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10 젊은 느티나무(1)
간간히 구름 낀 하늘이 햇빛을 가려준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훈련을 하기엔 이만한 날씨도 없겠으나 목덜미까지만 덮는 금발의 여성, 레니 테세오는 영 불만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유는 굳이 고민할 것도 없다. 뒤뜰 한쪽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소년─콜린의 곁에 있는 인물 탓이었다.
콜린의 훈련이 시작된 것도 벌써 열흘을 조금 넘겼다. 사실상 말이 훈련이지 가볍게 운동을 하는 정도의 강도이기도 해서 그는 잘 따라오고 있었다.
“힘들지 않아?”
“네. 괜찮아요.”
다만 어느 순간부터 간간히 시안이 찾아오는가 했는데 이제는 아예 휴식 시간만 되면 냉큼 와서는 시시덕대고 있었다.
레니가 그에게 연애감정을 품고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친한 친구의 동생이었다.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틈만 나면 창관 이야기를 꺼내는 시안이 콜린에게 접근하는 꼴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물이니 수건이니 가져와선 콜린을 챙겨주고 있는 시안이었기에 함부로 쫓아내기도 꺼려졌다.
‘아니, 하지만 정말 단순한호의로 그러는 걸지도 모르고, 애초에 내가 함부로 관여할 부분도 아니니까…….’
허나 유감스럽게도 레니는 그런 호의와 수작을 구분해낼 정도로 대인능력이 좋진 않았다. 나름 경비대장 직책을 맡고 있으므로 남을 통솔하는 건 자신이 있었지만 이성관계에 대해서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콜린은 그녀를 ‘모범적인 숙녀’ 정도로 여겨주는 모양이었지만, 레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그저 남자와의 거리감을 어림잡지 못할 뿐이었다.
‘아, 진짜 어떻게 안 되려나…….’
다만 시안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콜린은 그녀가 가볍게 화제를 던지는 것만으로 살갑게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살갑고 자시고를 떠나 살갗까지 맞댄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콜린의 접점이라곤 훈련이라는 이 상황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다고 대장 앞에서 남자를 꼬실 수도 없고.’
그럼 훈련이 끝난 다음을 노리면 되지 않냐 싶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보디가드랍시고 그 대장님이 직접 콜린을 바래다주는 것이다. 어디 관계가 진전될 턱이 없다.
그나마 괴력이 없는 자신과도 대련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둘만 있는 시간을 만들었던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하지만 정말 하늘이 그녀를 버렸는지, 매번 중요한 타이밍에 방해가 들어오고야 마는 것이다.
다른 남창을 사서 어떻게든 욕구를 해소하려고도 해봤지만 신체는 콜린의 훌륭한 물건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부분은 돈낭비를 곁들인 불완전 연소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연애? 애초부터 논외였다. 특유의 경박한 태도 탓에 이른바 '노는 여자'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였으나, 사실 그쪽 연애경험이 전무하기로는 시안도 레니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이 경우 높은 확률로 그 태도가 주위 평판에 있어 발목을 잡는 것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본인은 그게 문제라는 걸 자각하고 있지 않았다.
“벌써 끝났나요?”
그렇게 각자의 생각이 교차하던 와중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부풀어오른 연갈색 머리칼은 허리까지 늘어져있고 머리 끝에는 두 개의 토끼귀가 쫑긋 솟아있다.
“마치 씨.”
무심코 콜린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귀가 쫑긋거리더니 다정한 미소로 살짝 손을 흔들어주는 마치였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영주님이 훈련이나 도와주라고 해서요──.”
레니가 묻자 이내 눈가를 가리며 과장스럽게 흑흑 우는 소리를 낸다.
“또 무슨 사고를 치셨기에.”
“저, 벌 받는 중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요…….”
다만 레니에게서 금세 그런 반응이 돌아오는 걸로 봐서는 여간 사고뭉치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며 콜린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의도치 않게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알 기회가 있었던 탓이다.
“시종한테 조금 장난을 쳐줬을 뿐인데!”
“…그, 러십니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차마 숨기지 못하는 레니였다. 그도 당연한 일인 것이, 마치와 만나고 좀 지나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영주 저택에 묵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즉, 그 ‘장난’의 대상이 된 시종은 본인 것도 아니고 체셔가 고용한 시종이라는 의미였다. 저게 장난으로 말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자기가 잘못한 걸 모르는 건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으니 대련이나 할까요?”
그러다가도 금세 활기찬 모습이 되어선 귀를 쫑긋대며 몸을 푸는 마치였다.
“아, 그러면 많이 쉬기도 했으니…….”
그녀의 사정이 어떻든 도와주러 온 건 사실이었으므로 콜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어나려고 했다. 곁에 앉아있던 시안이 제지하지만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너 말고, 선배님.”
대체 왜 그러나 의아한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손끝으로 저 편에 있는 레니를 가리켰다.
“아, 레니 씨 상대였어요? 훈련을 도와주겠다기에 저라고만 생각했는데.”
“전에 내가 권능을 안 가진 사람끼리도 대련을 해야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한 적 있지? 반대로 권능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간간히 붙어줘야 하는 거야.”
확실히 그렇겠다 싶어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곰을 맨손으로 이길 수 있는 레니라면 어지간한 대련 정도론 훈련이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 기억을 되짚어보니 자신을 가르칠 때를 빼면 애초에 그녀가 대련하는 모습 자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잠깐. 그러면 마치 씨가 레니 씨만큼 강하다는 소리에요?”
“보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녀의 말에 시선을 옮기면 마치는 제자리에서 콩콩 뛰고 있을 뿐이었다. 레니 역시도 아직 가볍게 어깨를 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위치가 변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쾅, 하고 무언가터져나가는 소리가 연달아서 울려퍼졌다.
‘…판타지인 줄 알았는데 무협이었나?’
순식간에 서로에게 달려드는가 싶더니 훌쩍 뛰어올라 거리를 벌리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차마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크게 치고받으면서 공중에 붕붕 뛰는 것이 마치 과장스러운 무술영화라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레니 씨가 왜 무기도 안 들고 다니시나 싶었는데 애초에 필요가 없었던 거였네요.”
“뭐, 어지간해선 필요 없다는 말도 맞긴 하지만… 딱히 무기를 안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그래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요.”
콜린은 하다못해 그녀가 단검 한 자루라도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투명한 칼집을 차고 있거든.”
“와, 그거 엄청 비쌀 거 같은데요.”
“나도 값은 몰라. 영주님이 내려준 아이템이라고 들었는데.”
권능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사람에게만 깃드는 게 아니다. 그도 당연한 일인 것이, 체셔의 이야기에 따르면 옛 신화 속 존재들은 사실 대부분 권능의 힘을 가진 실존인물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설 속 무기들에 대한 기록은 권능을 가진 사물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콜린이 가지고 있는 그 요상한 검은 책도 그러한 아이템의 일종일지 모른다.
“……저기, 콜린.”
“안 돼요. 보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와중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손길을 알아채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안의 손목을 붙잡아 살며시 밀어내었다.
“다음에 상황이 되면 그때. 알겠죠?”
“…….”
영 불만스러운 표정인 시안이었으나 결국에는 납득해주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안이 잔뜩실망하고 있음은 굳이 분석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콜린은 그녀를 무시한 채 시선을 돌렸다.
아무렴 부르기만 하면 바지를 내리는 창기 취급을 하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콜린은 자기 쪽에서 주도권을 잡고 싶어하는 타입이었다.
이내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뒤뜰에서는 토끼와 기사가 맞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퍼질 뿐이었다.
×
째깍.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어쩌면 바늘이 아니라 그 속의 태엽 소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나라고 하는 여자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확신할 정도로 기계장치에 그다지 익숙한 인간이 아니었다. 저렇게 초 단위로 정교하게 조절된 장치라면 더더욱.
아무튼 확실한 것은 그녀가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고, 침을 삼키며 흘러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콜린. 왔구나?”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해주었다.
총총 걸어오는 발걸음. 그리고 조금은 땀에 젖은 콜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누나.”
“수고했어.”
그는 소파에 앉아있던 한나에게 다가오더니 그 품에 포옥 안긴다. 한나 역시 그 등허리를 끌어안으며 콜린을 받아들였다.
콜린의 목덜미에 얼굴을 살짝 파묻고서 몰래 그 냄새를 맡는다. 땀과 체취, 페로몬이 뒤섞인 향이 후각을 자극해왔다.
심장이 뛰었다. 아니, 이미 그를 끌어안기 전부터 심장은 이랬다. 마치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한참 전부터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콜린이 길드전을 위한 훈련을 시작한 이후, 어느샌가 귀가 후의 포옹은 남매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 탓에 한나는 최근 들어 항상 콜린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그를 기다리곤 했다.
물론 순전히 동생의 아양을 받아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었다. 한나라는 여자는 결코 그런 순수한 마음을 품을 정도로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추악한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 이유의 대부분은 끓어오르는 정욕 때문이었다.
사실 한나는 이미 그를 단순한 가족으로 보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마 콜린이 동굴에서 빠져나온 직후의 일일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정말 사람이 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변했다.
그러나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한나는 지금의 콜린이훨씬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과감한 스킨십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의 틱틱대던 성격과 대조적인 상냥함에 한나는어느새 빠져있던 것이다.
물론 콜린도 어릴 때는 이와 비슷한 성격이었고, 그녀의 태도 탓에 비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아무렴 자신의 몸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누나를 어떻게 살갑게 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무튼 한나는 이러한 생각─냉정하게 평가하자면 꽤나 자기중심적인─에 빠져 있었고, 거기에 최근 늘어난 스킨십이 더해지니 그녀의 무의식은 점차 그를 평소의 가족과는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이런 시커먼 감정을 품는 상대가 친족이라는, 최소한의 억제마저 차츰 깨져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도 잘 하고 왔어?”
애정과 욕정을 가득 담아 콜린을 끌어안은 채 한나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저 동생과 포옹하고 이야기를 나눌 뿐인데 알 수 없는 배덕감이 가슴께를 콕콕 찔러왔다.
“아, 오른팔이 아픈 것만 빼면 괜찮은 거 같아.”
“어디 다쳤어?”
“아니, 근육이 좀 놀랐나봐.”
배시시 웃으며 그리 말해오는 콜린이었다. 한나는 그 미소를보고 당장이라도 입술을 탐하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팔 구부리는 게 힘들더라.”
“그, 그래?”
“그래서 내일모레까지는 훈련 쉬기로 했어.”
그러던 중 한나는 무심코 스쳐지나간 생각을 무심코 내뱉었다.
“저… 콜린. 곧 씻을 거지?”
“응. 땀 흘렸으니까 당연히.”
“혹시 팔이 그러면 혼자서는 힘들지… 않을까?”
그것은 반쯤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그러나 한 번 계기가 생기자 그녀의 욕망은 봇물 터지듯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에 힘들면,그, 내가 씻겨주는 것도… 그러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인 거 같은데.”
아주 약간이나마 작동한 이성이 발언을 머뭇거리게 했다. 자신이 한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인지 그녀도 몹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머릿속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만약 지금의콜린이라면, 어쩌면…….
“응.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한 한나의 귀에 이내 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녀가 품은 이상한 생각이라곤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만 같은 순박하고 밝은 목소리였다.
“괘, 괜찮을까?!”
“누나가 꺼낸이야기잖아?”
“응, 그, 그렇지. 그래. 내가 꺼낸 이야기지…….”
다만 오히려 한나 쪽이 깜짝 놀란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내 헤실헤실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다.
설령 그녀가기대를 하고 있었다 한들 그 감정마저 완전히 억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 자기 생각을 숨기지못하는 한나라고 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그런데 누나는 이미 씻었던거 아냐?”
“아, 아니야. 나도 방금 와서 아직 안 씻었거든. 때마침 잘 됐네!”
‘거짓말 진짜 못하네.’
뻣뻣하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동작을 바라보며 콜린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욕망이 완전히 얼굴에 드러나고 있는 한나였다. 콧김을 흥흥 내뿜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그렇고 바로 이렇게 나올 줄이야.’
당연하지만 팔이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었다.훈련을 받다보니 조금 뻐근할 때는 자주 있긴 해도, 며칠 쉬어야 할 일이 생기기엔 훈련 강도가 결코 높지 않았다.
본래는 슬슬 며칠간 집에서 한나와 시간을 보내며 그녀를 완전히 함락시킬 생각으로 꺼낸 말이었다. 팔이 아프다는 핑계로 간간히 수발을 들어주길 부탁하며 스킨십을 늘려나갈 계획이었다.
예전부터 동생에게 욕구를 품어오던 한나였다. 그런 식으로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단숨에 자제력이 바닥나 콜린을 요구해올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설마 부상 이야기를 꺼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그녀 쪽에서 행동을 취하리라곤 차마 생각지 못했다. 대체 얼마나 충동적인 욕구의 화신이란 말인가.
물론 굳이 따지자면 콜린 입장에서는 아주 기쁜 오산이 아닐 수 없었다.
“누나,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갈아입을 옷 좀 챙겨와줄래?”
“아, 응. 알았어!”
어찌나 기쁜지 잽싸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콜린은 무심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잽싸다는 것도 그녀를 배려한 표현이었고 헐레벌떡 조급한 움직임이었다는 게 더욱 적확할 터였다.
그녀를 내버려둔 채 콜린은 욕실로 향했다.
‘자, 그럼 이 변태를 어떻게 구워삶는담?’
발걸음을 옮기며 소년은 그런 행복한 고민을 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