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 사진 세 장(1)
슬슬 해가 뉘엇뉘엇 저물기 시작하는 저녁. 그럭저럭 사람이 드나드는 식당.
그 구석 테이블에 한 여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다리를 떨고 있었다.
머리칼은 진한 갈색의 단발이었고 옷도 나름 단정하게 빼입었다.
마치 남자라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후우……."
실은, 정말로 그러했다.
'진정하자, 안젤리나. 좀 차분하게…….'
속으로 그리 중얼거려도 보지만 쿵쾅대는 심장은가라앉을 생각을 않았다.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코, 콜린!"
겨우 가슴의 고동이 조금 차분해지나 싶었으나 그 순간 식당에 들어온 소년의 모습에 도로 날뛰기 시작한다.
무심코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억누른 탓에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고 만 안젤리나였다.
"괘, 괜찮아. 얼마 안 기다렸어."
"그래요? 다행이다."
콜린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와선 그녀와 마주앉았다.
다만 시선이 마주치자 눈알을 데굴 굴려 피하는 안젤리나였다.
'너무 긴장했는데?'
솔직히 남자 내성이라곤 없는 그 반응은 콜린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제아무리 자기네 길드장이 인정할 정도의 성격 나쁜 여자라 해도 외모는 반반하고 능력도 있는 그녀였다.
남녀가 뒤바뀌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설령 그녀 쪽에서 다가가지 않더라도 하다못해 그녀의 지위만을 노리고 접근할 남자도 꽤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안젤리나 씨도 이번 친선전이 사실상 첫 데뷔라고 했지.'
어쩌면 그녀가 아라크네의 눈에 든 것이 비교적 최근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콜린은 아주 좋은 타이밍에 그녀와 만난 셈이었다. 경쟁자가 생기기도 전에 안젤리나를 붙잡은 셈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안젤리나 씨가 먼저 밥 먹자고 부를 줄은 몰랐네요. 아, 주문 해뒀어요?"
"아니… 아직."
"아, 그러면 제가 할게요. 안젤리나 씨는 이 동네 처음이시기도 하니까."
이곳 주민답게 인기 메뉴를 척척 주문해대는 콜린의모습을 안젤리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콜린이 주문을 하다 말고 힐끔 돌아보니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있었는데 콜린은 그저 배시시 웃어보일 뿐이었다.
"아, 죄송해요. 질문을 해놓고 멋대로 다른 이야기 해버려서."
"그… 아니야. 괜찮아."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주문을 끝마치고서 그는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의 말대로 이번 약속을 잡은 것은 안젤리나 쪽이었다.
"아, 그게… 길드장님이 너랑이야기 좀 해두라고 하셔서."
"아라크네 님이요?"
"길드 간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아, 그게! 딱히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보자고 한 게 아니라!"
그렇게 말을 잇다가 깜짝 놀라며 정정하는 안젤리나였다.
이래서야 그저 아라크네가 시켰기에 그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자 불러냈다고 말하는 꼴이 아닌가.
물론 아라크네에게는 분명 그런 의도가 있었을 테지만, 적어도 안젤리나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콜린과 만난 것은 결코 그런 불순한 의도에서가 아니었다.
'…다른 의미로는 조금 불순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안젤리나는 속으로 그리 되뇌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물론 콜린이 그녀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힐끔. 안젤리나는 콜린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뭐, 역시 합치기로 결정했나 보네요."
하지만 콜린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지금 안젤리나의 상태를 보아선 어차피 등을 떠민 사람이 있었으리라곤 예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분명 친선전 때만 해도 몹시 저돌적이던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이상하리만치 미숙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였다.
'아니, 사실 그때도 뭔가 나사가 빠져 있었지.'
그러다가 콜린은 그때 들었던 협박을 떠올렸다.
어처구니가 없는 그 말에 당시는 무슨 에로만화로 공부했냐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이 세상에 만화가 있을 리 없으니 농담처럼 넘겼는데, 잘 생각해보면 관능소설 정도는 충분히 있지 않겠는가.
'…진짜 그런 지식만 있는 거 아냐?'
왜곡된 지식의 무서움을 새삼스레 실감하는 콜린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머릿속에서 지워두고서 콜린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꽤 큰 결단을 하셨겠는데요."
"뭐…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그렇게 하는 거니까……."
어느새 주문했던 음식이 나오고 콜린은 포크를 집어들었다.
미트볼을 입에 하나 던져넣은 뒤 그는 다시 안젤리나를 바라보았다.
아라크네가 그녀를 보낸 이유는 감이 잡혔다.
얼마 전 체셔와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더니 역시 부점 길드 휘하에 들어오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부점 길드는 이번 게임을 통해 모자 장수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라크네와 안젤리나는 사실상 개인 용병으로 참전한 형태였고, 따라서 게임의 보수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는 곧 모자 장수가 이번 일의 분풀이로 아라크네 길드에 손을 뻗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라크네 길드의 두 사람이 참가했다는 걸 알게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경기의 상세를 보고해야 할 백설이 이쪽에 붙잡힌 이상, 당장에 아라크네의 행동이 전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근원적 계약에 엮여있던 것이기도 했으니 그도 백설의 패배는 알아차렸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자연스럽게 조사를 시작할 테고 어쩌면 아라크네와 안젤리나의 참전을 알아차릴 지도 몰랐다.
과연 세력이 조금만 커진다 싶어도 솎아낼 정도였던 제후 대리가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까?
아라크네 길드에게 무언가 응징을 가하리라는 건 틀림없었다.
따라서 아라크네는 제후에게서 자신과동료들을 보호하고자길드 전체를 이쪽에 소속시키는 선택을 취한 것이다.
"아마도 바빠질 거예요."
"그, 그래?"
"아라크네 길드 말고도 손을 잡고 싶어하는 녀석들은 많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일은 이번으로 끝이 아닐 것이다.
아라크네 길드 외에도 지금의 제후 대리에게 불만을 가진사람들은 형식적으로 부점 길드 소속이 되려고 할 것이다.
현재 부점 길드는 그가 손을 댈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직접적인 무력행사에 들어가면 저쪽에서도 대응을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 직전까지라면 안전하게 행할 수 있었다.
대놓고 제후 대리를 몰아내기 위한 칼을 갈고 있어도 근원적 계약 때문에 정작 개입할 수가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저쪽은 꽤나 똥줄이 타겠지.'
이렇게 되면 유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힘을 기르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제후 대리 입장에서는 명백한 적군이 영토 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니 매일매일이 불안으로 가득하리라.
자고로 속여먹기 제일 좋은 사람들 가운데하나가 바로 마음 급한 사람이다.
"뭐, 기왕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좀 그렇죠? 높으신 분들에게 맡겨두고 지금은 즐겁게 떠들자고요."
"…그게 좋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콜린은 안젤리나를 위해서라도 화제를 돌렸다.
모처럼 관심 있는 사람하고 식사 약속을 잡은 그녀였는데, 정작 거기서 비즈니스적인 이야기만 하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는가.
"그나저나 안젤리나 씨는 곧 떠나시겠네요."
"그래… 일단 내일 돌아가기로 했어."
"아쉽네요──."
술잔을 기울이며 콜린은 말했다. 뽀얀 피부 아래로 목울대가 들썩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안젤리나는 제정신을 되찾고 어깨를 흠칫 떨었다.
"기왕 길드를 병합하기로 했는데 여기 계시면안 되나요?"
"일단 형식적인 거고… 무엇보다 공식적으로 온 게 아니니까 얼른 돌아가야지."
그리고 다른 걸 제쳐두고서 안젤리나의 마차를 타고 온 것이기 때문에 그녀가 남았다간 길드장이 돌아갈 수단이 없다.
아무리 그 안젤리나라고 해도 연애질 하느라 상사에게 그 먼 길을 걸어가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시간이 나면 자주 올게. 전력으로 달리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니까."
"정말요?"
"그, 그럼! 물론이지."
그렇게 답하자 콜린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포개어 잡았다.
안젤리나는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손을 뒤로 뺄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리고… 길드장님이 말해준 건데, 평소에도 대화는 자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아라크네는 살짝 진지한 표정이 되어선 입을 떼었다.
"백설이라는 그 여자가 통신용아이템을 만들 수 있잖아? 포섭에 성공해서 양산할 수만 있다면 멀리서도 교류가 쉬워질 거야."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다른 사람들에게 서둘러달라고 부탁해둘게요."
물론 현대 사회에서 살아오며 통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는 아주 잘 알고 있던 콜린이었다.
"산 너머에 있는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면 정말 굉장한데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라. 엄청 많은 분야에서 쓸 수 있겠지."
그러나 여기서는 일부러 모른 척을 하며 감탄해주기로 했다.
콜린이 그런 반응을 보이자 안젤리나는 마치 자기 업적이라도 되는 양 신이 나서 통신아이템의 굉장함을 설파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게 가장 유용하게 쓰일 곳은 전쟁이라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안젤리나가 거기에 응용할 방법을 깨닫지 못했을 리는 없었으리라.
남자인 콜린에게 괜히 그런 소리를 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크흠, 미안. 나만 아는 소릴 너무 떠들었나?"
"아뇨. 엄청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안젤리나는 문득 헛기침을 했다. 신나서 혼자 떠들던 게 조금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솔직히 귀엽기만 했는데.'
어차피 그녀가 말하는, 어디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다 실현된 세상을 보고 왔던 콜린이다.
나름 미인 축에 속하는 안젤리나가 그런 사소한 것에 감탄하는 모습은 그저 귀엽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콜린?"
"아, 네, 듣고 있어요……."
다만 그런 감상을 품었던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점점 취기가 도는 것인지 꾸벅이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을 안젤리나는 바라보았다.
눈이 풀리고 혀도 조금은 꼬이는 것을 보면 그다지 술을 잘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젤리나 씨이."
지휘를 내릴 때만 해도 그 누구보다 냉철하던 소년이 지금은 고작 약간의 알코올에 완전히 가드가 내려간 상태였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심코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가고 만다.
"조심해."
"아… 미안해요."
다만 그렇게 흐뭇해하던 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좀 더 시간이지나니 몸을 가누지 못하고 테이블에 엎어지려 하기에 안젤리나는 깜짝 놀라며 그를 붙잡았다.
"이제 더 마시면 안 되겠다."
그러면서도 또 잔으로 손을 뻗기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곤 손목을 살짝 붙잡았다.
콜린은 그녀에게 항의하는 마음을 담아 노려보았지만 이미 잔뜩 풀린 눈이라 위압감이라곤 전혀 없었다.
"내 술이에요."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내 술인걸로 하자."
"그런 게 어딨어요……."
툴툴대면서도 콜린은 그녀가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얌전히 잔을 빼앗는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혼자 설 수 있겠어?"
"그야 당연하죠. 자,보세요……."
"…안 되겠다. 데려다줄게."
이번에는 또 비틀거리면서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쓰기에 어깨를 붙잡아 다시 앉혔다.
"혼자서… 갈 수 있어요……."
"일단 계산하고 올 테니까 잠시만 여기 앉아있어."
정말로 술이 들어가기 전과는 딴판인 모습을 보며 안젤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콜린을 반듯이 앉혀둔 채 카운터로 향했다.
"으."
그녀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간 것을 보고서 콜린은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애매하게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 있었더니 목이며 허리며 은근히 뻐근했다.
'나 제대로 한 거 맞지?'
그리고는 구겨진 옷매무새를 조금 다듬다가, 이쪽을 바라보던 어느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꾸벅이던 그가 갑자기 멀쩡해지니 경악한 모습이었다.
"쉬잇."
"……."
콜린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그러고는 안젤리나가 돌아오기 전에 다시 취한 체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걷고 있는 건 한 사람이었다.
"아, 여기에요……."
안젤리나는 목덜미에 전해지는 숨결에 흠칫 떨었다.
콜린이 그녀에게 업혀있던 탓에 등에서는 그의 온기가 전해져왔다.
"안쪽까지 데려다주세요."
현관 앞까지 간 안젤리나가 그를 내려주려 하자 목덜미에 팔을 꽉 휘감아왔다.
"뭐?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남자 집에 들어가는 건……."
"걱정하지 마세요. 집에 누나도 있으니까."
"그, 그래? 그렇다면야……."
잠깐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린 안젤리나였으나 이내 이어진 콜린의 말에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가… 아, 여기 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등 뒤에서 살짝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눈 옆으로 손이 쑤욱 내밀어진다. 그 손에는 자그만 열쇠 하나가 들려있었다.
"저, 실례합니다……."
"누나, 나 왔어─!"
열쇠를 받아들어 문을 연 뒤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안쪽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불이 꺼져있었지만 이내 문이 열리며 방안의 조명이 새어나왔다.
"…안젤리나 씨라고 했던가요?"
"아, 네. 그… 콜린이 조금 많이 취한 것 같아서……."
방에서 나온 것은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분명 한나라는 이름이었을 테다.
자신이 딱히 누구 눈치를 보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콜린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더니 절로 예의가 갖춰졌다.
"그럼 콜린 좀 침대에 눕혀주실래요? 막 나가야 할 일이 생겨서."
"어… 네?!"
"미안해요! 좀 바쁜 일이에요!"
하지만 한나는 안젤리나를 잠깐 정도만 훑어본 뒤 그녀를 지나쳐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
안젤리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는 수밖에 없었다.
'자, 잠깐. 이러면 집에 단둘인 거 아냐…?'
그리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서 침을 삼켰다.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어라?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녀의 목덜미에는 여전히 소년의 숨결이 와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