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사무실 직원들의 말로는 손님이 끊이지 않고 제법 든다고 하니, 마카롱 가게 개업은 나름 성공적인 결과가 될 것 같았다.
“지금 어디야?”
“어디긴 어디겠어. 사무실이지.”
그동안 비웠던 탓에 김 부장으로부터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 내 방책상 앞에 앉으니 박 소장에게 전화가 와서 지금 사무실로 오겠다고 했다.
“아~우~ 시발!”
“지랄한다. 남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욕부터 하고 난리야?”
“민강수 그 개 같은 새끼 때문에 내가 죽을 맛이니 그러지.”
“동영상?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병신 같은 새끼가, 그 모텔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제 운전기사하고 나 둘 뿐이라고 했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사람이 나하고 운전기사 둘 중의 하나라고 의심한 거지.”
“그래서 의심은 완전히 벗었고?”
“몰라. 일단 48시간인가 그 규정 때문에 나가라고 하긴 하던데.......”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박 소장이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내게 이야기할 이유도 없는데?’하는 생각과 함께 박 소장의 점퍼 주머니가 약간 아래로 처진 느낌이 든 것이다.
분명 휴대전화는 손에 들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당신 그 영상 보긴 봤어? 정말 거기에 민강수 의원인가 하는 그 사람이 나와?”
“나오니까 이 지랄이지. 당신은 못 본 거야?”
“그런 야동에는 바이러스가 많이 깔려 있다면서? 괜히 그거 본다고 설치다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어떻게 해. 쪽팔려서 수리도 못 맡기고.”
“지랄! 대한민국에 야동 안 보는 사람이 어디 있을 거라고.”
“아무튼 재미있어? 여자는 연예인이라고 하는 말만 있던데, 연예인 중에서 누군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박 소장의 태도에서 무언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기에, 나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보통의 사내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을 연출했다.
“연예인은 무슨 연예인. 그 새끼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인지, 그 새끼 얼굴은 그대로 드러나게 하고는 여자는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를 아예 뿌옇게 뭉개놨던데.”
“그렇다면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야? 그 양반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려고?”
“그 새끼가 정치적이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어. 그냥 이 동네 구의원이나 하면 딱 좋을 수준인데. 그 새끼가 어디 뉴스에라도 한번 나오는 것 봤어.”
“그럼 범인이 도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모르니까 내가 이틀 동안이나 경찰서에 잡혀 있었지.”
“경찰서에? 당신이 경찰서에 잡혀갈 일이 뭐가 있다고?”
“그 새끼 때문이라니까. 그 새끼 바람피우는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하고 운전기사밖에 없다고 진술했고, 그러면서 내가 범인일 것이라고 약을 푸는 바람에....... 내가 그동안 밑구멍 닦아준 게 어딘데.”
박 소장의 이야기를듣다가 보니, 민강수라는 국회의원 놈이 그런 짓거리를 할 수 있게, 박 소장 또한 거들었던 공범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마치 박정희 정권 시절, 박정희의 변태에 가까운 성욕을 채워주기 위해 채홍사 역할을자처했던 누구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영진 의원은 만나봤어?”
“이영진 의원이라니?”
“지난번에 광안리서 만났던 그 양반 남편 말이야.”
“내가 그 여자 남편을 뭐하려고 만나?”
“사모....... 그러니까 양 여사가, 자기 남편을 한번 만나보라고 얘기하지 않았어?”
“지랄. 내가 정치하는 사람들 알아놔서 뭐에 쓸 거라고. 그런 사람 알고 있어 봐야 돈 나갈 일밖에 더 생겨.”
“지난번에 내가 이야기했잖아. 그 사람 구청장에 당선되면할 것 많다고.”
“됐네. 난 그냥 가늘고 길게 살 생각이니까, 자꾸 그런 쪽에 끌어들일 생각 하지 마.”
“양 여사 성격이면 진작 연락을 했을 텐데........”
“며칠 전에 내가 산청 가 있는데 연락을 하긴 했더라. 그런데 내가 굳이 만날 이유도 없고 해서.......”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가 나중에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냥 연락은 받았지만 내가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박 소장이 하는 말들은, 나에 대해서 간을 보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갈수록 열이 뻗치네.”
“아침부터 남의 사무실에 와서 자꾸 왜 이래.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라고 했다. 적당히 해.”
“열 받으니 그렇지. 좋다고 지랄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나를 의심하고, 경찰서 신세까지 지게 만들어?”
“내가 예전에 이야기했었잖아. 정치하는 사람들하고 어울려봐야 좋은 꼴 보지 못한다고. 그냥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고 사는 것이 최고다.”
“도대체 당신은 욕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삶의 의지가 없는 것인지.......”
“아무튼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제 당신 사무실로 가라. 나도 일 좀 하자.”
“친구가 고생하고 왔는데 고생했다는 말은 해주지 못할망정 쫓아내려고 그래?”
목구멍에서 ‘친구는 개뿔’이란 소리가 튀어나오려고 했다.
세상에 어떤 친구가, 친구란 놈을 엮어 넣기 위해서 녹음까지 하고 있다는 말인가?
녹음하려면 들키지 않게 제대로 하든지, 윗도리가 얇고 색이 연한 탓에 녹음 중이라는 빨간 불빛이 연신 내 눈앞에서 반짝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솔직히 같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는 것조차 짜증이 일었기에,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박 소장을 쫓아 보냈다.
그리고 조금 전 박 소장과의 이야기에서,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한 것이 없는가 하고 돌이켜 봤지만, 딱히 그런 것은 없겠다 싶었다.
‘보자! 거기서.’
뜬금없는 문자가 왔다.
그리고 또 내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기에, 나는 사무실을 나와 진영휴게소로 향했다.
“휴대폰 하나 새로 개통해.”
“응?”
“지금 가지고 있는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새로 개통하라고.”
“왜?”
“사람 일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당분간 나하고 통화할 때는 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진영휴게소에 도착하니 강준이가 먼저 도착해 있었고, 우린 휴게소 출구 쪽 주차장에 주차한 후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종수가 와서 돈 맡겨두고 갔다.”
“응?”
“네가 준 것이라면서, 출소할 때까지 맡아달라고 하면서.”
“그랬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지는알아?”
“.......”
“그놈 확실히 믿어도 된다는 뜻이야. 그 돈을 나한테 맡겨둔 것은 나를 믿는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만약 제가 배신을 하게 되면 그 돈도 날아간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결국 강준이가 날 여기로 오게 한 이유는, 혹시 종수가 딴마음을 먹지나 않을까 불안해할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불렀던 것이다.
아니면 정말 종수가 체포된 후에 재판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혹시나’하는 걱정에 계속 불안해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데 안심해도 된다면서 휴대폰은 왜 바꾸라고 해?”
“생각을 해봐라. 답이 간단하게 나오지.”
“무슨 답이 나온다고?”
“종수가 잡히면 종수 주변 사람하고 또 근래 종수가 접촉하거나 연락한 사람에 대해서 당연히 조사에 들어갈 거 아냐. 그럼 우선 내 뒷조사도 할 테고, 또 재수 없으면 너한테까지 따라붙을 수도 있어. 지난번에 네가 우리 농장에 왔을 때, 네 차가 도로에 있는 CC-TV 카메라에 찍혔을 것이 100%니까.”
“범인이라고 자백한상태에서, 설마 CC-TV 카메라까지 털려고?”
“경찰이나 검찰 수사관 중에서 별종이 꼭 한둘은 있는 법이거든. 그러니 만사 불여튼튼이라고, 귀찮더라도 그렇게 해. 뭐 서두르는 척하고차 앞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앞바퀴로 밀고 나서 씩씩거리는 척하는 것이 최고지.”
역시 사고를 쳐본 놈의 디테일은 달랐다.
나는 당장 그렇게 하려고 준비를 하다가, 준이에게 오히려 핀잔을 듣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돌아가서 저녁 퇴근 무렵에 손에 쓸데없는 서류를 잔뜩 챙긴 후에, 호주머니에 든 차 열쇠를 꺼내는 척하면서 휴대폰을 떨어트리는 척해서 휴대폰을 박살내라는 충고와 함께.......
오늘 저녁이나 내일 오전쯤에 나는 개런티도 받지 못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로 전업해야 할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