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처형이 될 뻔했던 (2)
“아직 냉면 좋아하세요?”
“냉면이야 뭐.......”
“그럼 오랜만에 냉면이나 한 그릇 하러 가시지요.”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대답을 해봐야 분위기만 어두워질 것이고, 마침 저녁 시간도 됐기에 냉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수진이 어머니는 당시 분들과 달리, 열린 사고의 소유자셨다.
어느 여름날 수진이와 만나기로 약속하고, 동네에 있는 광안 성당 마당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수진이와 함께 나오셔서 냉면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던 기억이 났다.
“먹고살 만은 한가 보네.”
“그러게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을 정도까진 됩니다.”
차를 보신 수진이 어머니께서는 흡족하단 표정이셨고, 난 뒷자리에 수진이 어머닐 타시게 하시고 운전석에 올랐다.
“김 소장님, 좀 멀리 갔다가 와도 될까요?”
“광복동까지 가시려고요?”
“어머니께서 그 집 냉면이 맛있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나서요.”
솔직히 내 입맛에는 맛이 있다는 것보다는 단맛이 강한 집이란 생각이다.
당시에는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맛집이니 뭐니 하는 말이 없을 때였는데, 그 냉면 가게의 위치가 부산의 중심 중에서도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은 사라진 미화당백화점 도로 건너편에 있어서인지 항상 북적거리는 집이었다.
그렇게 수진이 어머니를 모시고, 광복동의 냉면집 앞에 먼저 내려드린 후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긴 맛이 그대로인 것 같네요.”
“자네가 입맛에도 그렇게 느껴져?”
“예.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때 맛을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기분이 그렇습니다.”
“아마 맞을 걸세. 나야 수경이 덕분에 이따금 나와서 맛을 보고 가니까.”
아직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기 전이어서 북적이지 않아, 여유로운 가운데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냉면집에서 나와 태종대를 한 바퀴 돌기로 하고, 영도대교를 건넜다.
“여긴 어떻게 변한 게 없누.”
“그래도 옆에 건물을 증축하긴 했네요.”
영도대교를 건너서 바로 만나게 된, 영도경찰서 앞을 지나자 새삼 예전 기억이 떠오르시는 모양이었다.
나중엔 다른 경찰서로 옮기셨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수진일 사귈 당시까지는 수진이 아버지께서는 이곳 영도경찰서 교통계장을 하고 계셨었다.
청학동 쪽으로 해서 태종대를 한 바퀴 돈 후에, 75 광장 조금 지나 있는 하늘 전망대에서 잠시 바다 풍광을 구경하다가 집이 있는 연산동으로 돌아왔다.
“광안동에 있던 집을 팔고 여기에 집을 새로 지으신 거라고요?”
“예. 원래는 엄마를 여기 지내시게 하려 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 쓰인다고 2층에서 지내시게 됐어요.”
“그러시구나. 그런데 바깥 분은 무슨 일을 하세요?”
“바깥 분이라면 남편?”
“당연하죠.”
“모르셨구나. 나 아직 미스예요.”
“예? 그게 무슨.......”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가 수진일 사귀고 있을 당시에 같은 학교의 남학생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또 자매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예쁘면서도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에, 제법 인기가 많았었으니 말이다.
“뉴스에까지 나왔었는데....... 수진이 그렇게 당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나도 그 꼴을 당할 뻔했었거든요.”
“예?”
“예전에사귀던 그놈 말이에요. 그놈이 술을 처먹고 강제로덤벼드는 통에, 혀를 깨물어서 소송까지 당했었는데.”
하긴 수진이가 헤어지자고한 이후 한참 동안은 멍하니 살았었고, 그 때문에 세상일과는 아예 무관하게 살았었으니, 그런 기사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매가 똑같은 꼴을 당하게 되었던 것인지........
“그런데 진호 씨가 결혼하지 않은 건, 수진이 때문이에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냥 마땅히 눈에 들어오는 사람도 없었고, 또 굳이 결혼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요.”
처음 커피나 한잔 하고 가라는 말에 주저앉았다가, 사무실 냉장고 안에 있던 맥주가 나오고 맥주를 다 마시고 나자, 아예 찌개를 끓여서 소주 파티가 벌어졌다.
그리고 그동안 모르고 지내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로, 점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진호 씨.”
“예, 소장님.”
“에이~ 딱딱하게 소장님이 뭐야. 나도 ‘이 소장님~’ 이렇게 불러야 하나?”
“그렇다고 딱히 마땅한 호칭도 없잖습니까.”
“누나란 좋은 단어도 있잖아.”
“누나는 무슨. 겨우 몇 달 차이가 날 뿐인데.”
“몇 달 아니거든. 진호 씨는 다른 사람보다 1년 먼저 입학했잖아. 학번이야 1년 차이지만 나이는 아니거든.”
술이 몇 잔 들어가자, 김수경 소장은 마치 학창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예전 내가 수진이와 사귈 때처럼 말끝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아예 나에 대한 경계심을 확 벗어던진 느낌이다.
“그럼 진호 씨는 어떻게 해결해?”
“예? 뭘 요?”
“남자들 그거 있잖아. 혹시 돈 주고 사서 해?”
“무슨 그런 말씀을요. 소장님 취하셨어요. 이제 정리하고 올라가세요.”
“취하긴 뭘 취해. 그리고 우리 나이에 그 정도 이야기도 못 해?”
희한하게도 남자든 여자든 몸에 술이 들어가면,성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그럼 소장님은 어떻게 해결하세요?”
“어떻게 해결하긴 뭘 어떻게 해결해. 장난감이 있는데.”
“예?”
“옆방에 엄마가 있으니 2층에서도 해결할 수 없으니, 여기서 해결하지. 구경시켜 줘?”
“아뇨, 됐어요. 애인이라도 만드시죠?”
“사내놈을 어떻게 믿어.”
내가 됐다는 데도 김 소장은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자기 책상으로 가더니, 책상 서랍을 열고 종이상자를 하나 꺼내 왔다.
“봐! 얘가 내 애인이자 남편이거든.”
그러면서 김 소장은 종이상자에서 분홍색깔의딜도를 꺼냈다.
아까 소주로 주종을 바꾸면서 사무실 문을 걸었고 커튼까지 쳐둔 상태니, 우리 말고 다른 누가 볼 사람은 없었지만 김 소장의 돌변한 태도에 난감했다.
‘위~이~잉~’
“소리 죽여주지? 여기 이 스위치 누르면 앞부분이 이렇게 빙빙 돌거든. 그럼 반쯤 미쳐. 이거 때문에 방음공사까지 따로 했는데.”
뭐라고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 술에 정신이 없을 정도는 아닐 텐데, 오늘 김 소장의 태도는 앞으로 내 얼굴을 다시 보지 않을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는지 보여줘?”
“아뇨. 저 갈게요.”
“가긴 어딜 가? 아직 술이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하지만.......”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진호 씨.”
“예.”
“수진이하고 안 했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는 말이 정답이죠.”
“그럼 됐잖아. 뭐가 문제야? 요즘은 처형이나 처제하고도 하는데, 진호 씨는 수진이하고 하지도 않았으니 우리가 제부 처형할 사이도 아니잖아.”
하긴 그랬다.
법적으로 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김수경 소장과 나 사이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서로 남남 사이였다.
김 소장의 지금 태도는. 그냥 나이트클럽에서 자주 보게 되는 술에 잔뜩 취한 골뱅이라 불리는 여자라고나 할까?
자칫하다간 성인소설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아무리 김 소장과 남남 사이라고 하더라도, 한때는 결혼까지 하려고 했던 수진이 언니이니, 여기서 더 진도가 나가게 되면 정말 답이 없겠다 싶었다.
“수진인 언제 다시귀국한다고 해요?”
“설에는 오지 않겠어.”
“이혼도 했으면서 왜 귀국하지 않고요?”
“거기 벌여놓은 것이 제법 되거든. 그걸 다 정리하려면 시간도 걸리고, 또 급하게 정리하게 되면 손해도 크고.”
수진이 이야길 하자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왜? 아직 수진이에게 미련이 남아 있어?”
“흐른 세월이 얼만데요. 그냥 과거는 과거 그대로를 기억하는 것이 서로에게 아름다운 거죠.”
“진호 씨에겐 별 아름다운 과거가 아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과거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무튼 수진이에게 별 미련이 없다면 우리 이따금 만날까?”
“예?”
“어차피 이 나이에 사내놈 만나서 결혼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또 만나게 될 사내놈이 어떤 놈일지도 모르잖아.”
“그냥 커피 생각나시거든 연락하세요.”
“술은?”
“내일 술 깨시고 부끄럽단 생각 들지 않으시면요.”
내가 당분간 이 업을 접을 생각도 없으니, 싫든 좋든지 간에 김수경 소장과는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겠지만, 수진이와 그렇게 헤어진 이후에 수진이 보다 수진이 어머니께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만약 내가 그 당시에 수진일 조금 더 구속했었더라면, 아니면 헤어지자고 했을 때 강제로라도 수진일 차지한 후에 결혼을 강행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런 미련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진이가 강간을 당한 사실을 고백하고 그 이유로 내가 갈등을 느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처녀냐 아니냐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니, 어떻게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진이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는, 딸과 결혼하겠다고 그 미친 짓까지 했었는데 갑자기 딸이 다른 사내와 결혼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그때 딸 가진 엄마 마음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딸이 이혼한다는 사실을알게 된 이후에는 더욱더 심해질 것이고, 사정을 모르는 엄마로서는 딸이 이혼하게 된 이유가, 어쩌면 나와의 과거 때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나 별로 안 부끄럽거든. 그리고 지금 정신이 말짱한데 뭐가 부끄러워?”
“정말이요? 지금까지 남자 몇이나 만나보셨어요?”
“남자는 만난 적이 없다니까. 여자만 보면 발정이 나서 낑낑거리는 개XX들이 뭐가 좋다고.”
“그럼 저는요?”
“여자들에게 껄떡대지 않는다면서.”
“예?”
“진호 씨 소문난 것 몰라? 되게 비싸게 군다고.”
“원래 나 같은 놈이 뒷구멍에서 호박씨 까는 법입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고자도 아닌데, 사내가 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
“그러니까요.”
“암튼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따금 사내 품이 그리워져.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이따금 만나자.”
“부담 안 돼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성욕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보였다.
그리고 학교 다닐 때 사귀던 그 남자와 헤어진 후에 사겨본 남자가 없다는데,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놀 만큼 논 유부녀 같은 느낌이었다.
“진호 씨가 나한테 나쁘게 하진 않을 거잖아? 수진이 때문에라도.”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죠. 사내 중에서 엉뚱하게 복수심 가지는 인간도 많거든요.”
“그럼 그러든지. 어차피 내가 유부녀도 아니고, 또 결혼한 생각도 없으니까. 거기에다 내가 돈이 많은 것도아니고.”
“하....... 소장님 얼굴하고 몸매 정도라면, 얼마든지 괜찮은 파트너 구할 수 있을 텐데요.”
“섹스파트너에서 그칠 수만 있으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이야기가 쉽게 끝이 날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나로서도 손해가 날 일이 없다.
어차피 수진이와 관계도 끝이 난지 오래고, 거기에다 멀리 미국에 있으니 신경이 쓰일 일도 없고 하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할까 하는 마음에,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