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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14 아라크노포비아(2) (14/89)



〈 14화 〉14 아라크노포비아(2)

콜린은 숲을 걷고 있었다. 왼팔로는 검은 책을 끌어안듯이 들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굽은 한손검이 들려있었다.

다만 숲이라 해도 울창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나무가 간간히 자라있는 모습은 오히려 듬성듬성하다고 해야 알맞을 정도였다.

그런 소년의 곁에는 은발의 여성이 있었다. 시안이라는 이름의 그녀 역시 한손에 검을 쥔 상태였다.

“생각보다 사람이 안 보이네요.”
“의외로 경기장이 넓으니까 말이야.”

주위를 경계하듯 둘러보다가 콜린은 입을 열었다. 시안은 그에게 시선을 흘끗 보낸 뒤 대답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치 홀로그램처럼 거대한 스크린이 떠있었다. 그 중앙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타이머였다.

남은 시간은 55분 정도. 즉, 게임을 시작하고 5분 정도 지난 셈이었다.

[부점(Boojum) / 아라크네(Αράχνη)]

그리고 그 양옆에는 길드의 이름과 함께 참가자들의 명단이 적혀있고, 생존한 참가자들의 점수 총합이 계산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우리 길드 이름이 부점이었나.’

덧붙여 콜린이 길드의 이름을 알게  것은 아주 조금 전의 일이었다. 애초에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질 않았으니 당연한 노릇일지도 모른다.

“……?”

어쩐지 아이러니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 저 멀리서 와장창 하고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방향인가 확인해보니 아군의 보옥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무슨 일인 걸까요?”
“그 마차 멍청이가 곧장 우리 선배한테 돌진했다가 묵사발이 났다는 데 은화  냥.”
“아, 저도 거기 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그렇다면야 별 일은 아니겠지 싶어 콜린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정말로 찍히고 있는 건가요?”
“아마 그럴 걸?”

듣기로는 길드전 장면이 촬영된다고 했다. 그것도 생방송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조금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전략 같은 건 없단 말이지.”

그냥 돌아다니다가 상대를 마주치면 싸운다. 정말로 단순명료하다고 할까, 무식하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어차피 상대편도 비슷할 테지. 방송까지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소규모 교전이 제일 재밌으니까.”
“그런가요?”

솔직히 말해서 콜린은 이쪽 감성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곳은 단순히 본래 세계를 기준으로 남녀의 가치관만 역전된 게 아니었다.

원더랜드에는 그들 나름의 역사가 있고,생활이 있었다. 애초에 권능이라는 초자연적 요소가 있는데 서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긴 쉽지 않다.

그나마 콜린의 기억 가운데서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아마도 일기토나 결투를 구경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해도 약간의 차이는 있기에 역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콜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자니 시안이 그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면 두 명의 여성이 수풀 너머에 있었다.

어깨에 차고 있는 검은색 완장은 아라크네 길드 소속임을 알리는 표식이었다. 요컨대 적군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서 콜린은 칼을 거머쥐었다.

저쪽에서도 비슷한 타이밍에 상대를 파악한 것인지 칼끝을 겨눈 채 천천히 다가왔다.

“시안 씨. 혹시 저기서 아는 사람있어요?”
“둘 다. 근데 얼굴만 아는 정도야.”
“어느 쪽이 좀  강한데요?”
“우리가 보는 방향 기준으로 왼쪽.”
“그러면 제가 오른쪽이네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과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댄 채 점차 거리를 좁혀간다.

그러나 이내 댄스 상대를 바꾸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여 또 다른 2인조를 이룬다. 이번에는 서로를 노려보고 검을 맞대는 두 사람이었다.

널찍한 공간에서  개의 일대일 승부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응, 그래.”

콜린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짧게 친 여성이었다. 그가 살짝 웃으며 인사하자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였다.

“좀 봐주시면 좋겠는데요.”
“노력해볼게.”

콜린은 숨을 한 번 들이키고서 말을 이었다. 상대 여성은 꽤 여유로운 투였다. 비록 완장에 새겨진 문양은두 사람  같은 2점짜리 폰이었지만, 콜린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상대와의 격차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고작  달 정도를 훈련했을 뿐인 콜린은 아마  게임에서 가장 약한 사람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기왕 참가하기로 했으면 탈락하더라도 전력을 다한 뒤에 탈락해야지 않을까.

콜린은  걸음 앞으로 나서며 검을 가로로 휘둘렀다. 탁. 훈련용 검들이 맞부딪히며 소리를 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승산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

그나마 그의 승산을 점치자면 세 가지 정도였다.

“칼을 처음 쓰는 건 아닌가봐?”
“한  정도 연습했어요. 당신은요?”
“병사가 된 지는 아직 1년이 덜 됐지.”

‘아무렴 나보단 오래 훈련했겠지.’

─하나. 콜린은 사실상 민간인에다가 남자이기에 상대가 방심하기 좋다는 점.

다만 이건 그만큼의 실력차가 벌어지게 되므로 결과적으론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번엔 그녀 쪽에서 내리그었고 콜린은 검을 눕혀 막아내었다. 다시금 콜린의 일격.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막힌다.

“…그건 좀 번거롭네. 아, 이건 칭찬이야.”
“칭찬 고마워요.”

다시 내질러진 그녀의 검을 막아낸 것은 시커먼 책이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던 그것은 콜린의 손짓을 따라 움직여선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둘. 나름 훌륭한 방패의 존재.

서로의 실력차를 그나마 메우고 있는 게 바로 이것이었다. 일대일 전투에 있어서 방패의 유무는   메리트를 지닌다.

‘이 사람이 적응하기 전에 슬슬 끝내야 하는데…….’

그렇게 아주 잠깐 공방을 주고받으며 콜린은 생각에 잠겼다. 노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기회였다.

‘…지금이다.’

상대의 위쪽 방어에 약간의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콜린은 입꼬리를 올렸다. 검을 빙글 돌려 그녀의 목을 내려친다.

그러나 그녀는 콜린보다 훨씬 싸움에 능통한 사람이다. 잽싸게 칼을 들어 방어의 빈틈을 막아낸다.

“…어?”

탁. 콜린의 검이 그녀의 허리를 베고 넘어간다. 물론 진검이 아니기에 실제로는 그저 갖다대고 그었을 뿐이었다.

눈앞의 여성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그녀를 콜린은 멋쩍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아니, 그, 미안해요.”

곁에서 지켜보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확했다.

콜린이 위에서 검을 내려치다가 갑자기 궤도를 바꿔 그녀의 허리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만약 그의 손에 들린 게 진검이었다면 불가능한 테크닉이었기 때문이다.

훈련용 검의 무게가 아니라면 이토록 자유롭게검의 궤도를 바꿀 수는 없다. 콜린이 조금 전 사과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아니. 이건 내가 방심했던 거잖아?”
“그래도…….”
“저거 봐. 심판도 내가 죽었다고 인정했는걸.”

그렇지만 상대는 피식 웃으며 콜린의 공격을 인정해주었다. 뒤이어 그녀가 가리킨 하늘을 보면 그녀의 이름에 탈락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 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는가 묻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콜린보다 숙련도가 높기 때문이었다.

본래 가검은 훈련의 안전을 위해 진검 대용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가검을 쓸 때도 진검을 다루듯이 휘둘러야 한다.

솔직히 말해 콜린의 자세는 이른바 교정이 필요한 나쁜 자세였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진검 사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당장 버려야 하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콜린은 병사로서 훈련받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가검만을 쓰는 이번 한 번의 게임을 위하여 연습했다.

그렇기에 쓸 수 있는 잔기술. 이것이 콜린이 승기를 거머쥘  있는  번째 요소였다.

사실 그나마도 상대의 실력이 조금 더 높았거나 낮았더라면 제대로 통하지 않았으리라.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어.”

이런 무효라는 소리는 전혀 하지 않은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콜린은  손을 맞잡아 악수를 하며 고개를 살포시 숙였다.

그리고서 흘끔 곁을 바라보니 시안 쪽도 끝이 난 모양이었다. 콜린과 눈을 마주치더니 엄지를 척 치켜드는 시안이었다.

“휴우… 어떻게든 잘   같아서 다행이네요.”

잠시 시간이 지나고, 아라크네 길드의 두 사람은 탈락자라는 표시로 자신들의 완장을 떼어낸  떠나갔다. 그제야 콜린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5분 만에 탈락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나저나 그게 통하는구나.”
“저도 실전에서 쓸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요.”

시안은 물론 콜린과 자주 대련을 해주던 사람이었으니 이런 전략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이렇게까지 해도 번번이 막히곤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상대가 뭐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글쎄요. 그런 생각은 안 해뒀는데.”

만약 이게 반칙이라며 주장해온다면 어쩌겠냐는 질문에 콜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규칙상 문제는 없잖아요. 물론 항의를 해오면 심판 재량껏 판단한다는 부분이 있으니 불확실하지만…….”

이내 그는 손끝으로 스스로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그것도 숙련도도 낮은 사람을 상대로 ‘이건 무효다!’라고 하면 조금 추하지 않나요?”

어지간히 승리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니라면야 함부로 그런 짓은 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오히려 ‘방심했다’라든가 ‘허를 찔렸다’라며 상대의 기지를 칭찬해주는 쪽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유감스럽게도, 약자의 기책은 비겁한 게 아니거든요.”

만약 시안이 이런 잔재주를 썼다가는곧바로 비겁하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만 콜린 정도로 실력차가 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말을 듣더니 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거였어?”
“뭐, 사실 어디까지 통할지는 반쯤 도박이었지만요.”

설령 상대 쪽에서 항의가 들어온다고 하면 사과하고 얌전히 물러나면 될 일이었다. 실제 전장이었다면 몰라도 이건 친선전이니까 탈락의 페널티도 없다.

“자, 아무튼 다시 움직일까요?”

소년은 그저 웃으며 그리 말할 뿐이었다.

×


“…….”

세상만사 모든 일을 예상할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똘똘한 콜린이라 하여도 당혹감이라는 감정을 느낄 일은 자주 있기 마련이었다.

‘왜 그리 마치 씨가 신나 보이나 했더니…….’

아무렴 이 꼴을 누가 예상할 수 있으랴.

“흐윽… 앗, 으…♥”
“여기죠? 여기가 좋은 거죠?”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마치가 아라크네 길드 소속의 어떤 여자를 바닥에 눕히고 범하는 모습이었다.

“저… 시안 씨. 저래도 되는 거예요…?”
“…일단 규칙으로 문제는 없지.”

어이가 없어서 그리 묻자 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선 아마 토끼는 상습범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여차하면 항복할 수도 있는데 왜… 아, 설마.’

아무리 그 레니와 대등하게 맞붙을 수 있는 마치라 하여도 말 한 마디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지 않던가.

그 모습을 살펴보다가 콜린은 무언가를 깨닫고 흘끔 시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저거 서로 합의된 건가요?”
“저 여자 완장에 작게 빨간색으로 표시된  보이지?”

요컨대 저건 마치가 그녀를 덮쳐도 된다는 표식이라는 소리를 하려는 것일 테다.

“…마치 씨한테 붙잡혀서 범해지는 영상이수요가 있다더라.”
“그런가요.”
“저쪽  입장에서도 누가 희생해서 마치 씨 같은 실력자를 묶어둘 수 있다면 이득이라는  같고.”

시안의 말투에서 정말로 세상이 왜 이 꼴인지 의심하고 있는 듯한분위기가 풍겨왔다.

‘그러니까 시안 씨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경기 중에 남자랑 남자가… 음.’

시안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얼른 자리를 뜨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 변태 토끼 아래에 깔려있는 여자가 자기도 좋아서 저러는 건지, 아니면 돈이라도 받고 저러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결과적으로는 합의된 관계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들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럼 얼른 다른 곳으로 이동하죠.”
“그래… 그게 좋겠다.”

괜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콜린과 시안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마치가 있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도착해서야 두 사람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직도 얼굴이 조금 화끈한지 물을 들이키는 시안이었다.

콜린 역시 목이 말라오는 차에 물병을 집어들었다가 잠시 멈칫했다.

“혹시 물도 좀 그럴싸하게 마시는 게 좋을까요?”
“응?”
“마시다가 조금씩 목덜미를 타고 흐르도록.”

생각해보면 일단 서비스신 담당으로 불려온 콜린이었다. 활약하는 것도 좋지만  받은 만큼은 일해야지 않겠는가.

“그러다 옷이 젖으면 한 장 정도 벗을 수도 있고요.”
“…그, 글쎄?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사실 도중에 한꺼풀 정도 벗는 걸 전제로 얇은 옷 두 겹을 입고 온 콜린이었다.

그 말에 시안은 이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흡사 그다지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실제로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게 명백해보였다.

“음, 시안 씨 반응을 보니까 그렇게까지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 같네요.”
“아니, 그, 그러니까…!”
“농담이에요. 저도 목마르면 물은 마셔야죠.”

콜린의 말에 당황하는 표정을 지은 시안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콜린은 쿡쿡 웃었다.

이 상황에서 정말 아무것도  하고 넘어갔더라면 시안이 시청자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을  뻔했다.

이내 콜린은 물통 뚜껑을 열고 입가로 가져갔다.

“……쿨럭?!”

신체에 충격이 내달린 탓에 사레가 들린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어, 어…?!”

뇌가 상황을 인식했을 때 그는 이미 달리는 이륜마차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마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은 물론 안젤리나였다.

‘신데렐라라며?! 호박 마차는…?!’

아니, 마차라기보다 고대의 전차, 병거 내지는 채리엇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디자인이었다. 마차에는 두 마리 해골마가 매여 달리고 있었다.

너무 느닷없는 상황이었기에 순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는 납치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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