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16 아라크노포비아(4)
‘안젤리나 그 녀석은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건가?’
하늘에 떠오른 점수판을 보며 아라크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부점 길드의 탈락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범인은 뻔했다.
저쪽 길드의 콜린이라는 소년과 이긴 쪽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계약을 한 뒤부터 안젤리나는 마구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아라크네는 그녀라면 100% 소원으로 그와의 하룻밤을 빌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나쁠 거 없다. 싸움에서 승리하고 아름다운 남자를 손에 넣는 건 뭇 여성의 로망이 아닌가.
…그 계약이란 게 반쯤 억지로 이뤄진 거였고, 안젤리나가 취하겠다는 소년도 나름 저쪽 길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아무튼 안젤리나의 실력은 우수했다. 그만한 실력이 없었더라면 아라크네도 그녀의 인성을 고쳐쓰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그냥 내쫓았으리라.
자기 동료들이 활약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였던 소년은 아마 급변하는 상황에 몹시도 당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라크네는 그리 중얼거리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너무 무모하지 않았니?”
뒤이어 그녀는 시선을 옮겼다. 아라크네의 시야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적발의 남자와 은발의 여자. 한쪽은 조금 전 말했던 계약의 당사자 콜린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안이라는 이름의 병사였다.
다만 둘 모두 자기 발로 서있는 건 아니었고, 아라크네가 조종한 실에 묶여 매달린 상태였다.
그렇게 승리를 확신하던 소년이었으니 아군이 쓸려나갈 때는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이 정도까지 차이가 벌어지면 부점 길드가 역전승을 거머쥐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기기 위해선 다른 승리조건을 노려야 했고, 그게 바로 아라크네가 지키는 보옥이었다. 소년은 이젠 정말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병사 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아라크네에게 덤벼든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가 바로 이것. 너무나 당연한 전개였다.
함께 붙잡힌 은발의 병사도 ‘역시나’라고 중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녀는 콜린의 재촉에 불가능한 계획이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왔으리라.
두 사람의 무기를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서 아라크네는 또다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콜린. 그래도 최소한 안젤리나가 문란한 소원은 안 빌도록 어떻게든 해줄게.”
“…그렇게 말하시는 거 치고는 저만 묶는 방법이 은근히 야하지 않나요?”
“시청자들 눈호강은 시켜줘야지.”
아라크네는 소년의 불평에 쿡쿡 웃으며 답했다. 이 친선전은 제후가 소유한 아이템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물론 시청 가능한 건 일부 사람들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름 후원자들도 존재하니만큼 아라크네에게는 최소한의 보기 좋은 방송을 만들 의무가 있었다.
“그러게 내가 기회를 줄 때 계약을 파기하라고 했잖니.”
물론 전부 그것 때문은 아니었고 괘씸한 그를 약간 벌해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저 소년이 괜한 자존심을 부리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사족을 잘라내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걸로 두 개의 승리조건이 모두 막힌 셈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안젤리나가 날뛰기 시작한 순간부터 소년에게 기회는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보옥만 깨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사실 몇 번이고 반복된 이 게임에서 보옥이 파괴된 적은 없었다.
얼핏 보면 각 길드에서 한 명만 지킬 수 있는 보옥은 아주 탐스러운 먹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걸 지키는 사람이 레니 테세오와 아라크네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혼자서 나머지 사람들과 전부 맞상대가 가능할 정도인 괴력의 레니는 물론이고, 아라크네 역시 보옥 근처에 트랩을 잔뜩 깔아놓을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였다. 그야말로 뚫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저쪽 진영에서 전원이 몰려든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그러면 이쪽 길드원이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분명 콜린은 아라크네가그저 막연히 강하다는 소리만 듣고 양쪽에서 기습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직접 항복할래? 아니면 내가 탈락시켜줄…….”
하지만 그 직후 콜린이 보인 움직임에 아라크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콜린의 손에서 검이 나타나더니 그를 묶고 있던 실을 순식간에 잘라낸 탓이었다.
탁. 공중에 매달려있던 그의 발이 땅에 닿는다.
그리고 몸을 거의 던지듯이 보옥을 향해 내달렸다.
“……윽.”
"미안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그러나 그는 겨우 몇 미터만을 나아갔을 뿐이었다. 다시금 아라크네는 실을 뻗어 콜린을 묶었다.
분명 훌륭한 기습이었고, 실제로 아라크네는 크게 당황했다.
허나 두 사람의 실력차는 겨우 그 정도 기습으로 메울 수 있는게 아니었다. 아라크네의 반사신경은 그가 보옥까지의 거리를 절반도 채 좁히기 전에 모든 상황을 정리해내고야 말았다.
“방금 그건 정말로 놀랐어.”
“…칭찬 고맙습니다.”
“너희 보옥 쪽으로 걸어가던 것까진 확인했는데, 레니한테서 그걸 받아오는 게 목적이었구나?”
에훗의 검.레니 테세오가 들고 다니는 무기로 칼집에서 뽑을 때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템이었다.
게임의 규칙상 규격에 맞는 가검으로 격자(擊刺)해야만 상대를 탈락시킬 수 있기에 아라크네도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규칙은 반대로 말해 상대를 공격할 때가 아니면, 즉 아라크네의 실을 끊어낼 때는 진검을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레니 씨한테 가는 걸 확인했다고요?”
“그래. 내가 실을 여기만 깔아뒀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경기장 모든 곳에 제압용 트랩을 배치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지만, 대략적으로 누가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는지 파악하는 정도라면 가능했다.
“그런 것까지 가능하다니… 너무 사기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름대로 길드장을 하고 있잖니.”
미간을 찌푸리는 소년의 모습에 아라크네는 다시금 웃었다. 확실히 귀여운 아이였다. 안젤리나가 눈독을 들이는 것도 영 이해가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대화를 이어나가며 아라크네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가검을 다시 들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항복하는 것보다는 역시 내가 직접 탈락시켜주는 게 구도가 좋겠지?”
“음… 그 편이 조금 더 멋있을 것 같네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콜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체념한 표정을 흘끗 보고서 아라크네는 우선 시안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곤 가죽으로 덮인 가검을 그녀의 목에 대었다.
“…….”
시안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혈관 바로 위쪽이었으니, 이걸 살짝 긋기만 하면 이 은발의 병사는 사망 판정을 받고 탈락하리라.
“자, 그럼…….”
그래도 나름 좋은 장면이 촬영되었으리라, 아라크네는 속으로 웃었다.
사실 여태껏 그녀가 지키는 보옥을 노리러 온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성공하지 못할 걸 알기에 일찌감치 보옥 파괴 승리는 없는 셈 치고 넘긴 것이리라. 아라크네 길드도 레니의 존재 때문에 같은 전략을 내세웠으니 말이다.
이따금씩은 이렇게 조금 바보 같고 무모한 돌격이라도 있어주는 편이 재밌는 방송이 될 것이다.
아라크네는 손에 힘을 주었다.
“……?”
그러나 이내 칼을 긋지 않고 그대로 멈추었다. 자신을 탈락시키려다 멈추자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뭔가 이상했다.
아라크네는 갑자기 위화감을 느끼고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실패했다며 체념의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패배했다며 굴욕적인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자조적인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방금 시안이 했던 것처럼 긴장한 표정을 지을 이유는 없었다.
가검으로 목을 긋는다고 죽을 리도 없다. 애초에 다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장할 이유가 존재한다면 오직 하나. 아직 노림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두 사람 다 빈손이야.’
누가 접근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제3자가 개입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무언가 수작을 부리기에는 꽁꽁 묶인 두사람이었다. 조금 전엔 남자이기도 해서 콜린을 약하게 묶어두었지만 이번에는 그도 시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팔이 약간 자유롭다 해도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두 사람 모두 아무것도 들고 있질 않은데 말이다.
투명한 에훗의 검도 빼앗았으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무기든 아이템이든 그 무엇도…….
“……!”
아라크네는 무언가를 깨닫고 깜짝 놀라 시안의 목을 그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윽!”
그녀의 손짓에 따라 콜린을 묶고 있던 실이 움직여 그를 옆으로 멀리 이동시켰다. 갑자기 몸이 흔들린 탓인지 콜린은 신음성을 흘렸다.
“하아…….”
그제야 아라크네는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콜린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건가요?”
“미안해. 내가 널 너무 얕봤던 모양이야.”
콜린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글쎄요. 무슨 소리를…….”
“책. 네가 들고 있었던 검은 책은 어디 갔지?”
“…….”
이내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감돈다.
두 사람은 빈손이었다. 하지만 콜린은 빈손이어선 안 된다.
그에게는 분명 검은 책 형태의 아이템이 있었을 터였다.
“레니의 검을 받아오면서, 너는 그 책을 넘겼을 거야.”
“음… 뭐, 들고 다니기엔 좀 무거워서 말이죠.”
“그리고 레니가 그걸 여기로 던져서 보옥을 깨트릴 작정인 거겠지.”
그 레니 테세오의 괴력이라면 그 정도의 물건을 여기까지 던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에이,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거리는 둘째 치고 조준이…….”
“그 아이템은 너에게 돌아오는 기능이 있잖니?”
그녀가 말하자 콜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안젤리나가 너를 잡아왔을 때, 그 순간에 책이 돌아오는 모습을 봤으니까.”
“…그때였나요.”
그리고 아라크네는 확신했다. 그의 이 질문이야말로 그녀의 가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뭔가 위화감이 있었는데 그것도 방금 확신이 들었어. 일부러 붙잡힌 뒤 투명한 검으로 기습을 노린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 나도 실제로 꽤 당황했어.”
아라크네는 콜린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살포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게 계획의 전부였다면 조금이라도 더 실력이 뛰어난 저 여자가 맡는 게 맞아. 물론 그래도 99% 실패하긴 했겠지만.”
콜린은 다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처음부터 보옥을 노렸던 게 아냐.너와 보옥, 그리고레니 테세오가 일렬로 위치한 곳. 즉, 네 책이 날아오면서 보옥을 부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하는 게 목표였던거지.”
조건만 갖춰진다면 그건 말 그대로 유도 미사일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저 소년은 아라크네가 계약을 파기하라고 설득할 때부터 이미 이걸 계획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던 모습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라크네는 콜린에게 만용을 부리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름 좋은 장면이 촬영되었다니? 이만큼 계획을 짜서 그녀에게 도전했는데, 고작 그 정도로 평가로는 부족하지 않겠는가.
만일 성공했다면 최고의 명장면이었을 테니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 아이템의 효과만 몰랐더라면 승패는 뒤바뀌었으리라.
모른 척 순순히 당해준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역시 아라크네의 취향에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있잖아요. 당신이 저를 여기로 이동시킬 것까지 계산한 거라면요?”
“글쎄. 그렇게 자신이 있으면 내기라도 해보겠니?”
“…음, 아뇨.”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계산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인간의 영역이 아니니까 말이다.
“하하… 졌어요. 항복할게요.”
그리고 이내 콜린은 멋쩍게 웃더니 항복을 선언했다.
그의 완장에 새겨진 문양은 고작 2점짜리 폰. 하지만 아마 이 게임에서 최고로 과소평가된 2점일 것이라고 아라크네는 생각했다. 여태껏 그녀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녀를 이만큼이나 위기로 몰아갔던 사람이 있었던가?
아라크네는 미소를 지으며 저 멋진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입을 열었다.
“수고했…….”
쨍그랑. 뒤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해가 상황을 따라가질 못했다. 그것은 분명히 보옥이 깨지는 소리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설령 콜린의 말대로 그를 강제로 이동시키는 것까지 계산의 일부였다고 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항복을 선언한 이상 게임에는 개입할 수 없고, 당연히 그가 조종한 책으로 보옥을 깰 수도 없었다.
삐그덕. 아라크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어때. 방금 건 조금 멋있었어?”
그 자리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 보랏빛 고양이가 있었다. 정장을 입은 그 익살스러운 고양이가.
그의 그런 당당한 모습을 보고서 콜린은 피식 웃었다. 콜린은 저벅저벅 걸어가 주저앉은 체셔를 일으켜주었다. 아라크네가 항복한그를 풀어주려고 하던 차였기에 구속은 이미 헐렁한 상태였다.
뒤이어 아라크네를 돌아본다.
“──이러면 저희가 이긴 거 맞죠?”
산산이 부서진 보옥이 햇빛을 여기저기로 반사시켰다. 킹의 문양이 그려진 아라크네의 흑색 완장은 허망하게 바람에 펄럭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아라크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이마를 짚는 그녀였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자비는 베풀 수 없으니까 계약을 파기하라니. 아라크네는 할 수만 있다면 그 부끄러운 말을 주워담고 싶었다.
봐주긴 누가 봐준단 말인가. 그녀는 자만하고 있다가 된통 당한 셈이었다.
아라크네는 보옥을 깨트린 체셔의 모습을 보자마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라크네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친 게 있을 뿐이었다.
레니가 던진 책에는 체셔 캣이 매달려있던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레니라도 사람만한 저 고양이를 여기까지 집어던질 힘은 없다.
그러나 체셔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는 권능의 소유자고, 또한 그 속도를 조절해 신체의 일부만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책을던질 때에는 손 정도만 드러낸 뒤 매달려 있다가 던져진 이후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면 된다. 그 정도라면 레니가 충분히 던질 수 있고, 손에도 감각은 있으니 체셔도 던져지는 타이밍을 파악할 수 있다.
이걸로 한 사람을 아라크네의 감시 바깥─당연하게도 하늘에는 실을 걸어둘 수 없으니까─에서 투하할 수 있는 것이다.
체셔는 아군 측의 보옥 구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레니가 잠깐 구역 바깥에 나와서 그녀를 던져주면 될 일이다.
권능으로 숨은 채 아라크네가 있는 보옥 구역에 들어갈 수 없다? 이건 말할 가치도 없다. 구역 안에 들어오기 전에만 능력을 풀면 될 뿐이었다.
더욱이 마지막에는 일부러 체셔가 뛰어내리기 좋은 타이밍에 항복을 선언해서 방심을 불러일으켰다.
…되짚어보면 콜린이 이곳에 발을 들인 시점에서 사실상 그녀의 완패였다.
“그런데 하나만 묻자.”
아라크네의 표정에는 체념이 묻어나왔다. 여기까지 당하면 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끝까지 사라지질 않아 콜린에게 질문을 했다.
“어째서 그때 네 아이템을 보여준 거야?”
콜린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머리가 돌아가는 소년이었다. 그런 콜린이 그저 허술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책을 보여줬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부러 보여줬다는 말이 되는데, 아라크네 입장에서는 그것 역시 이해되질 않았다. 만약 그 일만 아니었더라면 굳이 체셔까지 동원하지 않고도 보옥을 파괴할수 있었을 것이다.
“보옥이 깨지기도 전에 레니 씨가 뭔가 던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간 곤란하잖아요?”
“아니, 그건 책을 보여준 거랑은 관련이 없잖아.”
가능성은 매우 낮았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보고가 들어왔다면 콜린의 계획에 큰 지장이 생긴다는 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게 어째서 책을 보여줘야만 했던 이유가 된단 말인가.
“만약 당신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면 레니 씨가 던진 물건이 대체 무엇인지 엄청 경계를 하시겠죠. 아마 계속 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 길드장님을 발견했을지도 몰라요.”
콜린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게 책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길드장님은 오히려자기 가설에 확신을 갖고 방심할 거라 생각했어요.”
“…네가 다른 길드 소속이라는 게 정말 아쉬워. 이제라도 전향할 생각은 없어?”
어떤 수단으로든 아라크네에게 레니의 행동이 전달된다. 그 미약한 가능성 하나 때문에 그렇게나 밑밥을 깔아뒀단 말인가.
더욱이 방금 그가 한 말은 아라크네가 계획을 어디까지 간파할 수 있는지도 완벽히 예상해둔 상태였다는 말이 된다.
남에게 주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였다.
“글쎄요. 저는 제 길드가 마음에 들어서.”
이름도 저희 길드가 더 멋있잖아요? 콜린은 그렇게 농담하듯 덧붙였다.
물론 아라크네도 그가 자신의 제안을 넙죽 받아먹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해본 말이었기에 쿡쿡 웃으며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빙그르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그녀를 바라보며 콜린은 기지개를 켰다. 목을 살짝 꺾자 뚜둑 하고 소리가 났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문자는 부점 길드의 승리를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