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20 마치 헤어(1)
방 안에 자리를 잡은 마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따금씩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 농담을 던지기도 했으나 평소 그녀의 모습에서는 떠올리기 힘든 진지한 태도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하지만 분명히 그럴 만한이야기였다. 콜린은 마치의 설명을 듣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힘을 쌓아가는 부점 길드를 견제할 목적으로 제후 대리가 감찰관을 보낸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 과정에서 콜린이 죽을 수도 있다.
'박살나기 싫으면 동료를 팔아서라도 충성을 증명하라는 말인가. 공포정치가 따로 없군.'
당연하지만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을 달갑게 받아들일 수야 없었다. 콜린의 기분이 나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중요한 걸 콜린 본인에게 묻지도 않고 결정했던 겁니까?!"
곁에서 함께 이야기를 듣던 레니도 역시 좋은 감상은 품지 못했는지 분개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마치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본인한테 이야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차피 죽고 싶지 않다는 건 분명할 텐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누군가 죽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단숨에 끝내주는 게 차라리 자비로운 일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라도 콜린 님이억지로 웃으며 자기는 죽어도 된다 말하는 꼴이라도 보고 싶으신가요?"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본인에게 언질도 없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을 뿐이지……"
다만 마치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날카로웠다. 그것이 설령 정론이라 하더라도, 어째서인지 그 말에는 날이 서있었다.
"그리고 괜찮아요. 콜린 님이 희생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뒤이어 미소를 지으며 콜린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이유 모를 집착이 스며있었다.
주위의 다른 여자들처럼 콜린에게 빠져들고 만 것이었을까? 하지만 콜린은 그 추측을 부정했다.
마치가 그에게 큰 호의를 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 테다. 마치와 몸을 겹치던 그때에 일부러 그리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저런 집착 가득한 미소를 지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 콜린은 짐작했다.
그때 이후로 콜린은 마치와 몸을 섞지 않았다. 처음 이후로 긴 시간 동안 관계가 없던 건 시안 때와 비슷했다.
그러나그 사이 계속 콜린을 요구해왔던 시안과는 달리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전부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물론 바쁘기도 하여 어쩌다 보니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 마치의 성욕을 감안했을 때 시간만 있었더라면 그와의 관계를 요구했으리라.
하지만 그 예상도 그녀의 성욕에 의거한 것이지, 콜린 개인에 대한 집착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굳이 콜린이 아니라 다른 남자─저번 길드전에서의 행동을 감안하면 아마 여자도 포함해서─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그랬던 마치가 지금은 콜린에게, 아니, 콜린의 생존에 집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집착 대상은 내가 아니라는 거겠지.'
대체 그녀는 무엇에 대하여 집착하고 있는가. 그것 역시 대충은 짐작이 갔다.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 그녀를 자극했는지 짚어보면 된다.
주변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웃으며,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스스로 희생하겠다는 말을 꺼낸다. 마치는 그 말을 하며 이상하리만치 날이 선 모습을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경험담일 것이라고 콜린은 생각했다. 누군가 주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희생하던 모습을 마치는 본 적이 있는 것이다.
…흥미가 동했다. 조금 시간을 들여서 파악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
"뭐, 전달할 이야기는 이게 전부에요. 레니한테 혹시 모를 싸움을 대비해두라고 말해두려던 것뿐이라서."
뒤이어 마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와있었다.
"아,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그러면 배웅을……."
"아뇨. 괜히 번거로운 일을 하실 필요는 없으니 가는 김에 마치 씨한테 바래다달라고 할게요."
콜린 역시 떠나려는 모습을 보이자 뒤따라 일어나는 레니였다. 다만 콜린은 그녀의 호의를 만류했다. 기회가 나온 김에 마치의 과거 이야기를 약간 정도 캐물어볼 심산이었던 탓이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콜린은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레니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건네었다.
"그러고 보니 말하는 걸 잊었는데요. 실은 저 마치 씨하고도 했던 적 있어요."
레니는 그 말을 듣고서 우뚝 굳어버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서야 느리게 이해가 상황을 따라잡는다.
무엇을 했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레니는 눈치가 없진 않았다. 허나 하필이면 마치와 함께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앞으로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한 암시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움찔거리며 그에게 뻗은 손은 허공을 가르며 도중에 멈추었다. 몹시도 엉성했으나 나름 고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직전에 이뤄진 참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레니가 느낀 것은 배신감 같은 게 아니었다. 절반은 불안, 절반은 기대로 머릿속이 가득 찬 레니는 떠나는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일그러진 성벽을 알아차리는 레니였다. 본래부터 그녀에게 잠들어있던 것인지, 아니면 그날 그 광경을 보면서 망가져버린 것인지는 몰랐다. 그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콜린은 미소를 짓고있었다. 내려다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물론 자리에 앉아있던 레니였으니 실제로도 내려다보고 있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명백히 심리적인 하대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혐오나 멸시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를 깔보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레니를 귀여워하는 것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명백히 레니보다 먼저 그녀가 가진 성벽을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레니를 위하여 일부러 그녀를 도발하듯 자극하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그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내 문이 닫힌다. 방에는 레니만이 홀로 남았다.
여전히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방금의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레니는 확신했다.
저 장난스럽고 요염한 소년에게, 비참함 속에 그녀를 밀어넣는 소년에게, 레니 테세오는 사랑에 빠지고야 말았다.
×
"레니가 바래다주는 편이 낫지 않나요?"
문이 닫히고 콜린이 이미 바깥에 나온 마치를 뒤따랐을 때 그녀는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방금 막 사귀기로 한 참이 아니던가요. 이럴 땐 조금 고생시키더라도 의지해주는 게 여자로서도 기쁜 일이랍니다."
"…이미 알고 계셨나요."
콜린이 한숨을 쉬며 말하자 마치는 빙그레 웃으며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를 가리켰다. 분명 마치가 방에 들어온 타이밍은 그 이야기를 끝마친 뒤였을 텐데 말이다.
즉, 이미 한참 전부터 방문 앞에서 엿듣고 있었다는 의미다.
"마치 씨도 제가 생각하던 것만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계신 건 아닌 모양이네요."
"글쎄요. 고민하고 있으니만큼 마음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웃음은 중요하죠."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생글생글 미소를 짓는 마치였기에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 연애담은 참 좋죠'라고 음흉하게 덧붙이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좋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야, 그건그렇고 저도 몰랐어요. 설마 레니가 그런 취향일 줄이야!"
당연하지만 조금 전에도 레니의 취향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가능하면 레니가 스스로 자기 성벽을 자각하길 바랐던 것도 있고, 남 앞에서 함부로 알렸다간 레니의 체면이 말도 아닐 테니까.
아무튼 그런 상황이었으니 마치가 그녀의 취향을 알았다는 소리는 콜린의 태도만을 근거로 추측한 내용일 것이다. 꽤 뛰어난 통찰력이 아닐 수 없었다.
"흐음, 다음 번에 레니를 위해서 영상이라도 찍어서 선물로 줄까요? 아이템 가격은 좀 되겠지만 열심히 일해준 레니한테 그 정도 투자는 할 수 있겠는데."
…저번의 마사지 건도 그렇고 어째 에로와 관련되면 지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여자였다. 21세기 지구에서나 나온 아이디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려내다니 말이다.
"뭐, 그건 다음에 기회가 되면 생각해보죠."
"거절은 안 하네요?"
"마치 씨도 나름 기대하고 있잖아요?"
"뭐, 그렇죠."
콜린은 어깨를 으쓱이는 마치를 따라 킥킥 웃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웃음을 그치곤 묻는 것이었다.
"마치 씨, 당신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흠흠, 제 무용담이야 많죠. 악랄한 강간범을 붙잡아 덮친 이야기라든가."
"그것도 엄청 궁금하긴 하지만… 그런 소리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말을 돌리려는 마치를 다그치는 콜린이었다.
"마치 씨 지인 중에 저랑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사람이 있었던 거죠?"
이내 마치 역시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래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는 건여전했지만 말이다.
"글쎄요. 말해드릴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제 목숨이 걸려있으니 그 값이라 치고 들려줄 수는 없나요?"
"엄밀히 말하면 여차할 때 싸우기로 했으니 우리 길드 전체의 명운이 걸려있죠."
마치는 일단 거부 의사를표했다.
"……하아."
그러나 이내 콜린의 시선을 잠시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숨을 내쉬는 그녀였다. 아무래도 여기서는 말해두는 게 나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신은 어쩐지 제 동생하고 분위기가 닮았어요. 분명 외모도 성격도 전부 다를 텐데도."
"동생이 있으셨나요?"
"뭐, 혈연은 아니었어요. 정말로 친동생 같은 동료였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러더니 마치는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예전에 어느 괴물이 날뛴 적이 있어요. 죽일 수 없는 녀석이라 봉인해야 했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죠."
불사의 괴물. 그런 존재가 날뛴다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으리라.
"다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요. 제 동생이 괴물의 권능을 일부 몸에 받아들여서 약화시키는 거예요."
"그런 것도 가능해요?"
"제 동생하고 괴물의 궁합이… 뭐, 아무튼 동생에게는가능했다고만 해두고 지금은 넘어가요."
그러면 다음에 이어질 일이야 아주 뻔했다. 하지만 콜린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다들 눈치를 주며 등을 떠밀었어요. 엄청 고통스럽고 죽을 가능성도 있었는데도 모두를 위한다는 거였죠."
이윽고 마치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가 전에 반응했던 부분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아마 그 동생이라는 자는 결국 괴물의 권능을 떠맡게 되었으리라.
마치의 분위기로 보아서 좋은 결말을 맞이했을 리는 없다. 죽었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음에는 틀림없었다.
콜린은 그렇게 짐작했다.
"그래서 괴물은 겨우 다시 봉인했지만…사실 괴물을 해방시켰던 장본인이 제 동생에게 깃든 권능으로 제후님까지 봉인해버리고 권력을 차지해버렸어요."
"……예?"
…다만 아무리 콜린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이걸 미리 알아낸다면 이미 예측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이었다.
"처음부터 그 인간이 권력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운 거였죠. 그리고 그 진실을 알아버린 저는 숙청위기를 피해 도망쳤답니다."
"그 사람이 이번에 말했던 제후 대리로군요."
"네, 그래요."
콜린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제후를 무력화시킨 뒤 제후가 아프다는 핑계로 제후 대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고 있다는 소리다. 마치의 동생은 거기 이용당했고.
'어쩐지 이상하다 싶긴 했어…….'
아라크네 길드와의 경기에 콜린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그 경기에는 볼거리가 부족했다.
이런 판타지 세상인데 고작 그런 칼싸움이 방송을 해야 할 정도냐 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것이다.
더욱이 아라크네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제후까지도 관계자라고 하던데 이에 걸맞는 규모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게임은 제후 대리가 마치를 이대로 내버려둬도 위험하지 않을지 판단하기 위한 시험의 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의도적으로 방탕함을 연기했는지도 모른다. 권력에서 내쫓기고 동생까지 잃어 실의에 빠진 채 색을 탐하며 세월을 보내는 폐인으로 보이도록.
"그럼 여태껏 마치 씨의 행동도 보여주기 위한 거였나요?"
"사실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하다보니까 푹 빠져서……"
"…아, 그러신가요."
하긴 콜린과 관계를 맺을 때 마치의 모습은 그야말로 색욕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것까지 연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도망치다가 체셔를 만나 함께 길드를 세우게 된 거예요. 길잡이들은 기본적으로 강한 집념을 가진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협력하려는 성향이 크거든요."
"복수가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네… 뭐, 그랬어요. 그리고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품을 집념이라고 해봐야 생존욕구와 복수심 정도일 거라고 콜린은 생각했다.
그게 동생을 이용한 것에 대한 복수인지, 자기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복수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무리를 하면서까지 복수를이룰 생각은 없어요. 이 길드에는 저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뒤이어 마치는 살짝 탄식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다시금 웃었다.
"'부점'은 세력을 이뤄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돕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길드거든요."
콜린은 그 말을 듣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레니도 가문에서 도망쳤다고 했다. 어쩌면 부모가 없는 콜린과 한나도 어릴 때 이곳에 거둬진 것일지 모른다.
"이 길드를 지키기 위해서면 무릎도 얼마든지 꿇을 수 있어요. 설령 그 녀석에게 복수를 못한다고 해도 이 안식처만큼은 어떻게든."
저벅. 발걸음이 멈춘다. 두 사람은 어느새 콜린의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단, 누군가가 희생하지는 않는 범위에서 말이죠."
마치는 다시 평소대로의 느긋한 미소를 짓더니 덧붙였다.
"아, 너무 궁상 떨었나요?"
"아뇨. 제가 말해달라고 했던 거니까."
콜린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문으로 손을 뻗었다. 문은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기, 마치 씨."
"네?"
"안 돌아가시나요?"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서다가 콜린은 흘깃 뒤를 돌아보곤 물었다. 마치는 그의 뒤를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오고 있었다.
"한나는 집에 없잖아요?"
"……."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 말해오는 마치의 모습에 콜린은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조금 전의 분위기랑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요!"
그리 말하며 마치는 저벅저벅 콜린에게 다가왔다. 벌써부터 숨을 몰아쉬는 게 어지간히 흥분한 게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왜 내 주변에는 정상적인 여자가 없는 거지?'
이쯤 되면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까지 해버리게 되는 콜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