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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화 〉33 거울아 거울아(5) (33/89)



〈 33화 〉33 거울아 거울아(5)

침을 삼킨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러갔다.

30초 동안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헬렐은 장검을 거머쥐었다.

발목에는 깊은 상흔이 남아 당장이라도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의식도 뚝뚝끊어진다.

혈액이 새어나가며 신체가 더욱 산소를 요구해왔다.

목에 걸린 초커를 살짝 잡아당겨 여유롭게 호흡을 들이킨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갑갑하기도 했지만 초커를 풀지는 않았다.

이건 그녀의 주인이 내어준 선물이었다. 난쟁이로서의, 백설의 수하로서의 증표였다.

비록 거만하며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수십 배는 많은 주인이었지만, 그래도 헬렐은 그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주인이라 해도, 난쟁이들에게는 다정한 백설이었다.

다시   주인의 선물을 쓰다듬고서 그녀가 이름을 지어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헬렐. 헬렐  샤하르(הֵילֵל בֶּן-שָׁחַר). 이따금 백설은 그녀를 루시퍼(Lucifer)라고도 불렀다.

[게흑… 흐윽…♥]

…다만 지금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암캐와도 같은 괴성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헬렐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서로의 존망을 건 결투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녀의 주인도 참으로 비열한 자였으나, 상대는 거기서 한 술 더 뜨는 녀석이었다.

자신도 느닷없이 튀어나온 트랩을 밟아버리지 않았는가.

덕분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뿐더러 피를 뚝뚝 흘리고 있으니 이건 뭐 나 잡아줍쇼 하고 시위하는 꼴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도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방. 중앙의 바닥에는 A1이라는 문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헬렐은 이 게임의 가장 구석진 방에 도착해 방금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겨누고 있었다.

혈흔을 따라 추적한다면 도망쳐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요격할 뿐이다.

오히려 흔적을 남겨 상대를 유인하고 기습하여 죽일 작정이었다.  역시 백설의 아이디어다.

──우지끈.

그리고 헬렐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옆에서 튀어나온 해골마에게 걷어차였다.


×

[7초. 제압 완료.]
"안젤리나 씨, 수고하셨… 윽."

거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콜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아랫도리에 내달린 사정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백설의 머리를 붙잡은 채 페니스를 그녀의 목구멍 안쪽까지 찔러넣고 정액을 쏟아낸다.

"커흑… 쿨럭!"

그러고 나서야 콜린은 백설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기침을 해대며 정액을 토해냈다.

벌써 세 번째 사정이었다. 질식이라도 시킬 셈이냐며 백설은 콜린을 노려보았다.

"허억……."

그녀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콜린이 완전히 물러난 것을 확인하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모습을 바라보다 콜린은 한숨을 쉬었다.

뺨은 붉었고 다리는 후들거렸지만 눈빛에는 적의가 아직 남아있었다.

'역시 완전한 패배를 맛보여주지 않으면 꺾이지는 않는 건가.'

지금껏 콜린이 봐온 백설은 이기적이고 비열한 여자였다.

저런 존재는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끝까지 자존심과욕구를 충족시키려 하기 마련이었다.

[콜린. 네가 하는 일이니까 방금 그 일도 의미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만…….]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으니 다시금 거울에서 안젤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잠시 생각하던 콜린은 금세 백설과의 행위에 대한 것이라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안젤리나 씨, 혹시 질투하세요?"
[…그래,조금은.]

콜린은 살짝 도발하듯 말했다가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꽤나 직설적인 호감의 표현이었다.

[안젤리나, 사랑 싸움은 일단 전부 끝나고 하는 게 어떠냐?]
[사, 사랑 싸움이라니요…!]

이윽고 아라크네가 끼어들어 일침을 놓았다.

그나저나 안젤리나가 이렇게 그에 대한 호의를 직접 표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뭐, 원래부터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타입이긴 했지.'

그야 친선전  이후로 만난 적이 없어서 그녀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번 일이 안젤리나에게 자극이 된 탓에 의외의 곳에서 수확을 거둔 듯 했다.

[…….]

…물론 최대 수혜자는 레니일 테지만 말이다.

뭔가 할 때마다 꼬박꼬박 보고를 하던 그녀가 어느새 조용해졌음을 콜린은 눈치챘다.

아마 신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있을 터였다.

"……."

콜린은 그녀의사회적 생명을 위하여 모른 체 넘어가주기로 했다.

"콜록… 하아, 레브. 헬렐. 지금 상태는?"
[헤, 헬렐이라면 조금 전에…….]
"…젠장."

부점 길드에서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백설은 난쟁이들에게 상황 보고를 들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 보고를 할  있는  레브 혼자였으니 '난쟁이들'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 쓸모 없는 년.'

그 보고에 백설은 혀를 찼다.

헬렐의 생존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상대를 유도해서 하나라도  끌고가는 전개를 노렸으나… 얘기를 들어봐선 그마저도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거지?'

백설은 거울 위쪽에 새겨진 타이머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만  있으면 게임을 시작하고 40분째가 된다.

'이길 수 있다. 그래도 구석으로 도망친 것만으로 꽤 시간을 벌었어.'

즉, 서로의 이동 가능 횟수는 20번을 조금 넘는 정도. 그것을 확인하고서 백설은 입꼬리를 올렸다.

아슬아슬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수준이라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20분 뒤, 이 모든 굴욕을 갚아주리라. 백설은 눈앞의 건방진 사내를 노려보았다.

'…뭐, 기분 좋아 보이니까 잠시 놔둘까.'

남은 난쟁이를 붙잡으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는 듯한 백설의 모습에 콜린은 가볍게 웃었다.

실제로 20회 안에  명을 찾아내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백설의 생각대로 헬렐을 쫓아가 붙잡은 뒤 이제서야 레브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라면 말이다.

부상을당한 난쟁이를 구석에 보낸 것은 그녀의 실책이었다.

물론 백설의 추측대로 혈흔을 남기는 난쟁이가 금세 붙잡히리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쌍방의 이동속도가 매 차례마다 1칸씩으로동일한 이상 그걸 혼자서 추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연히 난쟁이의 이동을 예측해서 포위할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인원이 많이 필요해지게 된다.

그럼에도 백설은 구석에서 농성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그걸 콜린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더 나아가 기습으로 한 명이라도 쓰러뜨릴  있었다면, 무작정 도망치는 것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누가 구석으로 도망을 치냐고.'

문제는 구석으로 향하는 움직임이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콜린이 그걸 보고도 무언가 계책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농성을 하리라는 사실이 발각된 이상 인원은 난쟁이를 제압할 한 명으로 충분했다.

함정을 피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농성을 한다면 제일 구석의 방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럼 혈흔을 따라가다가 바로 앞에서 조금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다리를 다친 상태니 매복 위치는 문 바로 근처일 테고, 그럼 다른 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돌진하면 제압도 간단했다.

그런 면에선 말을 소환할  있는 안젤리나가 혈흔을 발견했던 덕을 봤다.

그리고 그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방들을 뒤져볼 시간이 충분했다.

깊게 생각했더라면 조심할  있었던 부분들을 백설은 너무나 허술하게 넘어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부족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매번 자신이 원하는 판을 짜서  위에서 싸워왔을 테니 말이다.

아니, 사실 싸움조차 성립되지 않는 양민학살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랬던 백설이 온갖 꼼수가 틀어막히고, 곰덫이라는 상상조차 못한 존재의 등장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깊게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콜린이 그녀를 범한 탓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콜린, 처리했다.]
"──53분. 휴… 아슬아슬했네요."

그런 그녀가상대였으니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일곱 번째 난쟁이가 붙잡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니의 보고를 듣고서 콜린은 씨익 웃었다.

"자, 어때? 이제 좀 사과할 마음이 드셨나?"

그리 말하고서 콜린은 왼손을 휘저었다. 검은 책이 둥실둥실 그에게로 날아와 위에 있던 단검을 건네주었다.

저벅저벅. 그는 미소를 지은 채 백설에게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사과하면 봐줄 수는 있어."
"하, 이 상황까지 와서?"
"못할 건 또 뭐가 있어? 게임이 끝나기 전에만 계약을 무르면 될  아냐."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백설 역시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콜린에게 침을 뱉었다.

"웃기고 자빠지셨네. 그냥 끝내."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질척한 액체가 뺨에 튀었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심코 '업계포상'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지만, 콜린은 그다지 그런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분명히 기회를 줬어. 잊지 마."

그리곤 백설의 옷깃을 잡아선 강하게 당기는 콜린이었다.

"…윽!"

콜린은 그녀의 옷으로 얼굴을 슥 닦고는 백설을 자빠뜨렸다.

뒤이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진 그녀 위에 올라타 목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

아래에서부터 올려다보는 백설의 눈빛이 미묘하게 번득였다.

분노, 긴장, 하찮음, 경멸, 조소…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포로로 붙잡힌 명장이 적을 비웃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칼날이 눈처럼 하얀 목덜미에 닿았다.

그러나, 단검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뭐야, 꼴에 남자라고 새삼스레 죽이는 게 무서워진 거야?"

그 모습에 백설은 그를 비웃고 도발했다.

"처음엔 그냥 의심이었어. 해봐야 음모론을 넘지 못하는 정도였지."
"……뭐?"

그러나 콜린은 도발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백설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반응으로 확신이섰어."

공허한 그의 눈동자의 백설의 모습이 비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할 뿐인, 옛 장수와도 같은  모습을.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건 명백히 이상했다. 백설이라는 인물의 본질은 콜린도 아주  알고 있었다.

비겁하고 이기적인 소인배. 권력을 등에 업고 자기 탐욕을 구가하는 사냥개.

'그런 인간이 이렇게 담담히 패배를 받아들인다고?'

있을  없는 일이었다.

콜린이 알고 있는 백설은 방금처럼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애원할 여자였다.

그러니 여기까지 몰리고서도 그녀에겐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고밖에는 저 반응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콜린은 그게 무엇일지도 대충 감이 잡혔다.

"난쟁이, 하나 더 있는 거지?"
"…역시 재수없을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야."

콜린의 말을 듣고서 백설은 웃었다.

솔직히 놀랐다. 애초에 여기까지 몰려본 것도 처음이었고, 여덟 번째의 존재를 들킨 것도 처음이었다.

"아마도… 본인의 권능이든 아이템이든,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이 있는 거겠지."
"그래, 정답이야."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템의 효과였다. 다만 그걸 말해줄 의무는 없었다.

물론 여기까지 알아낸 것만 해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서,이제 무슨 수로 5분 안에 투명인간을 찾아낼 건데?"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비웃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제한시간을 떠나서 무슨 수로 투명인간을 찾아낸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백설이 가진 최강의 패였다.

만약 난쟁이 일곱을 처리하고서 뭣도 모르고 백설을 살해한다면 아직 모든 난쟁이가 잡힌  아니므로 상대의 패배가 확정된다.

그 최후의 보루가 있었기에,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치더라도 그녀가 패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어.'

하지만 그마저도 오늘은  번의 위기가 있었다.

그 중 최고는 곰덫이었다. 만약 그걸 밟은  투명한 여덟 번째 난쟁이었다면?

상상만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런 면에서는 도청이 일찍 들켰던 게 오히려 득이 되었다.

평소와 다르게 백설도 상대의 위치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순간부터 여덟 번째 난쟁이를 고정시켰던 것이다.

만약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문을 여는 장면을 상대에게 보였다간 투명인간의 존재가 들켜버릴  있으니 말이다.

백설은 웃었다. 이번에는 정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결국 승리를 거머쥔 것은 그녀였다.

이 정도 되면 하늘이그녀를 돕는 게 분명했다.

"……."

그리고 콜린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걸 보고서 백설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자신에게  번이고 굴욕을 안겨준 그를 겨우 패배시켰는데 이토록 반응이 없어서야 원. 체념이 너무 빠른 사내였다.

"아라크네 씨."

그리고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암호 아니니까 그냥 그대로 움직이세요. F3입니다."

담담하게, 콜린은 그리 선언했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그의 패배가 확정된 이후였기에 뇌가 반응하는 게 조금 늦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이동 지시라는 걸 알아챘다.

"…뭐?"

그리고 거기서  잠깐이 지나고서야 그 내용을 인지할 수 있었다.

F3. 머릿속에서  위치가 그려진다.

"자, 잠깐만… 기다려! 잠깐?!"

순식간에 백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얀 피부에 푸른 기운이 올라올 정도였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분명 처음에도 의심하고 있었다 말했는데."
"자, 잠깐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일단 조금만 이야기를……."
"아라크네 씨, 그냥  전체 쓸어버리세요."

하지만 콜린은 그녀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 나는 기회를 줬다? 기억하라고 했지?"

그는 웃고 있었다.

"제, 제발.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제발……."

목덜미에 은빛의 단검이 파고드는 순간까지도 백설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애원하고 있었다.

이내 그녀의 숨과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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