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17 아라크노포비아(5)
편평한 바위에 한 사람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머리칼은 연한 갈색이었지만, 변태로 소문난 마치라는 토끼에 비하면 조금 진했다.
그녀, 안젤리나는 입을 다물고 눈앞의 소년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콜린. 조금 전의 게임을 승리로 이끌고 또한 그녀와의 내기에서도 승리한 사내였다.
“의외로 침착하시네요.”
“날뛴다고 승패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그녀의 차분한 반응은 콜린에겐 조금 의외였다. 그야말로 철이 없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던 안젤리나였다. 그러니 콜린은 그녀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뭐, 계약까지 된 이상 본인이 인정하지 않아도 소용없지만.’
그래도 조금 정도는 분한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했다. 설마 이 정도로 얌전하게 나올 줄이야 누가알았겠는가.
물론 안젤리나도 갑자기 개심해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결코 무시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내기는 결코 우연히 승부가 난 게 아니었다. 약간의 격차로 아슬아슬하게 승패가 갈린 것도 아니었다.
안젤리나가 신나서 점수를 벌고 있던 동안, 콜린은 당당히 보옥을 깨트리고 완승을 거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 길드장, 아라크네를 돌파했다는 의미였다.
물론 정면승부로 그녀를 이긴 게 아니라는 건 안젤리나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아라크네 본인에게 콜린이 어떤 계책을 썼는지 전해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투력에서 차이가 있는 상대를 계략으로 꺾는 것 역시 실력이었다.
하다못해 단순히 비겁한 수를 쓴 것이면 모를까, 아라크네가 콜린의 행적을 말해줄 때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정말로 두뇌싸움에서 패배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었다.
“그… 함부로 깔봐서 미안했어.”
콜린은 강자였다. 레니 테세오는 그저 뜬소문만 무성할 뿐이라 여겼으나, 이 소년은 자신에게 이렇게 실력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지금 안젤리나가 그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이른바 경외였다. 소년이─이 세계에서는 소녀가─ 으레 멋진 기사님에게 품는, 존경에 가까운 그것이었다.
“아뇨. 사실 이건 아라크네 길드장님이 봐주신 건데요…….”
“그렇지 않아. 우리 길드장님이 얼마나 이 게임에 진심이신데.”
“진심이라는 건 맞다고 생각해요. 다만 게임이 아니라 방송에 말이죠.”
콜린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안젤리나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길드장님이 방송에 신경을 쓰고 계시고, 저는 그 틈을 찔렀을 뿐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안젤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자 콜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길드장님이 제 위치를 이동시켰을 때 제가 말했죠. 어쩌면 이 강제적인 이동도 계산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블러핑 아니었어?”
“네, 그랬죠. 바로 간파당하긴 했지만.”
물론 안젤리나는 그 이야기까지도 전해들었다. 그것을 들으며 저 상황에서도 블러핑을 시도하는 훌륭한 참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는 저를 이동시켜 궤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 완전히 탈락시키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이었잖아요?”
만약 콜린이 탈락했다면 책으로 보옥을 부순다는 결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뿐만 아니라 탈락자인 콜린의 아이템으로 체셔를 이동시켜주는 개입도 금지당했으리라.
“하지만 그래선 안 돼요. 책을 이용한 트릭을 밝혀낼 수 있는 건 길드장님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아라크네는 언제나 이 게임과 그걸 찍는 방송 두 가지를 결부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항상 시청자의 반응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가 이만큼의 트릭을 짜오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탈락해버리면? 저는 그저 무모한 돌격을 했다가 탈락한 바보 A로 보이겠죠. 길드장님이 방송을 살릴 기회를 과연 그냥 넘길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아라크네는 콜린을 제압한 뒤 범인을 몰아세우는 탐정처럼 그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시청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말이다.
다만 실제로 콜린은 완전히 제압당한 게 아니었고, 아라크네는 그 틈을 찔리고야 말았지만.
“방송에 신경 끄고 이기려고만 하셨다면 저 따위는 어림도 없었겠죠.”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정말 한 치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
하지만 이미 반쯤 그의 추종자가 되었던 안젤리나는 그 말을 콜린의 의도와 반대로 받아들였다.
역으로 말하자면 그건 아라크네가 어떤 태도로 전투에 임할 것인지까지 예상했다는 의미지 않는가?
눈앞의 소년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어라. 역효과였나?’
콜린 역시 반짝이는 안젤리나의 시선을 바라보며 그것을 느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분명 그가 생각하기에는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논설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뭐, 아무렴 어때.’
여기까지 말해도 자기를 좋게 봐주겠다는데 거부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콜린은 그냥 별 생각 없이 넘기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원 말인데요.”
그러다가 콜린은 문득 스쳐지나간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일단은 보류로 해둬도 괜찮을까요?”
“…레니 테세오에게 범한 무례를 사과하라고 할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만화 같은 데서 많이 본 것 같은 이야기였다. 동료에게 모욕을 준 상대를 꺾은 뒤 사과하도록 만드는 전개는 꽤 있었다.
“글쎄요.”
그러나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젤리나 씨가 진심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사과를 하러 갈 테니까요.”
‘무슨 철판 도게자를 할 것도 아니고 억지로 시켜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그보다는 가능하다면 소원권을 보류해뒀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그녀를 부르는 게 훨씬 나았다. 일단 오늘 게임의 전개만 봐도 그녀의 우수한 전투력은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래… 그렇구나.”
“길드장님께도 소원은 다음에 빌겠다고 전해주실래요?”
뒤이어 소년은 장난기 어린 미소로 그렇게 말해왔다.
“…응, 그래.”
대체 어째서였을까, 안젤리나는 그 게슴츠레한 눈웃음에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콜린! 이제 슬슬 돌아와!”
아마도 기분탓이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던 와중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니 테세오가 콜린을 부르고 있었다.
“아, 이만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다시 봐요.”
콜린은 살포시 안젤리나의 손을 맞잡았다. 갑자기 그런 행동을 취해오는 탓에 안젤리나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안젤리나 씨.”
“……?!”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등에 한 번 입을 맞추더니 장난스럽게 배시시 웃는다. 귀 근처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콜린은 그녀의 손을 놓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저벅저벅 몇 걸음 가서는 힐끔 돌아보고 손을 살짝 흔들어주었다.
“얼른 와! 마차 출발한다니까!”
안젤리나도 쭈뼛쭈뼛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던 찰나 또다시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그러나 그 순간콜린은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손을 흔들고 있던 자세 그대로 우뚝 멈췄다.
‘그러니까, 그걸 다시 타고 돌아가야 한다고…?’
순식간에 콜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올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엉덩이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오들오들 떨다가 흠칫 고개를 들어 다시 안젤리나를 바라보았다.아주 잠깐이지만 안젤리나는 마치 그의 얼굴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만 느껴졌다.
“안젤리나 씨! 소원! 소원 지금 쓸게요!”
그러더니 콜린은 반쯤 울상이 되어 그녀에게 오도도 달려와선 그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호박마차 좀 태워주세요!”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콜린의 애원하는 모습에 다시금 두근거림을 느끼고야 마는 안젤리나였다.
×
“마차여행이라는 건 이렇게나 좋은 거였군요.”
“그렇지?”
콜린은 방긋 웃으며 곁에 있는 레니에게 말했다.
도시 펠레이라.부점 길드의 영지로, 지금 거리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조금 낙후된 느낌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평균 정도에는 맞춰진 도시였다.
옆 영지의 아라크네 길드와 친선경기를 위하여 도시를 떠났던 것이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들이 다시 펠레이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갈 때는 마차가 익숙지 않아 엉덩이가 비명을 내지르던 콜린이었으나, 올 때는 안젤리나의 마차로 왔기에 주변 풍경을 찬찬히 둘러볼 수가 있었다.
역시 초능력자가 만든 마차는 탑승감부터가 달랐다.
“으, 안젤리나 씨 권능은 진짜 갖고 싶단 말이죠.”
“다음에 내기라도 해서 받아오는 건 어때?”
“어? 그런 것도 가능해요?”
근원적 계약으로 권능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하다는 건 방금 처음 알았다.
“잠깐. 그러면 레니 씨의 권능을 활용할 방법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요.”
“구체적으로는?”
“오늘만 해도레니 씨가 보옥을 지키고 계셨잖아요? 어차피 덤빌 사람은 없을 테니 다른 사람에게권능을 넘겨주는 거죠.”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콜린을 레니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로 내가 알던 콜린이 맞는 걸까?’
길드전 때만 해도 기상천외한 전략을 짜내지 않았던가. 그러나 레니의 기억속에 있는 그는 이 정도로 머리가 좋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그 나이대의 보통 소년으로만 보였는데 말이다.
“그러면 마치 누군가가 레니 씨로 변장하고 보옥을 지키는 것과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거죠. 그리고 레니 씨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 마구 날뛸 수 있는 거예요.”
“좋은 생각이네.”
하지만 이렇게 신난 모습은 분명 콜린의 그것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좋아하는 주제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안 돼.”
“어라, 어째서요?”
“보통 신체와 관련된 권능은 적응하는 데 엄청 걸려. 그리고 내 권능 정도면 어지간한 사람은 몸이 터져나갈 걸?”
“그런가요…….”
이내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콜린이었다. 그 모습에 레니는 살짝 키득대었다.
“그나저나 레니 씨도 피곤하실 텐데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이 시간에 남자 혼자 돌아다니게 둘 수는 없잖아.”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콜린의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딱 하루 멀리 갔다왔을 뿐인데도 벌써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다. 콜린은 기지개로 찌뿌둥한 몸을 풀곤 문을 열었다.
“누나, 나 왔어──.”
하늘은 어둑했으나 시간을생각하면 아직 한나가 자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콜린은 안쪽으로 들어서며 그녀를 불렀다.
안쪽에서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한나가 급히현관으로 나온다.
“콜린!”
그리고는 곧바로 밝은 미소와 함께 콜린을 끌어안더니 입을 맞춰대는 것이었다. 짧게 혀를 섞은 후 그의 허리에 팔을 휘감는다.
“괜찮아? 어디 다치진 않았고?”
“어? 응, 일단은…….”
“그래? 다행이다!”
“아니, 그… 읍.”
이내 콜린의 안부를 묻더니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겹쳐오는 한나였다.
“누나.”
“저기, 조금 근질거려서 그런데 지금 바로…….”
“한나 누나!”
한나는 금세 뺨을 붉히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콜린은 크게 소리치며 그녀를 막아세웠다.
이어서 그는 손가락으로 현관을 가리켰다.
“…아니, 레, 레니. 그게 아니라.”
“아,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응.”
그곳에는 콜린을 바래다주기만 하고 막 돌아가려던 레니가 서있었다. 열린 문 너머로 새어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금발에 부딪혀 사방으로 튀었다.
한나와 레니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양쪽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상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런 걸 보면 두 사람이 괜히 친구 사이가 된 건 아닌 모양이다.
“콜린, 한나. 그, 그럼 이만 가볼게.”
“아, 응, 그래? 자, 잘 들어가…….”
그리고 그런 두 친구는 최악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으나 명백히 차악, 삼악쯤은 되는 선택지를 동시에 선택하고 말았다.
그냥 별 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당장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어색함을 나중으로 미뤘을 뿐이었다.
끼익.쿵. 문이 닫힌다. 여전히 한나는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조금 전의 행동은 결코 남동생과의 스킨십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나의 행동에 성적인 의도가 있다는 건 명백했다.
“…누나. 이제 어쩔 거야?”
“모, 몰라! 어쩌지?! 어떻게 해야 돼?!”
그런 장면을 친구에게 보이고야 말았던 것이다.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게 왜 살피지도 않고 다짜고짜 그랬냐고…….’
콜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꿈인가. 꿈이지?”
“정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나도 이만 자러 가고.”
"……."
적어도 평정을 되찾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다. 콜린은 그리 생각하고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턱. 그의 옷깃이 붙들린 건 직후의 일이었다.
“저기, 콜린… 어차피 이미 들켜버린 거니까 그냥 이어서 하자?”
뒤이어 그녀의 힘에 억눌려 바닥에 눕혀지는 콜린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냥 쾌락으로 현실도피를 하려는 모양새였다.
“응? 그래도 괜찮… 으악?!”
“할 거면 적어도 안에 들어가서!”
그리고 이내 둥실 날아온 책에 머리를 강타당해 엎어지는 한나였다.
‘남매가 현관에서… 기분탓이겠지만 어쩐지 불길하단 말이지.’
물론 레니에게 둘의 관계를 들킨 것보다 큰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말이다.
“으으…….”
한나는 뒤통수가 얼얼한지 손으로 문지르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른 손으로는 콜린을 붙잡은 채였다.
‘…사실 오자마자 씻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욕실에 들어가기는커녕 침실조차 못 가고 거실에서 거사를 치르게 될 것만 같았다.
콜린은 내심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