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화 〉2 멋진 신세계(1) (2/89)



〈 2화 〉2 멋진 신세계(1)
“…염병.”

정희원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고서 자기 자신도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꽤나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이곳은 도서관이었다. 주변이 조용하면 작은 소리도 똑똑히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 자신은  번 집중하면 주변 소리가 잘  들리는 타입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부분은 배려를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희원은 욕설의 원인이  물체를 살펴보았다.

그가 최근 읽기 시작한 판타지 소설의 4권. 얼핏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책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겉표지의 두께에 비해 내용물이 가벼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페이지가 뜯겨나가 있었다. 그것도 펼치기도 전에 알아차릴  있을 정도로, 수십  이상이 사라져있었다.

그래, 오래 된 책이기도 하니까 제본 상태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거고 페이지가 뜯기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러면 최소한 원래 자리에 끼워서 반납해야  거 아냐!’

뜯긴 페이지를 일일이 수선하는 친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뜯겨나간 위치에다 페이지를 끼워두긴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불편하긴 해도 일단 읽을 수는 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책은 그렇지 않았다. 말 그대로 페이지 일부가 증발한 상태. 범인을 찾으면 하드커버로 후려치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몰려왔다.

‘서고에 복본이 있으려나?’

꽤나 인기 있던 책이기도 하니 여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사서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그리 생각하고서 정희원은 책을  자리에꽂아두려 했다.

“……어?”

그러나 또다시 무심코 의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자신이 조금 4권을 뽑았던 자리에 시커먼 책이 꽂혀 있었다.

순간 자신이 위치를 착각했나 싶어 주변을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 그 자리가 맞았다. 2권과 5권 사이─3권은 조금  그가 반납했기 때문에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누가 잘못 꽂은 책이고 원래 4권 옆에 있었는데 그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그 검은 책이 너무나도 두꺼웠다. 그 탓에 한 권도 더 들어갈 틈이 없었다.

즉, 분명히 조금 전에는 없었던 책이 갑자기 나타난 셈이다. 투명인간이라도 되지 않는  그의 눈을 피해 책을 꽂을 수도 없는 일이니, 정말로 허공에서 나타난 것이나 다를  없었다.

더군다나 책에는 라벨조차 없었다. 도서관 장서라면 당연히 붙어있어야  그것이 말이다. 그는 의아해하면서 그 책을 집었다.

كتاب العزيف
عبد الله الحظرد

책의 표지는 아랍어로 되어 있었다. 아랍어 원서는 이쪽이 아니라 다른 서가에 꽂혀 있어야 했지만 이미 충분히 요상한 상황이었기에 그 의문은 제쳐두기로 했다.

정희원은 호기심에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아랍어를 배운 적 없는 그였기에 당연히 읽을  없었다. 그래도 혹시 삽화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 책을 계속 살펴보았다.

뚝.

책 위로 떨어진 액체를 정희원이 알아차린 것은 대략 스무 장을 넘겨 기괴한 문양을 발견한 직후였다.

뚝. 뚜둑.

그리고 물방울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여러 방울의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물이라도 새나?’

도서관에서 누수라니. 화재 다음으로 발생해선 안 될 사태였다. 그렇기에 정희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입을 벌린 기괴한 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침을 뚝뚝 흘리는  존재는 당황하여 몸이 굳어버린 청년의 반신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


“──으윽!”

바닥에 누워있던 정희원─아니, 콜린은 기괴한 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별빛이끼를 조명삼아 비춰지는 동굴의 풍경. 그리고 가슴에 품고 있는 검은 책.

그것은 콜린이 이 동굴에 조난당했다가 발견한 책이었고, 정희원이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전까지 읽고 있었던 책이었다.

아니,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아마도 의미가 없으리라. 기억이 돌아온 지금에야 둘은 같은 인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전생의 기억, 뭐, 그런 거지?’

분명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고,  기억은 괴물에게 잡아먹힌다는, 불합리하다고까지 표현할 법한 죽음으로 끝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콜린은 이 상황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 번쯤은 꿈이라고 여겨도  한데, 자기 스스로도 이렇게나 쉽사리 수용했다는 점에 의아할 지경이었으나 과거의 기억을 몇 번이고 떠올려봐도 놀랍도록 아무렇지가 않았다.

‘괴물에게잡아먹혀 죽었고, 이 세계에서 콜린이라는 이름으로 환생했다. 그리고 지금 막 전생의 기억이 되돌아왔다. 그렇게 되려나?’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 차분해진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는 턱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뭐, 아무렴 어때.’

…정정. 생각에 잠기려다 말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고민에 잠긴다고 한들 자신의 죽음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이미 지나간 일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좋다고 하면 좋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정희원의 성격이었다. 이제는 콜린이라고 불러야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이 동굴을 빠져나가는게 우선 아니겠는가. 콜린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각은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하면 되겠지…….’

그러다가 콜린은 그곳을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는 점에 놀랐다. 아마도 정희원의 의식이 섞여든 탓이었으리라.

아니, 단순히 섞여들었다기보다도 정희원 쪽의 의식이 메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콜린으로서 열하고 몇 해를 살았고, 정희원으로서 스물하고 몇 해를 살았다. 만약 두 의식을 한 그릇에 넣고섞는다면 후자 쪽의 색이  뚜렷하겠지. 콜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내 몸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냥 나인데 뭐.’

거기까지 해두고서 콜린은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휘휘 털어내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기억이 돌아온 직후 누워있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의식을 잃었던  했는데 동굴이라서 시각을  수가 없었다. 시계가 있으면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콜린에게는 손목시계도 휴대전화도 없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문명의 그리움을 느끼게  줄이야.

하지만 전생의 세계를 그리워하든 말든 시간을 알 방법이라고는 여전히 밖으로 나가보는 것뿐이었기에 콜린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바닥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서는 멈칫했다.

‘…깃털? 조금 전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

바닥에 새하얀 깃털이 놓여있었다. 그것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잔뜩.  모습을 보며 콜린은 무심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렸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안내해주는 것 같았다.

‘따라가볼까.’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감각을 집중해보니 은은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같았다.

어차피 길을 찾을 방법도 없어 원래부터 바람이 부는 대로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던 그였기에, 이 깃털의 안내를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깃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으려다 콜린은 고개를 돌려 검은 책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걸 놓고 가는 게 좋을까 들고 가는 게 좋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콜린은 책을 집어들었다. 처음 이 책을 펼친 순간 괴물에게 잡아먹혀 환생했고,  번째로 펼쳤을 때는 전생의 기억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책이지 않을까. 일단 가져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서 콜린은 깃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깃털의 안내를받기 시작한지 체감 시간으로 대략 15분.

콜린의 시야에 저 멀리에서부터 어스름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다가가자 바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각도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깥이 어둑했다. 나무가 듬성듬성하니 그림자 때문일 리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한나가 집에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어쩌면 걱정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미안해졌다. 지반이 무너져 내린 것이니 엄밀히 말하자면 콜린의 탓이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하고 있을 한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인상이 찌푸려졌다.

역시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가족은 가족이라는 것일까. 정희원의 의식이 이 신체를 지배하고 있다고는 해도 콜린의 기억 역시 남아있었기에 마냥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콜린! 어디야?! 내 말 들려?!”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다급한 듯이 크게 외쳐대는 여성의 목소리.

콜린은 그것이 한나의 목소리라는 것을 금세 눈치챌  있었다. 그는 이제는 빠른 걸음이 아니라 반쯤 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동굴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특유의 습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를 감싸왔다. 동굴 안에 있어서 순간 잊고 있었던 여름의 증거였다.

“─한나!”
“코, 콜린!”

그렇게 안도의 마음가짐으로 외친 것은 무의식적으로였다. 무의식, 이라고 할까 남아있던 콜린의 의식이 무심코 외치고 만 것에 가까웠다.

언덕 아래  너머, 붉은 머리칼의 미인이 서있었다. 조금 지친 것인지 숨을 거세게 내쉬고 있었고, 옷은 땀으로 잔뜩 젖었다. 콜린의 기억에 남은 한나의 모습이었다.

“괘, 괜찮니?!  다쳤어?”

한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달려와서는 콜린을 끌어안았다. 땀의 냄새가 가볍게 풍겨왔다.

“아, 응, 다친 데는 없는 거 같아.”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팔에 가슴이 눌려왔다. 갑자기 부드러운 감촉이 와닿은 탓에 콜린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전생의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는 한 번도 의식해본  없는 여성의 신체였다.

이런 부위로 성적흥분을 느낀다는 점에 있어 콜린의 의식이 당황했고, 뒤이어 여태껏 살아오면서 여성의 신체에 그다지 관심을 가져본 적 없었던 콜린에 대해 정희원의 의식이 당황했다.

그러다가 정희원은 이내 콜린의 기억에남아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되짚어보고서 결론을 내렸다.

‘……남자와 여자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건가?’

죽기 전의 세계에서 비슷한 소재의 소설들을  적이 있었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작품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야설이었다(이 시점에서 콜린의 의식은 그렇게나 노골적으로 성행위를 묘사한 소설이 잔뜩 있다는 점에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통칭 정조역전물. 여자가 주로 밖에서 일을 해 돈을 벌어오고, 남자가 집안에서 가사를 한다. 성적인 욕구 역시 남자보다 여자가 많으며 실제 사회에서 표출되는 것도 여자인 경우가 많다. 세세한 것은 작품마다 달랐지만 대체로 그런 느낌이었다.

콜린은 한나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수준급이라고 해도 좋을 미모의 여성. 그러나 기억 속의 그녀는 콜린의 속옷을 몰래─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훔치거나 그를 음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본래의 콜린이었다면 혐오감만을 품었을 행위였지만 지금 그는 그런 한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아, 미안… 갑자기 껴안아서.”

한나는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잽싸게 물러난다. 뒤로풀쩍 뛰는 수준의 움직임이었기에 풍만한 가슴이 흔들렸다. 이내 변명하듯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였어’라며 덧붙여오지만 콜린은 그저 그 가슴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잘만 하면 저 몸을 마음대로   있을지도……?’

아니, 한나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수많은 여자들을 노려볼 수 있으리라. 콜린은 꿀꺽 침을 삼켰다.

어느새 아랫도리를 부풀리고 있었던 그였으나, 한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 했다. 날이 어두운 탓도 있었겠지만 애초에 콜린의 바지를 봤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넘겼을 것이다.

아마도 그저 우연히 옷이 구겨진 것이라 여기겠지. 이런 상황에서, 그것도 누나를 앞에 두고 남자가 흥분할 리가 없었으니까.

동굴에 조난당했다 겨우 빠져나온 남동생이 전생의 기억을 갖고 누나를 따먹을 궁리를 하고 있다고, 대체 그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이 상황에 그런 걸 떠올릴 수 있다면 망상증 환자의 칭호를 내어주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누나, 얼른 돌아가자.”
“아? 응, 그래. 날도 어두워졌으니까…….”

그리 말하는 콜린의 입가가 비틀려 있었음을, 한나는 눈치 채지 못했다.

돌아가는  내내 콜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 한나도 그의 표정을 보았으나 순전히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 탓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어차피 한나가 뭐라고 여기든 콜린은 그다지 신경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궁리를 해볼 뿐이었다.

정말로, 너무나도 편의주의적인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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