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34 거울아 거울아(6)
눈을 떴을 때, 백설은 서늘한 바람 스쳐지나는 공터에 있었다.
익숙지 않았으나 기억에는 있는 장소였다.
아공간으로 이동하기 전 그녀가 서있었던 영주 저택의 뒤뜰이었다.
"어째서…?"
백설은 고개를 숙인 채 스스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게임이 정말로 끝나버렸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끝이 났다. 백설은 패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백설, 나아가서 영주 대리는 부점 길드에 개입할 수 없다.
영주의 사냥개로서 반항적인 녀석들을 물어뜯어야 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족쇄를 풀어준 격이었다.
'아, 안 돼…….'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편집적인 영주 대리가 어째서 이런 내기를 하는 걸 허가해줬는가?
백설이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개입 금지'라는 위험한 미끼를 쓰게 해달라고 부탁한 탓이 아니었나.
그거라면 군을 움직이지 않고도 반역자들을 박살낼 수 있다면서…….
그리고 결코 패배해선 안 될 그 게임에서 백설은 패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몇 번의 성공을 거두었든지 그것은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번 실패는 그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대체 돌아가면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하지?
정치적으로 죽는 정도면 다행이다. 최악의 경우 물리적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크헉?!"
그리고 그 고민을 하고 있던 백설은 어느새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다.
"휴우, 이제 빽도 없으니까 때려도 되는 거 맞죠? 어차피 거의 불사신이고."
"…마치 누나."
큼지막한 무쇠 곤봉을 휘두른 마치는, 그녀가날려버린 백설을 바라보고는 싱긋 웃었다.
곤봉이라곤 해도 그 크기는 사실 배트─그것도 크리켓 배트에 가까운 형상이었으며 피와 살점이뚝뚝 떨어졌다.
아공간에서 죽은 자들은 원래 세계로 퇴출당해 되살아났으니 저건 방금 백설을 후렸을 때 묻은 것이리라.
그 모습에 콜린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마치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지금껏 백설이 공격받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후 대리가 뒤에 버티고 있었던 탓이었다.
따라서 그 방패가 사라진 지금 그녀를 지켜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자연스레 여태껏 쌓여있던 마치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다.
그래. 백설은 돌아가면 어떻게 될 지 염려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돌아갈 수 있을 지부터 걱정해야 하는 그녀였다.
×
"수고했어."
"아, 영주님."
마치가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이 날려버린 백설을회수─내버려두면 언젠가 재생해서 도망칠 테니까─하러 가고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뒤뜰 한 켠에 놓인 벤치에 앉아 주위 식물들을 잠시감상하고 있던 콜린에게 체셔가 다가왔다.
"옆에 앉아도 괜찮아?"
"물론이죠."
애초에 영주님 저택이니까, 라며 덧붙이고 콜린은 미소를 지었다.
"지휘하느라 많이 지쳤나봐? 바로 안 돌아가고 여기서 쉬고 있는 걸 보면."
콜린이 엉덩이를 살짝 들어 옆으로 옮기자 체셔는 같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꼬리가 살짝 뻗어나와 살랑살랑 흔들린다.
"아뇨,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집에 곧장 돌아가는 게 아니라 벤치에 앉아있던 그의 모습에 체셔는 그렇게 추측했지만, 콜린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며 말해오는 것이다.
"묻고 싶은 게 있으시잖아요?"
"…알고있었어?"
"게임 시작하기 전부터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단 표정이었거든요."
고양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자 소년은 어깨를 으쓱인다.
일부러 체셔를 기다려줬다는 의미였다.
정말로 남을 분석하는 데 있어선 따라올 사람이 없는 소년이었다.
이쯤 되면 체셔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무슨 권능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다.
"그래서 뭐가 그리 궁금하셨나요?"
"여덟 번째 난쟁이가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윽고 체셔는 품어왔던 의문을 물었다.
콜린은 게임 시작 전, 회의를 할 때부터 여덟 번째 난쟁이, 그것도 투명한 인물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며 계획을 설명했다.
가능하다면 방 전체를 휩쓸듯이 공격할 것.
그게 힘들다면 팔을 크게 벌리고방 전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언가 다른 존재가 없는지 확인해볼 것.
모든 문에 미리 나눠준 아라크네의 실 조각을 끼워둬서 매번 상대가 이곳을 지나갔는지 검사할 것.
또한 그는 만약 도청이든 뭐든 백설의 감시 수단이 사라진다면, 투명인간을 함부로 움직이다 들키는 것을 염려하여 숨어서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누군가 한 번이라도 트랩에 당한다면 그걸 경계하여 더욱 움직이지 못하게 되리라 추측했다.
결국 그의 의심이 맞았다는 게 증명되긴 했으나, 여전히 체셔는 의문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그런 의심을 품을 수 있었던 걸까?
콜린은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존재고, 그 탓에 여러 가지 전승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바로는, 그건 체셔가 가진 길잡이의 권능과 비슷한 수준의 지식이었다.
어쩌면 전승에 대한 지식 자체는 체셔 이하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콜린이 있는 세계의 책에 '백설공주의 난쟁이는 사실 여덟 명이다.'라는 식으로 적혀있지는 않다는 건 확실했다.
그 말은 즉슨 이는 순전히 추리로 도출된 결론이며, 체셔가 가진 정보로도 충분히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체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서는 없었다.
"우선 의심의 시발점을 이야기하자면… 게임이 너무 쉬웠어요."
"…그게 쉬웠다고?"
"최소한 백설이 이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나올 정도는 아니었죠."
뒤이은 콜린의 말에도 체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이지만 ‘쉽다’라는 단어의 뜻을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충분히 그쪽에 유리한 게임이고, 도청까지 하면 사실상 필승 아냐?"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도시 곳곳을 누비며 살인을 저지르는 잭 더 리퍼와 그를 붙잡는 경찰들의 승부를 주제로 하는 게임이다.
그 게임에서는 도망자를 한 명만 붙잡으면 되지만, 추적자 역시 다섯 명으로 백설의 게임에 비하면 적은 수다.
백설이 도청으로 얻어낸 정보의 격차는 도망자에게 기본으로 주어질 뿐더러─즉, 잭 더 리퍼는 경찰의 위치를 볼 수 있다─ 필드도 200칸 정도 된다.
그럼에도 이 게임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밸런스가 괜찮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요컨대 그런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적자 측의 승률이 결코 낮지 않다는 의미였다.
물론 일부 요소는 백설의 게임에 비해 추적자에게 유리하게 적용되는 부분도 있긴 하다.
하여튼 확실한 건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와 비교해보면 백설의 게임도 충분히 승부를 해볼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양쪽 모두에게 이길 가능성이 존재하는 게임을 가져와야 상대가 받아줄 테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설이 어떤 여자인가? 그녀가 정말 아주 약간의 유리함만 가져가는 게임을 제안할까?
콜린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라면 공정해 보일 뿐인 함정 게임을 가져올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제 콜린은 이 게임 속에 잠들어 있는 불공정을 찾아내야만 했다.
"5분 정도저 빼고 이야기해보라 했던 것도 그래서였어요."
그때 콜린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약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승률 100%는우연히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토의를 이어나가는 가운데 지적이 나오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부분에 그 함정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랐어요. 어째서 게임을 종료할 권한이 저희에게 주어져 있을까요?"
게임의 종료는 세 가지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백설을 제대로 된 타이밍에 죽인 경우, 백설을 잘못 죽인 경우, 시간 초과.
"그냥 난쟁이가 모두 탈락한 시점에서 게임이 종료된다고 하면 안 되나요?"
"자신을 죽이는 데 시간을 더 소모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게 아닐까?"
"그럴 거면 저항 금지 조항도 넣지 않았겠죠."
콜린이 생각하기에 백설이 굳이 죽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애초에 난쟁이를 전부 잡은 시점에서 백설이 이길 확률은 0에 수렴한다.
거기에 '백설을 죽인다'라는 변수를 추가해봐야 그다지 차이도 없다.
"무엇보다,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그 여자가 패배까지 하고서, 더 나아가 자기가 살해당하는 굴욕을 맛보고 싶었을까요?"
콜린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설령 죽음의 무의미한 아공간이라 해도 기분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이쪽이 스스로 게임을 종료시키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맞아요. 난쟁이를 모두 처리하지 못했는데 착각하고 백설을 죽인다는 사태를 일으키기 위한 거겠죠."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백설을 죽임으로 게임을 종료시킬권한을 이쪽에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이다.
난쟁이가 부활이라도 하거나, 그들이 인지하지 못한 난쟁이가 더 있거나.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다른 조항을 확인해보니 답이 보이더라고요."
우선 이쪽의 참가자가 8명이라는 제약은 있었지만 저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난쟁이'를 잡아야 한다고만 되어 있고, 정확한인원이 명시되진 않았다.
"따라서 은신 계통 권능, 혹은 아이템을 지닌 난쟁이가 하나 더 있다. 그게 결론이었어요."
그 말을 듣고서 체셔는 탄식했다. 감탄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한숨이었다.
"하지만 백설의 난쟁이는 원전에서도 일곱이잖아?"
"음, 글쎄요? 정말 일곱이었을까요?"
그 말에 콜린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원전에서 마녀가 공주를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 7살. 마녀의 정신상태를 감안하면 살인을 의뢰할 때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겠죠."
초판에서 백설공주를 죽이려 했던 마녀는 그녀의 친모였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애초에 아름다운 딸을 갖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것이 정작 그녀였다는 점이었다.
그런 정신이상자가 몇 년을 넘게 참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백설을 죽이려 했을 리도 없고, 그럼 백설공주가 도망쳐 나온 것도 꽤 어린 시기라는 말이 된다.
심지어 난쟁이의 침대 중에서도 그녀에겐 너무 큰 게 있었다는 묘사를 보면, 당시 백설공주의 나이가 결코 많지 않음을 추측해볼 수있다.
"그리고 난쟁이의 집에서 공주는 집안일을 해주는 대가로 거기서 머무르게 되죠. 그어린 나이에, 그것도 얼마 전까지 공주였는데 일곱 명 몫의 집안일을 하면서요."
온갖 기계가 도움을 주는 현대에도 집안일이 힘들다 소리가 나오는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난쟁이들이 딱히 그녀의 사정을 봐줄 필요는 없으니… 아니, 이건 아니군."
"네. 명백히 이상하죠."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에게 집안일을 부탁했던 건 모든 사정을 들은 이후였다. 동시에 그들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애초에 난쟁이들이 그 어린 왕족 아씨에게 뭘 믿고 집안일을 죄다 맡긴단 말인가?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백설공주는 외출한 난쟁이들의 집에 와서 차려진 음식을 먹었단 말이죠."
대체 누가 테이블을 완벽히 세팅해놓고 종일 일을 하러 나간단 말인가? 그것도 컵에 음료까지 다 따라둔 상태로.
"…묘사되지 않는 인물이 추가로 있구나."
반면 체셔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속에서 완전히 망각된 자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원전 자체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었다.
괜히 이쪽 사람들이 이곳을 이상한 나라(Wonderland)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만약 제3자의 존재를 전제로 둔다면 난쟁이들의 제안도 조금은 현실적인 것으로 변한다.
굳이 따지자면 그건 부모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어린아이와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실제로 도움을 필요로 한다기보다는, 그녀도한 사람 몫을 한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심부름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역시 그래도 일곱 명이 아니라는 건 좀 묘하네."
하지만 거기까지 납득하고서도 체셔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녀석들 이름 말이야."
"이름이요?"
"헬렐 벤 샤하르(הֵילֵל בֶּן-שָׁחַר), 레브요슨(לוויתן), 바알세벨(Βεελζάβελ), 바알페올(בַעַל-פְּעוֹר), 바하무트(بهموت), 아마이몬(Amaymone), 아이쉬마 다이바(aēšma-daēva)."
유명한 다른 이름으로는 루시퍼, 레비아탄, 바알세불, 벨페고르, 베히모스, 맘몬, 아스모데우스.
흔히들 일곱 대죄라고도 불리는 칠죄종에 대응하는 악마들이다.
되짚어보면 난쟁이들의목에 걸려있는 초커 역시 각 악마를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아마 일곱 명이라는 편견을 심기 위한 가명이겠죠."
"아니, 그건 본명이야. 상세하게까지는 몰라도 대죄에 근원을 둔 녀석들이라는 것도 확실하고."
"길잡이의 권능으로 알아낸 사실인가요?"
"그래."
체셔는 콜린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뭐… 그렇다 해도 난쟁이가 여덟 명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콜린은 슥 시선을 돌려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선 악마로서의 이름은 편의상 아예 무시하는 걸로 하죠."
7대 악마라는 개념은 그레고리오 1세가 칠죄종을 정립하고 천 년 정도가 지난 뒤에 트리어 보좌주교 피터 빈스펠트가추가한 요소였다.
당시에도 흥미로운 설정으로받아들여졌는지 여러 마도서에서 채용되며 현대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 대죄도 사실 교황이 정리하기 전까지는 여덟 개였거든요."
그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가 정의내린 교만, 탐욕, 나태, 분노, 인색, 허영, 탐욕, 슬픔, 색욕의 여덟 가지 악 가운데 허영과 슬픔을 빼고 질투를 추가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칠죄종이 완성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덟에서 일곱이 되었다. 이러면 오히려 원전에서 사라진 한 명의 존재를알려주는 단서로 볼 수는 없을까요?”
뭐, 추측이지만요, 라며 콜린은 덧붙이곤 어깨를 으쓱였다.
백설의 존재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이든 간에 결국 난쟁이는 정말로 여덟 명이었고, 아무튼 그들은 승리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야기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려야겠네요."
그리 말하며 콜린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라크네와안젤리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 저 두 사람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모양이다.
"돌아가려고?"
"아직 정치는 제 역할이아니라서요."
그는 체셔의 물음에 미소와 함께 답했다.
여러모로 봤을 때, 길드장끼리의 이야기가 오갈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일개 시민인 콜린이 나설 자리는 아니었다.
오랜만에머리를 써서 그런지, 조금 피곤해서 푹 쉬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신나게 달리고 난 뒤의 상쾌한 피로감이었지만.
'이제 정말로 바빠질 테니 가능할 때 쉬어둬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콜린은 뒤뜰을 떠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콜린, 돌아가는 건가요?"
"네. 이제 당장에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그러던 중 그는 백설을 짊어진 마치와 마주쳤다. 당연하지만 백설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치 누나. 그 여자는 이제 어쩔 건가요?"
"글쎄요. 일단 지하 감옥에 넣고 생각하려고요."
"음, 그거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히죽 웃었다.
서로가 백설에게 성적인 고문을 할 생각으로 가득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이제 진짜 피곤해질 테니 조교를 해서라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게 좋겠죠."
콜린은 그리 말하며 기절한 백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음? 피곤해진다니 무슨 의미에요?"
"마치 누나."
그러다 마치가 질문한 순간 갑자기 그의 분위기가 조금 변화했다.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깊은 심연에서부터 무언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콜린?"
"복수, 도와드릴게요."
그것은 흡사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제후 대리에게, 모자 장수에게 복수하고 싶잖아요?"
부드러우면서도 고혹적인 소년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악마가속삭이는 듯 했다.
"복수……."
복수. 그래, 복수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의 심장이 격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랑스런 동생, 마틸다를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린 그에게. 입막음을 위해 자신마저 죽여버리려 했던 그에게.
어떻게 그 감정을 잊을 수가 있을까. 마치 헤어는 그 복수심을 한순간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저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모른 체 했을 뿐.
"모르겠나요? 이제 제후 대리는 저희에게 손을 댈 수 없어요."
그제야 이번 게임의 승리로 자신이 얻은 게 무엇이었는지 마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걱정하지 않고 날뛰는 게 가능한 것이다.
마치는 손을 들어 스스로의 입을 가렸다.
본능적으로 그에게 이런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아……."
"괜찮아요. 숨길 필요 없어요."
하지만 콜린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살포시 내렸다.
마치는 활짝 웃고 있었다. 조금은 광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일방적으로 패는 거 좋아해요? 저는 좋아하는데."
콜린은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붙잡은 손을 입가로 가져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콜린."
마치는 여전히 웃었다.
이 유능하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왕자님을 바라보며 티 없는 미소를 지었다.
복수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