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1 원더랜드의 딸들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콜린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어둑한 풍경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바깥에 나가기는 글렀다 싶었다.
거실 소파에 몸을 기대며 콜린은 그의 붉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곱슬거리는 그의 머리는 덥고 습한 그 공기를 차마 버티지 못하고 잔뜩 뻗쳐있었다.
‘이래서 여름비는 싫단 말이야…….’
그는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혀를 찼다. 이런 날씨는 머리 손질에 시간을 들이는 콜린에게는 재해나 다름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 집 밖을 나갈 일이야 그다지 없긴 하지만, 내일 날이 개고 난 뒤에도 습할 거라고 상상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그 짜증의 감정을 담아 쭈욱 기지개를 켰다. 잠옷으로 쓰던 반바지 너머로 그럭저럭 탄탄한 다리─적어도 그가 생각하기에는─가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코, 콜린… 일어났니?”
여성─한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 것도 그때였다. 눈동자만을 돌려 콜린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조금 다른 색의 붉은 머리칼. 심지어 곱슬거리지도 않았다. 그야 당연한 노릇이다. 일단 호적상으로 한나는 그의 누나이긴 했으나 피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호적상의 누나는 그를 조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몇 번인가 한나는 이런 추잡한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왔다.
콜린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생각하다가, 이내 조금 전 기지개를 켜던 와중 옷이 말려올라가 배꼽이 드러나 있음을 눈치 챘다.
‘이래서 여자는!’
그는 혀를 차며 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렸다. 한나의 표정에서 아쉬움이 숨겨지지도 않고 드러났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시선은 허벅지라는 대체재를 찾았다.
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라인을, 그리고 바지 아래에 가려진 것을 망상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더니 콜린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여자라도 그렇지, 자기 남동생을 그런 눈으로 본다니…….’
모든 여자가 다들 이런 추잡한 생각을 품고 있지만 그 욕망을 숨기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그저 한나가 특히 변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콜린은 후자이길 바랐다. 그 정도로 세상이 타락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이따금 집을 찾아오는 레니는 매우 숙녀적으로 행동했다. 그것이 가식이라면 정말이지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한나?”
“아, 크흠! 미안, 조금 멍때리고 있었어.”
‘멍때리긴 무슨.’
이대로 두면 언제까지고 자신의신체를 음란한 눈으로 바라볼 것만 같았기에 콜린은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한나는 그의 다리에서 눈을 떼었다.
콜린은 혐오감을 가득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한나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어릴 때는 착했는데…….’
그런 식으로 회상을 해보았지만 과거가 어떻든 간에 남성을 저런 식으로 바라보는 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거의 평생을 함께 해온 동생이 상대라면 더더욱.
“…밥 차려놨어.”
콜린은 한숨을 쉬며 담담히 말했다. 짜증나는 여자였지만 일단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다.
더욱이 한나는 집안의 생계를 대부분 짊어지고 있었다. 물론 콜린이 놀고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나의 수입에 비하면 비교적 소일거리에 가까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일단 밥은 먹여야 돈을벌어오든 말든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콜린은 미리 차려둔 식탁으로 향했다. 비록 오늘은 비가 와서 일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본인을 돈 벌어오는 기계 취급을 하고 있는 걸 알아차리면 그녀는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상상도 스쳐지나갔으나, 저 눈치 없는 바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역시 내 동생이야! 좋은 신랑감이 되겠는데.”
“나 참… 그냥 조용히 먹어.”
음식을 입에 집어넣자마자 칭찬을 해온 그녀였다. 하지만 한나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봐야 기쁘지 않다.
그런 그의 경멸감을 아는지 모르는지─콜린은 분명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한나는 미소를 띠며 음식을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가만히만 있으면 멀쩡한 얼굴인데 말야.’
콜린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렴 식사 도중에는 한나의 성욕이 날뛸 일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 기쁜 점이었다.
문제는 평소였다면 식사 후 밖으로 나갔을 한나가 비가 오는 탓에 종일 집에 있으리란 것이었고, 마찬가지로 집에 있을 예정인 그는 내내 그녀와 마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래서 비는 싫다니까…….’
콜린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날은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것이, 땅이 젖어있지만 않았어도 정말 어제 비가 왔는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마친 콜린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어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했다.
‘오늘도 일하러 가야지…….’
당장이라도 그 따스함에 몸을 맡기고 낮잠을 자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는 금세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이미 어제도 비가 와서 하루 종일 집안에서 보내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누나인 한나도 이미 일을 하러 갔는데 정작 자신은 뒹굴대고 있자니 마치 그녀보다 한심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결국 콜린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나갈 채비를 했다.
콜린의 일상에서는 집안일을 제외하고도 한 가지 일이 더 있었다. 도시 뒤편의 산에서 약초를 캐 팔아먹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뭐, 말이 좋아 도시지 꽤나 후미진 곳에 있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일단 그렇게 부르는 곳이었다. 다만 낙후되었냐고 물으면 이곳 외의 다른 도시를 가본 적이 없는 콜린의 입장에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비교대상이 있어야 평가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일단 영주님의 저택이 존재하는 도시니까 의외로 그럭저럭 발전한 곳일지도 모른다. 콜린은 그렇게나마 추측할 뿐이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콜린은 평소에 쓰던 소쿠리를 집어들었다. 몇 년을 내도록 써서 그런지 조금 투박하게도 느껴지는 나무 소쿠리였다.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콜린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항상 보아왔던 거리를지나 성문으로 향했다.
“콜린, 오늘도 약초 캐러 가?”
그런 와중 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부름이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였기에 콜린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성벽 위에 누군가가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어깻죽지까지 내려오는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아, 레니 씨.”
이 도시─펠레이라의 경비대장인 레니. 한나의 친구이기도 하여 이따금 집에 찾아오기도 하던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아마 올라갈 수 있게 어딘가에 사다리리든 계단이든 있기는 하겠으나, 그걸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레니는 이쪽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7미터는 족히 되는 높이였음에도 사뿐하게 한 발로 내려앉는다. 물론 다치거나 하는 곳도 전혀 없다.
레니는 권능이라는 것을 보유한 사람이었다. 세계로부터 받은 그 힘은 그야말로 물리법칙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까지도 가능하게 했다.
까놓고 말해서 콜린은 그녀가 전에 맨손으로 곰을 때려잡는모습까지 본 적이 있었다.
‘나 참. 이런 사람이 왜 한나랑 친구해주고 있는 건지.’
“언제쯤 돌아올 거 같아?”
“뭐어, 평소처럼 저녁 되기 전에는 와야겠죠.”
누나 밥도 차려줘야 하고, 라며 콜린은 덧붙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나가 부러운걸.”
“진짜 한심하긴 하지만… 일단 가족이라서요.”
“하하,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잖아?”
‘…동생을 성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그 시점에서 충분히 나쁜 거 아닌가?’
콜린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눈앞에서 이 이상 친구 뒷담화를 하는 건 조금 아닌가 싶어 말을 다시 삼켰다.
“아무튼 이제 가볼게요.”
“응,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갔다와.”
떠나가는 콜린을 향해 레니는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여러모로 성실한 사람이라고, 콜린은 생각했다.
×
백이초, 연생화, 섬련초, 꿈잡이풀, 다시 연생화…….
장갑을 낀 손으로 콜린은 약초들을 소쿠리에 집어넣었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가? 이것저것 많이 자라있네.’
약초를 캐러 뒷산으로 올라온 것이 아침의일이다. 하늘을 보니 아직 해는 중천에 떠있을 시간인데도 벌써 소쿠리가 가득 찼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쿠리였지만 그걸 감안해도 오늘은 꽤나 빠른 속도였다.
콜린은 싱긋 웃으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양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희귀한 약초들도 꽤 구할 수 있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겠다.’
그는 신이 나서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일을 한 것도 벌써 몇 년은 되었다. 고작 이 정도로 엎지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얼추 10분 정도를 걸었을까.
“…어?”
산비탈에 자라나 있는 푸른 꽃을 보고 콜린은그대로 굳었다. 이윽고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오늘은 뭐 되는 날인가보다 진짜…….”
용살화. 그 이름을 콜린은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그 음색에는 희열이 맴돌고 있었다.
기쁨의 당혹감이 그에게 찾아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이 꽃이 아직 필 시기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설령 시기가 온다고 해도 어지간해선 볼 수 없는 꽃이었다는 점이다.
그 탓에 어마무시한 값─적어도 마을 소년의 소일거리 기준으로는─을 자랑하는 식물이었다. 저 꽃 한 송이면 지금 들고 있는 소쿠리를 전부 길바닥에 버린다고 쳐도 몇 배는 이득일 정도로.
콜린은 소쿠리를 발치에 내려놓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비탈이라고는 해도 그리 경사가 급하지는 않았다. 어제 비가 와서 지반이 조금 불안하겠지만 예전에도 몇 번이고 해봤던 작업이었기에 그다지 걱정은 없었다.
숨을 길게 한 번 내쉰 뒤, 그는 다리를 뻗었다. 조금 젖은 흙의 감촉이 발을 통해 전해져왔다. 나무줄기를 붙잡아 중심을 잡는다.
그렇게 세 걸음, 네 걸음──. 콜린은 금세 용살화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푸른 꽃잎이 바람에 살랑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몸을 숙이고 조심스럽게 뿌리를 캐낸다. 꽃이 뭉개지지 않도록 왼손으로 그것을 살포시 쥐었다. 손에 들린 꽃을 바라보며 콜린은 다시금 미소 지었다.
“…윽!”
그러나 그 순간, 발아래에 있던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콜린은 깜짝 놀라며 옆에 있던 줄기를 붙잡았다. 흙에 섞인 돌멩이가 비탈을 굴러 떨어졌다.
“큰일 날 뻔 했네…….”
경사는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한 손밖에 쓸 수 없었다.
‘조심해서 내려가자.’
용살화를 캐든, 펠게이우스의 열매를 따든, 비탈에서 굴러 죽어버린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콜린은 그리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
──그러나, 재해라고 하는 것은 조심하는 정도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콜린의 몸이 붕 떠올랐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어서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처음에는 순간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진 줄 알았다.
그것이 아니라 그가 밟고 있던 지면이 통째로 무너졌음을 깨달은 것은 그의 귀에 쿠르릉 하는 땅울림 소리가 들린 후였다.
아니, 아마 소리를 들은 것은 그보다 더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저 뇌가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만 그것도 그저 뇌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는 이대로 떨어질 것이고,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은 그의 몸에 찾아올 충격량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터였다.
충격량을 줄여준 것은 그의 뇌가 아니라 떨어진 장소에 잔뜩 깔려있던 푸른 이끼였다. 푹신하면서도 축축한 그것이 콜린의 몸을 받아주었다.
“사, 살았나…?”
그리고 콜린의 추락이 멈춘 그때가 되어서야멈춰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지면이 무너졌고, 그는 떨어졌다. 다행히도 이끼가 바닥에 잔뜩 있어 크게 다치진 않았다. 피부가 조금 쓸리고 흙더미를 덮어써 전신이 더러워졌지만, 불평할 생각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게 어디인가 하며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다.
콜린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위─조금 전까지는 아래였던 곳─를 바라보았다. 구멍이 뻥 뚫려서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구멍은 꽤나 높은 곳에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동네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이후에 그는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동굴인 듯 했는데, 콜린은 이런 곳이 매일 다니던 산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알고있던 동굴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동굴에 들어왔다는 점이었고, 또 입구였던 곳은 너무 높아 어지간해서는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일종의 조난 상황이었다. 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문득 아직도 자신이 누운 자세라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 뭐, 추락으로 즉사하지 않은 것만큼은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허나 그 뒤에 ‘동굴에서 조난’이라는 결과가 따른다면 그저 죽음이 유예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콜린에게는 식량도 도구도 없었으니까.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곰 같은 게 동굴에 있을지도 몰랐다. 가능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콜린은 그나마 희망적인 것을 두 가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첫째는 그의 엉덩이 아래 깔린 이끼가 푸르게 발광하고 있었다는 점.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 빛을 내는 별빛이끼였다. 어쩐지 동굴 속인데 시야가 밝다고 생각했더니 별빛이끼가 잔뜩 깔려 있었다.
콜린은 이끼를 한 아름 뜯어냈다. 본래 그 손에 들려있던 용살화는 떨어지면서 이미 놓친지 오래였다.
‘이 정도면 걷는 데 불편하지는 않겠지.’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습기에는 문제가 없을 터였다. 물론 언젠가는 이끼가 수분을 죄다 집어삼켜 불도 꺼지겠지만 그 전까지 빠져나가지 못하면 콜린이 아사하는 게 먼저일 테니 상관없다.
그리고 두 번째로 희망적인 것은 선선한 바람이 그의 뺨에 불어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명백히 저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도 그쪽 어딘가가 바깥과 이어져있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그 바람에 실려있는 것은 오직 흙냄새뿐이었다. 짐승의 털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는 풍기지 않았다.
콜린이 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아가듯, 누나인 한나 역시 산에서 짐승들을 사냥하여 돈을 벌었다. 이따금 가죽을 말린다며 집에 늘어놓는 통에 그 쿱쿱한 냄새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옷에 짐승 냄새가 밴다며 화를 냈는데, 설마 그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돌아가면 조금 정도는 잘 해주자.’
그러다가 무심코 누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아 눈물이 살짝 배어나왔다. 한나는 짜증나는 누나였지만 그래도 일단 가족이지 않은가.
그야 조금 변태 같고, 동생을 추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이따금 속옷이 사라졌나 하면 누나 방에서 발견되고, 높은 확률로 그것이 음탕한 액체로 잔뜩 젖어있다거나 하지만…….
‘……가족만 아니었어도 머리통을 깨버렸을 텐데.’
콜린은 그 훈훈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윽고 찾아온 혐오감에 강제로 접힌 느낌이었다.
언제 떠올려도 감성적이 되는 걸 막아주는 여자였다. 장담하건대 새벽감성으로 한나를 생각해도 절대 훈훈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콜린은 옷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터벅터벅. 이따금은 바닥이 조금 바뀌어 저벅저벅.
흙으로 된 바닥은 대체로 평편하여 걷는 데 힘들지는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다져놓은 것만 같은 그런 반듯한 땅이었다.
그러나 콜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누가 굳이 이런 곳에 길을 닦아두겠는가. 애초에 동굴에 들어오는 것이 처음이었던 그였기에 원래 이런 동굴도 있는가보다 하고 그낭 넘기기로 하였다.
그렇게 걸은 것이 대략 30분 정도.
지금 그 자리에 멈춰선 콜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넓은 회랑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반듯한 벽. 위로 탁 트인 천장. 여기저기에 잔뜩 자라난 별빛이끼의 푸른빛은 회랑 가운데에 있는 호수에 비쳐 아름답게 바스라졌다.
‘예쁘다…….’
그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무심코 눈길을 빼앗기고 말았다. 요정의 궁전이있다면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순간 자신이 조난당한 상황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말이다.
가볍게 입을 벌리고서 주변을 둘러본 콜린은 호수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딱히 목이 마른 것은 아니었지만─애초에 먹을 수 있는 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가볍게 씻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기에.
“응?”
그렇게 나아가던 콜린은 발에 무언가가 걸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를 바라보았다. 네모반듯한 검은 육면체.
‘책? 왜 이런 곳에 있지?’
별빛이끼를 가까이 가져다대어 살펴보니, 그것은 한 권의 두꺼운 책이었다. 표지에 적힌 것은 꼬불꼬불한 글자였다.
كتاب العزيف
عبد الله الحظرد
정황상 책의 제목이거나 저자일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콜린은 그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위대한 태양왕 전하의 권능으로 전세계 모든 존재들의 입말(口語)이 통일되었으나, 문자에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린은 책을 집어들었다. 과연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는 책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호기심이라고 해도 좋다. 어쩌면 안에 그림이 있어서 대충 어떤 책인지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콜린은 자신의 처지조차 잊은 채 약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의 절반 정도 되는 부분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현생에 존재하지 않을 전생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