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마지막 썰썰썰 - 15
“... 싫어요.”
당장이라도 녹음된 걸 틀어주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적나라하게 그걸 까발리게 되면 누나의 입장은 어떠할까.
그걸 생각하니 차마 이 곳에서 녹음된 파일을 틀 수 없었다.
“야! 김지훈. 너 내가 안 본다고 말 했지? 사과해!”
“싫다구요!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무 화가 나서 미진 누나에게 소리치고 뷔페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시발. 그래.
그렇게 그 남자가 좋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누나를 위해서 그랬던 건데.
주차장에 들어서서 차에 둔 짐을 가지러 가는데 미진누나가 나를 따라왔다. 미진 누나는 나를 자동차로 끌고 가서 조수석에 앉힌 후 엄한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
“너 지금 이러는 거 엄청나게 실수하는 거야. 알아?”
“...”
“남의 동창회에 따라온 것 까지는 그렇다 쳐. 동창회에 남친들 데려오고 그러긴 하니까. 하지만 얌전히 있어야 할 거 아니야.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
“동창회에서 실수한 것 때문에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철현이한테 밉보여서 화내는 거예요?”
“너...”
“누나. 그 철현이라는 새끼가 어떤 새낀지 알기나 해요?!”
“니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누나가 운전석에 앉은 채 내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녹음기를 틀었다.
“... 래서 이제 미진이랑 어떻게 할 건데?”
“미진이? 미진이... 참네. 걔는 무슨 코흘리개 꼬맹이를 동창회에 데려왔데?”
“그러니까. 웃기는 얘야.”
“뭐 그런 거겠지. 지는 잘 살고 있다. 그런 거 나한테 보여주려고.”
“킥킥. 맞아. 걔는 원래 자존심 쎈 애니까.”
“그래도 쿨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가봐?”
“걔가 철현이 너한테 지극 정성이었잖아.”
“이미진이 그 계집애가 좋은 건 알아가지고. 걔도 좀 생각보다 좀 띨띨해. 내가 앞에서 내숭 좀 부리면 좋다고 헤실헤실 거리더라고. 니네 이미진이 ‘미안해. 한번만 용서해줘.’ 이러면서 비는 거 본 적 있어?”
“이미진이? 그 이미진이 그런 말을 해?”
“내가 그만큼 좋은 거지. 원래 부모님 상견례까지 잡혀 있었거든. 근데 하필 그 때 무난자증인 걸 알게 된 거야. 결혼만 해달라고 무릎 꿇고 막 빌더라. 아니 근데 임신을 못하는데 결혼이 뭔 가치가 있어?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임신을 해야 나중에...”
“유산도 받고 다 그런 거 아니야? 걔는 가치가 없는 애야. 여자로서 가치가 없어. 아까도 정말 미안하다 어쩌다하면서 나한테 비는 거 봤지? 지도 이제 남자는 나밖에 없는 거 알거든. 집안도 괜찮고 집에 돈도 좀 있는 것 같아서 빨아먹을 만 하긴 한데... 뭐랄까...”
띡-
녹음기를 껐다. 미진 누나는 운전대를 붙잡고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난 것은 분명했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니까.
거짓일 리는 없었다. 나도 임철현의 목소리를 알아듣겠는데, 사귀었던 미진 누나가 그 목소리를 모를까? 운전대를 붙잡은 채 침묵하며 한참을 심호흡 하던 누나가 돌연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쿵쿵 거리며 뷔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누나! 어디가요!?”
나는 누나를 따라 뷔페로 향했다.
뷔페에서는 혼란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다니던 동창들이 다시 나타난 미진 누나와 나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임철현은 동창회 중앙에서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
“어? 미, 미진아?”
“미진이?”
임철현 주위의 동창생들이 조금씩 물러난다. 그 사이를 당당하게 헤치고 들어간 미진 누나가 임철현 앞에 섰다. 내가 누나 옆에 서자 임철현이 환하게 웃으며 미진 누나에게 말했다.
“사과 안 해도 되. 난 괜찮아 미진아.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지 뭐.”
“어린애가 그럴 수도 있긴 하지. 고맙다 이해해줘서.”
“그래. 그러니까 미진이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대신 이제 깔끔하게 끝내자.”
“그러자. 근데 말이야...”
“응. 뭔데?”
“나도 아직 존나게 어린가봐.”
“뭐?”
“니가 어린애가 하는 짓은 용서해주는 그런 좋은 애라서 정말 다행이야. 임철현.”
“그게 무슨... 허어... 악......”
그 순간 미진 누나가 식탁 위에 맥주 2000cc 잔을 들더니 그대로 임철현의 머리에서부터 부어 버렸다. 노란 액체가 용암이 끌 듯 하얀 거품을 이끌고 임철현의 온 몸을 덮친다. 입고 있던 옷이 푹 젖어버리는 동안 임철현은 놀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히익!”
“헉!”
“누, 누나!”
나도 놀라고, 동창생들도 놀랐다. 미진누나는 이를 악물고 차갑게 말했다.
“나는 네가 설령 장애인이 되고, 뇌사 판정을 받아 병실에 처박혔다 하더라도. 그래도 너를 버리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사랑했다. 임철현.”
“... 후우. 근데?”
“그렇다는 거 알아두고... 다음에. 혹시나. 나 마주치지 마라. 그럼 남자고 뭐고 넌 뒤져.”
“이, 이미진 너...”
“아가리는 닥치고. 알겠어?”
“...”
“불만 있으면 고소해. 니가 좋아하는 그 돈으로 보상해 줄 테니까. 2배 쯤 더 쳐서 보상해줄게. 이 그지 새끼야. 가자. 김지훈.”
“네? 아. 네네. 누나.”
주위 모두가 놀라서 어버버 하는 가운데 이미진은 당당한 걸음으로 뷔페를 빠져나왔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누나를 뒤따라 나왔다. 어떻게 보면 원하는 결말이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누나의 격한 반응에 너무 놀랐다.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
차 안에는 침묵만 가득. 감히 이야기를 나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누나의 지금 마음은 어떨까. 걱정됐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 흐... 끕...”
그 때 갑자기 미진 누나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운전석을 돌아보니 운전대를 붙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억지로 참아내려는 듯 입술과 표정들이 구멍들을 막을 듯 잔뜩 구겨지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 나왔다.
“...”
그 모습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위로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신호등이 빨간 불이 됐다. 그러자 누나가 운전석에 머리를 기대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잘한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이 누나를 상처 입힌 건데.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었다. 그래도 누나는 출발하지 않았다.
*
누나가 도착한 곳은 미진 누나의 집이었다. 미진 누나는 도착하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나를 보며 말했다.
“차, 참... 너, 너 데려다 줘야 하지? 내, 내 정신 좀 봐...”
억지로 웃으려는 그 모습이 더 슬프다. 나는 미진 누나의 손을 붙잡고 누나의 집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왜? 지, 집에 안 가?”
“오늘 혼자 있을 수 있겠어요?”
“...”
그리고 누나의 집에 도착하자 미진 누나가 지갑을 꺼내더니 돈을 내밀었다.
“이거... 택시비야. 집에 가서 쉬어. 오늘 고생 했...”
“왜 억지로 보내려고 해요. 누나! 강한 척 하지 말고 울어요! 여자도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해요. 슬프잖아요. 울어도 된 다구요.”
누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올려본다.
“... 너... 내가... 흐으... 도, 동정하지 말라고 했지!”
“...”
“니가... 어린 새끼가... 뭐, 뭘 안다고...!”
“누나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어떻게 가라구요!”
“꺼져! 가라고! 꼴 보기 싫어!!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그 순간 나는 누나가 뭘 어떻게 하든지 간에 확 하고 안아버렸다. 품에 안아 꽉 하고 누르는데 누나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우리는 여기저기 부딪히며 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었을까.
나는 미진 누나를 아래에 내리 깔고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꽉 끌어안았다. 거칠게 저항하던 미진 누나의 바동거림이 멈췄을 때쯤, 나는 팔을 풀고 물러나 그녀를 내려 보았다.
누나의 얼굴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는... 가치 없는 년이야...”
“...”
“아, 아무 쓸모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개뿔도 없는 그런 가치 없는 년이야...”
“...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그저... 그저 우리 집안과 돈만 보고... 왔던 거야.”
“... 하아. 아니에요.”
“이런 나를 누가... 누가 좋아해 주겠어!”
“안 그렇다니까요?!”
“동정하지 마! 동정하지 말라구! 날 좋아하지 않을 거면 꺼져! 꺼져버려!”
“이대로 두고 어떻게 가요! 아 좀! 누나!!”
“... 흐윽... 윽...”
완전히 무너진 누나를 나는 꽉 안아주며 말했다.
“누나 예뻐요. 충분히 여자답고, 여자로서 매력적이에요.”
“... 내가 신경 쓰여?”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대로 두고 어떻게...”
“나랑... 할래?”
“... 네?”
“아니... 해줘.”
“...”
“지훈아... 김지훈. 나랑 해주라...”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 달콤함에는 울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