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동급생 협박 썰 - 8
"아까 그 애는 뭐야?"
"반 친구에요."
"너 좋아하는 애지? 맞지?"
이미진이 운전대를 잡은 채 신나서 묻는다. 좌석에 앉은 채 몸을 앞뒤로 흔들 정도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이 여자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긴 해. 나도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이거 너 먹을래?’ 하면서 남자애가 먹던 걸 여자애에게 나눠주는 장면을 보면 엄청나게 귀여울 것 같긴 하거든.
배소연 봐. 누가 봐도 질투하는 학생의 모습이었잖아?
이미진 눈에는 귀엽겠지.
"좋아하는 애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딱 봐도 티가 나더만.”
“그걸 알면서 제 여자 친구라고 해요?”
“재밌잖아. 키키킥.”
“그거 알아요? 누나 성격 진짜 못됐어요."
“갑자기 왜?”
“저 좋아하는 애한테 여자친구라고 해버리면 어떻게요.”
“그러는 지는? 지도 나한테 맞춰줬으면서?”
“아... 그, 그거는...”
“지훈이 너도 신나서 동참했잖아? 아냐?”
쩝. 할 말이 없다. 분명 그 상황에서 이미진의 애인이 아니라고 부정할 시간도, 상황도 됐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 재밌을 것 같았으니까. 나도 성격 못됐구나.
“처음부터 눈치챈 건 아니고. 사실 여자친구라고 했던 건 모른 상태에서 장난을 친 건데. 열 받아서 나를 노려보더라고. 쪼꼬만한 게 어른한테 눈을 부라려? 그래서 좀 놀려줬지.”
18살 먹은 고딩들 상대로 장난치니까 재밌냐?
이미진은 정말 장난기 많은 여자였다. 악마 같은 여자.
물론 나도 동참하긴 했지만.
"그래서 누나. 오늘은 어디서 모델 하는 거예요? 저녁에도 하나?"
"오늘은 그거 때문에 부른 거 아닌데?"
"네? 누드 모델 이야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래. 누드 모델 이야기도 하고 다른 사업제안도 좀 하고."
"사업제안?"
내가 자동차 창문에 팔을 기대며 옆을 돌아보자 이미진이 씨익 하고 웃는다.
뭔가 불안하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개구리를 앞에 둔 뱀과도 같았으니까.
동급생들 상대로는 나도 이미진처럼 상대를 가지고 놀 수 있다.
배소연 봐라. 내가 장난감처럼 심리를 가지고 놀았잖아?
게다가 걔는 나를 좋아해.
남녀관계는 결국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질 수밖에 없어.
생각해봐. 협상에서 원하는 게 더 큰 쪽이 불리한 거 아니겠냐고.
정조가 역전되서 내 몸뚱이 원하는 쪽은 배소연인데 내가 배소연한테 협상에서 지겠어?
난 배소연이 굳이 아니어도 되거든.
섹스하고 싶으면 이미진한테 말하면 이 여자는 오케이! 쌩유! 할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노는 거지.
근데 이미진에게 만큼은 그게 안 된다.
그녀는 나이를 먹은 만큼 사람을 대하는 게 너무 능숙했다.
능글능글 하면서도 원하는 건 다 빼먹되, 나에게 호구 잡히지는 않는.
"너 내 만화나 좀 봐줘봐."
"에로만화요?"
"어. 내 만화가 요즘 시원찮아서... 남자한테 조언도 구하고 싶은데 말이야."
"아니 왜 하필 나인데요? 난 싫어요."
"1시간 당 2만원."
“싫어요. 귀찮아요.”
무슨 만화를 봐 달래. 내가 전문만화가도 아닌데.
게다가 이미진이 그린다는 만화는 성인 만화다.
이 세계에서 잘나가는 성인만화라면 뻔하지 않겠는가?
모든 생산품은 구매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말하자면 니즈에 맞춰 생산되는 법이다.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들이 잘생기고, 키 크고, 돈 많은 남자가 가난하고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성향 내용이 다수인 이유는 소비자 절대 다수가 여자기 때문이다.
야동이나, 장르 소설, 게임, 만화 등이 판타지, 성장, 경영, 망상, 하렘, 모험, 갑질, 대리만족, 전문직. 등등 어려가지 남성향 내용이 다수인 이유는 소비자 절대 다수가 남자기 때문이다.
즉, 정조역전세계에서 에로만화는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거나, 여자가 남자를 애완동물 취급하면서 맘대로 하거나, 남자가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들이대서 막 섹스x섹스 하는 그런 내용일 텐데. 거기다가 가버려어어어엇!!! 하는 표정을 짓는 건 남자일 거 아냐?
씨발! 그걸 왜 봐!
“시간 당 5만원?”
"... 할게요.”
하지만 돈이 최고다.
“... 누나 집 돈 진짜 많나보네요?"
"짜샤. 원래 여자가 만화나 미술, 소설, 음악 이런 거하려면 집에 돈이 많아야 되는 거야. 남자가 뭘 아냐?"
"남자가 뭐요."
"너 나이 때야 남녀가 다 괜찮아 보이겠지만. 막상 사회 나오잖아? 여자가 돈 못 벌면 사람 취급도 안 해줘. 돈 못 버는 여자는 그냥 사람이 아닌 거야. 가족들도 답답하게 보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어? 너도 돈 못 버는 여자는 싫잖아. 안 그래?"
"그거야..."
나는 딱히 상관없는데, 정조역전세계의 남자라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원래세계는 맞벌이가 중요해져, 여자도 돈을 벌어야 하는 시대가 왔지만 나는 여자가 돈을 못 벌어도 상관없다. 예쁘기만 하면 뭐 그런 게 중요하겠어.
"그런데 돈도 안 되는 미술, 만화, 소서어얼? 하하하! 미친 거지! 그거 해서 돈 얼마나 번다고. 잘나가는 작가들이나 많이 벌지 나머지는 돈도 못 벌어. 그래서 남자는 그걸 해도 주위에서 막 뭐라고 안하는데 여자는 다르다?"
"욕먹겠죠."
"그래. 잘 아네. 결혼은 어떻게 하려고? 라든지... 그거 돈 못 번다던데? 라든지... 그딴 소리 신경 안 쓰려면 뭐라고?"
"집에 돈이 많아야 한다."
"빙고. 그래서 예체능계에 남자가 많은 거야."
나도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세계 여자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코앞에서 남자는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
"그래서 1시간 당 5만원 줄 수 있다 이거죠?"
"응. 그래. 누드모델도 해줄 거냐?"
"... 저번에는 100만원 줬잖아요."
"야. 그건 학원에서 부른 거잖아."
"그럼 나 안할래요."
"걱정 마. 누드모델은 안 시키니까. 읽고서 이것저것 조언만 해주면 되. 너 내 만화 아직 안 봤지? 죽여준다? 보고 반하지나 마라. 이미진 선생님! 사인 한 장만! 그래도 안 해줄 거야! 하하하!"
참 철없는 누나다. 설아 누나는 안 그랬는데...
"설아 누나 이야기나 좀 해봐요. 임형진이 뭐 어쨌다고요. 누군지 알려준다면서요?"
"아... 형진 오빠... 말이지?"
"...?"
갑자기 힘이 없어진 목소리. 나는 이미진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
한참을 조르자, 결국 이미진이 실토를 했다.
그녀는 본래 밝고 명랑한 사람으로, 언제나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기에 당당하고 강한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숨기는 것이 생기면? 못 숨기는 거지 뭐.
"지금 당장 설아 누나네 회사로 가요! 누나도 어딘지 알고 있죠?!"
"가긴 어딜 가?! 야. 정신 차려!"
"안 가면...! 거기로 안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경찰에? 신고... 해서 뭐하게?"
"이 보조석 시트 청소 했어요?"
“청소?”
“우리 여기서 섹스했잖아요. 저번에 섹스하고 청소 했어요?”
"... 다, 닦기는 했는데."
하지만 목소리가 살며시 떨린다. 이건 내 정액이랑 이미진 애액이랑 다 남아있다는 거거든.
경찰에 성폭행 당했다고 내가 신고하면 이미진은 그냥 끝장나는 거지.
정조가 역전됐으니 성에 관해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유리하잖아.
게다가 이미진이 나이가 훨씬 많아. 경찰이 누구 손을 들어주겠어?
당연히 내 편이지. 무고죄는 또 엄청나게 가볍거든.
내가 역고소 당해봐야 별 거 아니니까 일단 지르고 보면 이미진이 무조건 손해야.
결국 협박이 통했는지 어쨌는지 이미진은 나를 데리고 윤설아의 회사로 향했다.
"저 사람이에요?"
"어. 그래."
큰 건물. 설아 누나는 누구나 들으면 알아주는 대기업의 영업직이었다.
서울 중심부의 높은 건물에 1층은 로비가 밖에서도 훤히 보이는 투명한 창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사이에 안내데스크에는 한 남자가 정장을 입고 서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가 그토록 궁금했던 임형진이었다.
키도 크고, 솔직히 나보다 잘생긴 거 같다. 나이는 32살로 설아누나보다 1살 많았다.
인상도 좋네? 참네.
"너 괜히 뛰쳐나가고 그러면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요!"
"약속했다?"
"알았다니까요?"
내가 짜증난 건, 임형진과 설아 누나가 사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시발 뭐야 그럼. 나는 뭔데?
"그게... 설아가 너 만나기 전 날에 형진 오빠 만났나 봐. 그 날 설아가 고백했는데 차였다더라구..."
"그러니까 본인 외로운 참에 내가 걸린 거네요. 그렇죠?"
"에이. 말을 또 그렇게 하냐. 설아 성격에 너를 외면하겠어? 안 그래?"
그건 이미진 말이 맞다. 윤설아는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남자에게 차이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할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내가 불쌍한 척하며 재워달라고 하면 재워줬을 그럴 사람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가 저 남자랑 사귀게 되니까 나는 필요 없어진 거고요? 그죠?"
"필요 없어진 게 아니라..."
어쩐지 설아 누나가 연락이 없다 했다. 자기 일 바쁘니까 그랬겠지.
하. 갑자기 다 짜증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설아 누나에게 불쌍한 가출 청소년일 뿐이었던 거다.
성욕의 대상이기 이전에 그냥 불쌍한. 불쌍한 놈이었던 거지.
도와주려고 집에 들여왔더니. 집에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해주네?
생각해봐.
남자 직장인이 회사를 다니다가 같은 회사 여직원에게 고백했다 차였어.
막 너무 창피해. 회사는 어떻게 나가야할지 모르겠어.
하루하루가 존나 짜증나는 거지.
근데 갑자기 여고딩 하나가 재워달라고 하더니, 자기에게 애교도 부리고 집안일을 하네?
여고딩이 못났으면 모르겠는데 쌔끈해. 당장 따먹고 싶을 정도야.
그런 애가 옆에서 살랑거리니까 얼마나 좋겠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겠지.
하지만 사랑하는 것 까지는 아니야. 그저 대용품으로 썼을 뿐이지.
그래. 나는 임형진의 대용품이었어. 사랑도 뭣도 아닌.
"... 지훈아. 미안해. 괜찮아?"
"..."
"아오. 내가 중간에 끼면 왜 되는 게 없냐."
이미진도 윤설아가 임형진이랑 만날지는 몰랐다고 했다. 알았다면 장난도 안쳤을 거라면서.
타이밍이 서로 어긋난 거지. 재수도 존나 없어요.
윤설아가 임형진에가 다시 고백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상황이 더 명확해졌다.
내가 사라지고, 대용품이 사라진 거지. 그러니까 더 외로워진 거야.
그리고 고백. 사귐. 키스. 섹스.
나는 어쩐지 윤설아에 대한 모든 마음이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나는 그렇게 큰 존재가 아니었다.
나 혼자 좋아서 이리저리 크게 생각하기도 하고, 오해도 하면서 발광을 떨었을 뿐.
씁쓸한 밤공기를 느끼며 나는 이미진에게 말했다.
"... 만화나 보러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