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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31 거울아 거울아(3) (31/89)



〈 31화 〉31 거울아 거울아(3)

몸이 찌뿌듯해서 기지개를 켰다.

"하아……."

체셔 캣은 어쩐지 불안해져 한숨을쉬었다.

시야에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새하얀 방이었다.

바닥에는 B8이라는 문자가 적혀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으로 문이 있었고 각각 A8, B7, C8, B9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이런 따분한 방이 80개나 있다니 상상만 해도 절로 하품이 나올지경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은 지금그가 길드의 명운을건 게임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래. 밥을 누가 사니 하는 보통 내기가 아니고, 자칫 한순간에 년간 일궈온 길드가 가루가 될 끔찍한 게임이었다.

[너 역정보라는 말 들어는 봤어?]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자그만 손거울에서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가 가득한 그 목소리는 젊음과 어림의 중간 단계 정도로 느껴졌다.

다만 부점 길드의 명운을 쥐고 있는 게  앳된 소년, 콜린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할 따름이었다.

물론 그런 어린 녀석에게 우리 운명을 맡길  있겠느냐 라는 생각을 하는가 묻는다면… 물론 대답은 No였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 영주님 아직 안 움직이셨죠? D6 방향으로 가주세요.]

'…이쪽인가.'

그의 명령을 듣고서 체셔는 C8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이 게임의 규칙 때문에 열었던 문은 반드시 지나가야 하고, 체셔의 권능 사용이 금지되어 벽을 넘어갈 수도 없다.

따라서 문을 잘못 열어버리면 괜한 시간 낭비를 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체셔는 전혀고민하지 않았다.

게임을 시작하고 겨우 10분 언저리가 지났을 것이다. 각각 열 번 정도의 이동을 주고받은 셈이었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체셔는 머릿속에서 콜린에 대한 신뢰도를 몇 단계나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위험도를 수십 단계 정도 올렸다.

오늘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콜린에 대한 그의 평가는 잔머리가 뛰어난 소년 정도였다.

잘 다듬으면 훌륭한 참모가 될 수 있겠다. 딱  정도의 평가였다.

아라크네의 틈을 찌른 기지는 훌륭했지만, 그것은 친선 경기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던 결과였으니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친선전이랍시고 자제하고 있던 게 그거였단 말이냐…….'

그때 상대를 배려했던건 아라크네만이 아니라 콜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지금 체셔는 진심으로 그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 콜린의 진가가 이 정도였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백설이 도시에 발을 들이자마자 뺨을 후려갈겼으리라.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닌가?'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갔나 싶어 체셔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정도로 저 콜린이라는 소년은 광기에 가까운 계책을 마구 뽑아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그는 D6으로 이동하라고 했으나 체셔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D6은 지금 체셔가 있는 방에서 바로 갈 수도 없는 방이었다.

콜린이 착각을 한 건 물론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통신 아이템을 백설이 준비해주는 이상 도청을 의심해야 한다며 암호를 쓰겠다고 말해두었다.

예를 들어 방금처럼 말하면 동쪽으로 이동하라는 의미였다.

그런  헷갈리지 않고 척척 말하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체셔야 본인의 동서남북, 그리고 대기를 명령하는 암호만 외우면 된다지만, 사람이 일곱 명이니 콜린이 외워야 하는 암호는 35가지였다.

헷갈릴 만도 한데 지금까지 적어도 체셔에게 잘못된 암호를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 사실 거기까지는 체셔도 이해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암기의 천재들은 책 페이지를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달달 외울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콜린은 단순히 암호로만 말한게 아니라 D6이라는 방을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조금 백설에게 으스대듯이 말한 '역정보'라는 단어.

──요컨대 콜린은 만약 백설이 도청을 하는 중이라면 속일수 있도록 계속 가짜 동선을 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냥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울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어보니 정황상 콜린에게는 필기구조차 없는 듯했다.

뭐, 그 방에 필기구가 있었다 해도 백설의 물건은 믿을  없다며 쓰지 않았으리라.

동료들이 지금 어느 방에 있는지, 그리고 백설에게 그 동료들이 있는 척 하는 가짜 방이 어디인지.

오로지 머릿속에서  모든 걸 계산하고 있었다.

도청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동료들에게 물어서 확인해볼 수도 없었다. 한  까먹으면 그대로 끝장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만약 콜린이 말하는 가짜 동선이 실제 난쟁이가 있는 곳과 겹친다면?

그렇다면 백설은 그게 자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채고야 만다. 역정보로서의 가치가 순식간에 소멸해버리는 것이다.

즉, 콜린은 난쟁이들이 있을 만한 곳으로 동료들을 안내하는 동시에, 난쟁이가 없을 가능성이 높은 곳만 골라서 가짜 동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정말로 이게 사람 두뇌로 가능한 짓인가…?'

그런 묘기를 부리고 있는 소년에 대해 체셔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최고이자 최악의 참모였다.

동료일  전자였고, 적일  후자였다.

체셔는 적어도 자신 만큼은 한평생 전자이고 싶었다.


×


다시 시점을 옮겨서 중앙의 지휘실.

사방이 막혀 있으니 의미는 없지만 굳이 좌표를 말하라고 한다면 E5였다.

"그쪽 차례인데. 안 움직여?"

백설은 떨리는 눈동자로 맞은편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목덜미에 식은땀이송골송골 배어나왔다.

자신이 여태까지 얼마나 위험한 길을 걸어오고 있었는지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저 소년의 말을 엿듣고 그걸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 거짓이었다?

그 말은 즉슨이제 백설은 도청이라는 치트키를 쓸 수 없다는 소리였다.

아니, 사실 원래부터사용할 수 없었는데 그저 이제야 알아차렸을 뿐이다.

지금까지 난쟁이들이 몰살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람의 강자들을 박살내왔던 백설은, 언제나자기가 이길  있는 판을 짜고 뛰어드는 비겁자였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자신은 지금 오로지 운에 모든 것을 맡긴 게임을 하고 있는 거지?

사실 어떻게 보자면 이제야 서로 위치를 파악할  없는 공평한 게임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백설은 견딜 수 없었다.

하물며 패배할 확률이 1퍼센트라도 있어선 안 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싸움을 걸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소년은 여전히 씨익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 콜린은 지금 단검의 산에서필요한 무기를 찾는 게 아니라 테이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백설이 노려보자 그는 자랑하듯이 손에 들린 단검을 내보인다.

"순서가 조금 헷갈려서 오래 걸렸지 뭐야."

레이스, 빗, 그리고 사과가 순서대로 새겨진은빛의 단검이었다.

저쪽에는 길잡이가 있으니 그녀의 약점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리라.

답을 알고 있다면  다음부터는 그저 운과 노가다의 영역이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게임의 상황을 그려가며  작업을 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콜린은 벌써 열쇠를 찾아내곤 여유롭고도 뻔뻔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감히 나한테 이런 수모를 줘?'

백설은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서 분노와 공포를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콜린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 더 겁먹어라. 아예 쫄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면 제일 좋고!'

그리고 그녀의  감정은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었다.

콜린은 백설이 자신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 여자가 저러는 꼴을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물론 오로지 그런 통쾌함만을 원해서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자고로 감정에 휘둘리는사람만큼 조종하기 쉬운 건 없었다.

실제로 백설은 그에게 겁을 집어먹고 초반부터 도청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녀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실은 그것도 콜린에게 유도된 것이었다.

시작부터 난쟁이 셋이 붙잡힌다는 임팩트. 그리고 그 직후 한 칸 이동하자마자 상대와 마주쳤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그녀의 비밀병기를 일찍 꺼내게 만들었다.

콜린이 그녀의 시작 배치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착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백설의 생각과 다르게 콜린은 그녀의 배치를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백설이 일렬 전략을 카운터치기 위해 미끼를 던지리라는 점 하나뿐이었다.

마치 광산의 유독가스를 감지하는 카나리아처럼, 어디서부터 일렬 전략이 시작되는지를 알기 위해 일부러 상대가 있을 곳에 인원을 배치하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는 A행과 I행, 1열과 9열 중 세 줄에 한 명씩 말이다.

각각 그리고 거기서 난쟁이가 배치되는 곳은 각각 아홉 칸 중에 하나.

그러니 셋을 전부 저격할확률은 거의 3000분의 1에 달한다.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콜린 쪽이 인원을 일렬로 배치한다고 해도 커버할 수 있는 건 9칸 중 7칸이다.

그러므로 좌우 두 칸씩은 백설이 난쟁이를 보내도 정작 콜린의 배치와 겹치지 않아 헛방을 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남은것은 5칸.

여기서 그 남은 칸들은 정중앙의 하나, 중앙에서 1칸 떨어진 둘, 2칸 떨어진 둘로 분류해볼 수 있다.

심리적으로 백설은 난쟁이를 배치해둔 줄끼리 각 분류에 겹치지 않도록 해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게임을 계속 반복해온 백설이라면 분명 제일 안정적으로 여겨지는 그런 배치를 택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그녀가 게임판을 바라보는 방향까지 감안한다면 초기 배치를 저격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설은 상대 전략을 역이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배치만 생각하다가, 그 탓에 자기 전략이 비교적 단조로워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물론 약간의 찍기는 필요했지만 결코 낮지 않은 확률이었고, 콜린은 결국 성공해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가장자리에 배치된 난쟁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번째로 붙잡힌 난쟁이는 중앙에 있지 않았는가.

콜린은 대체 무슨 수로 그녀가 있는 장소를 알아맞힌 것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콜린은 거기까지 간파한 적이 없다.

즉, 난쟁이가 한 칸을 옮긴 동시에 마치와 만난 건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더욱 정확하게는백설이 그렇게 착각하도록 유도 정도는 했지만 말이다.

시작부터 세 명이 잡힌다는 상황에 충격을 받은 백설은 이마저 콜린의 계책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80칸에서 7:7로 이 게임을 한다면 애초에 배치가 겹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단지 그것이 가장자리를 제외한 48칸의 필드에서 벌어지는 4:4의 대결로 축소되었을 뿐이다.

단순 계산으로만 봐도 서로의 배치가 하나라도 겹칠 확률은 3할을 넘어간다.

마치와 아이쉬마처럼 바로 옆에 배치되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최대 9할에 가까운 값이 나온다.

까놓고 말하자면 겹치지 않는  오히려 힘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콜린은 확률을 믿고 적당히 배치를 분산시켰을 뿐이었다.

당연히 도망자 입장인 백설도 최대한 배치를 분산시킬 것이므로 이런 결과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시점에서 백설의 심리상태로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도청이라는 비장의 수를 일찍 꺼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콜린은 도청 이외에 다른 몇 가지 비겁한 수단에 대한 확인도 끝난 상태였다.

우선 모종의 수로 백설이 이쪽의 시작 배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백설은 콜린이 시작 배치를 결정하자마자 놀란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CCTV처럼 방의 상황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었다.

 아공간 역시도 백설이 준비한 것이므로 모든 것을 의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멋모르고 난쟁이를 사지로 밀어넣은 시점에서 그것 역시 아니라고 보는 게 맞았다.

콜린은 턱을 괴고서 백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웃었다.

'이제야 좀 공평해졌구만.'

그리 불평하듯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는 이 게임을 꽤나 즐기고 있었다.

콜린은, 정확하게는 정희원은 원래부터 그런 성격이었다.

보드 게임이든 마피아 게임이든, 사람 대 사람으로 전략을 맞부딪히는 것을 즐기는 타입이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때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간 인간관계가 파탄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털어버릴  있는 상대와의 싸움은 그에게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 미친 놈…….'

물론 상대하고 있는 백설 입장에서야 아주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헬렐. 일단 G2로 가봐."

다만그렇다고 해서 게임을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설은 미간을 찌푸리고서 명령을 내렸다.

[이런 썅?!]
"젠장. 이번엔  뭐야?"
[곰덫 밟았어!]

'젠장. 무슨 무기를 쓸 건지 알려줄 의무는 없다고하더니만 진심이었던 거냐?!'

그러고 보면 게임을 시작하기 직전, 나머지는 장비를 챙기러 갔다며 콜린이 홀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곰덫이라니.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해맑게 웃으면서 이 따위 미친 발상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시발……."

백설은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고야말았다.

그녀의 감상을 이만큼이나 표현할 수 있는 한마디라곤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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