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36 사진 세 장(2) (36/89)



〈 36화 〉36 사진 세 장(2)

밤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이 들기에 이른 시간이긴 했으나 그래도 충분히 어두웠기에 의아해하며 레니는 현관으로 향했다.

"누구십니까?"
"나야."

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면 그곳에는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성. 레니의 친구인 한나였다.

"이 시간엔 무슨 일이야?"
"오늘 좀 묵으려고."
"갑자기?"

한나는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듯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레니도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한나의 집에는 남자인 콜린이있기에 배려하고 있을 뿐, 만약 그녀가 혼자 살았다면 레니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테니 말이다.

"콜린이랑 싸우기라도했어?"
"아니. …아, 이거 먹어도 돼?"
"안 돼. 독 들어있어."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한나는 테이블에 있던 사과를 집어들며 질문했고, 레니는 미간을 찌푸리곤 그것을 탁 낚아챘다.

여차하면 백설에게 쓸 상황이생길까봐 미리 준비해뒀던물건이었다.

"그런 위험한 건 미리  버려둬."
"아니, 함부로 버렸다가 누가 주워먹으면 어쩌려고? 나중에 소각할 거야."
"하긴 그것도 그래."

 말에 한나는 피식 웃으며 레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과를 제자리에 가져다놓더니 고개를 돌려 한나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튼 콜린도 집에 혼자 두고 무슨 일로 온 거야?"
"콜린 혼자 두고온  아닌데?"
"뭐?"

뒤이은 한나의 말에 레니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발언에 적잖이 놀란기색이었다.

콜린이 집에 없다고 답한 것도 아니고, 혼자 두고 오지 않았다니?

그래서야 마치…….

"콜린이 술에 취해서  안젤리나라는 애가 업어왔더라."
"잠깐만, 그러면 지금집에 단둘이 있다고?!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응?알고 있으니까 일부러 나온 건데? 누나 있으면 괜히 방해될까봐."

뒤이어 레니는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혈기왕성한 나이의 남녀, 그것도 취한 두 사람을 그런 상황에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아주 뻔했다.

더욱이  안젤리나라는 여자는 이전에 콜린을 덮치겠다는 말까지 했던 녀석이지 않은가.

"야, 동생을 지켜줘도 모자랄 판에……."
"걔가 누구랑 만나든 내가 참견할 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한나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건 오직 레니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의문을 품었다. 한나 역시 콜린과 그런 관계를 맺었던 게 아니었나?

저런 반응인 걸 보면 어쩌면 오로지 몸만 요구하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고 레니는 생각했다.

물론 그런 잡생각은 가슴을 억눌러오는 불안감에 순식간에 지워졌다.

콜린이 지금 집에서 덮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은 레니의 성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실이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원하지도 않는데 멋대로 흥분해버리는 몸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정 걱정되면 가볼래?"
"어?"

그런 그녀를 힐끔 바라보고서 한나는 열쇠를 던져줬다.

잠시 멍하니 있던 레니였지만 그녀의 반사신경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열쇠를 붙잡았다.

"……."

작은 열쇠는 금속 특유의 차가운 기운을 전해왔다.

레니는 손바닥에 놓인 그것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아니,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게 보러만 가는 거니까…….'

레니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무의식중엔 콜린이 다른 여자와 몸을 겹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가, 갔다올게."

레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떨렸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누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을 떠났다.

"…하아."

현관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 레니의 퇴장을 확인한 한나는 이마를 짚었다.

'쟤는 어쩌다 저런 변태 같은 취향이 생겨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레니의 성벽을 짐작하기도 했고, 콜린에게 듣기도 했지만, 실제로 반응을 보는 건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전의 회화는 어떻게 보자면 그녀를 위한 일종의 선물이었다.

한나는 콜린과 안젤리나가 섹스를 하고 있으리란 걸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사실 콜린이 그녀와 식사 약속이 있다며 나갈 때부터 대충은 감이 잡혔다.

그는 아마 안젤리나를 다음 타깃으로 노렸던 것이리라.

그리고 조금 전 콜린이 술에 취해 업혀온 장면을본 순간 한나는 추측에 확신을 더할  있었다.

안젤리나야 콜린과 술을 마시는  처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나는 그의 주량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외출 시간을 감안했을 때, 그 시간 내내 쉬지도 않고 마신  아니라면 저만큼 취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콜린은 상대를 앞에 두고도 말없이 계속 술만 들이킬 사람이 아니었다.

요컨대 안젤리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다.

그걸 알아차렸기에 한나는 콜린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전혀 질투가 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콜린을 향한 애정  욕정과는 별개로, 한나는 최근 생존욕구를 크게 느끼고 있었다.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입장이다보니 틈만 나면 콜린과 관계를 하던 그녀였다.

항상 시작은 서로의 성욕을 풀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나가 지치더라도 멈추질 않으니 문제였다.

복상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은 신체적 부담을 분산할 필요가 있었다.

의외로 일부다처제의 시초는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정도다.

그런 면에서 한나는 콜린이 무슨 삼천궁녀라도 만들 생각이 아닌  그의 어장관리를 돕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아, 잠깐만."

'안젤리나는 다른 길드라 자주  만나니 피해 분산이 거의 안 되지 않나…?'

뒤늦게 그걸 깨달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


안젤리나는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섰다.

남자의 방은 처음이다보니 무심코 눈알을 데구르르 굴려 내부를 살폈다.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아 괜히 숨을 코로 힘껏 들이켜도 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업고온 콜린을 침대 맡에 내려놓자 그는 곧장 벌러덩 드러누워버린다.

이불이며 옷이며 구겨지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생각보다도 꽤 취한 듯 했다.

안젤리나는 잠시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취한 남자를 방에 데려와서… 뭐, 그런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녀는 정말로 콜린을 데려다준 뒤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취해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남자를 범하기에는죄책감이 들었다.

전에는 콜린을 협박해서 덮치려고 했던 주제에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사실 그때는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의 강함에 취해 으스대고 있다가, 레니에게 된통 당해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고야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다 콜린에게까지   먹고행동을 돌이켜보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무력으로도 지력으로도 아직 많이 부족한 존재였다.

뒤이어 자연스레 피어오른 감정은 경외와 존경이었다.

물론 그게 콜린을 향한 이성적 호감을 덮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안젤리나는 가능하다면 그와 좋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과 같이저돌적인─까놓고 말해 강압적인─ 수단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녀는 콜린에게 단순한 성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최대한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 생각하며 안젤리나는 방을 나섰다.

옷이 슬쩍 말려올라가 복부를 드러낸 콜린을 놔두고 떠나는  꽤나 힘든 일이었다.

허나 정신적인 성장을 이룬 지금의 안젤리나는 귓가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속삭임을 떨쳐낼 수 있었다.

"…어?"

현관에서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던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레니 언니…?"
"…안젤리나."

레니 테세오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 콜린이 많이 취해서 데려다주느라… 아, 진짜 업어주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안젤리나는 자신이 그녀의 친구 집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상태라는  알아차리고 급히 변명했다.

이전의 안젤리나였으면 강하다는 소문이 도는 레니에게 시비를 걸었겠지만, 앞서말했듯이 길드전이 끝난 후의 그녀는 레니에게도 약간의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 일로 도시에 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먼저 했던 것 역시 레니에게 이전의 무례를 사과하는 것이었다.

안젤리나의 그런 모습에레니는 웃으면서 신경 쓰지 말라며 답해주었고, 그녀에 대한 마음속 평가는 더욱 올랐다.

그러다 너무 딱딱하게 대하지 말고 앞으로는 언니동생 하는 사이로 지내자며 관계가 깊어진 참… 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맞닥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실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콜린, 많이 취했어?"

그런 와중 머뭇거리며 침묵을  것은 레니였다.

"아? 네, 일단……."

콜린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안젤리나는 질문에 답했다.

조금 더 차분한 상태였다면 걱정은 제쳐두고 레니가  여기 있는가 의문을 품었을 테지만, 안젤리나 역시 콜린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 취기가 돈 상태였다.

깊은 생각을 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아무튼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 레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한참 입술만을 달싹이다가 마침내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저,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


'음… 너무 성급했나?'

콜린을눕혀두고 안젤리나는 방을 떠났다.

콜린은 실눈을 뜨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안젤리나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를 덮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건  의외의 결과였다.

'심정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답지 않게 최근 얌전한 모습을 보이던 건 콜린에게 이성적 호감을 갖고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정말로 무언가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은 모양이었다.

콜린은 의도치 않게 그녀를 갱생시켰던 것이다.

다만 탓에 모처럼 만들어둔 상황이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심지어 한나가 빨리 눈치를 채고 자리를 비켜주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복도를 걸어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콜린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은 그냥 씻고 자는 게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안젤리나가 집을 나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발소리가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대화를 하는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나 누나가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는데…?'

어쩌면 콜린의 의도를 눈치 채고 비켜준 게 아니라 정말 무슨 용건이 있어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는 안젤리나가 그를 덮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더라면 정사 장면을 그녀에게 목격당했을 테니까.

한나야 아마 그가 다른 여자와 자더라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안젤리나 입장에서는 여간 어색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응?'

그러나 거기서 더욱 의외였던 것은 다시 발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소리를 들어선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갑작스런 그 움직임에 깜짝 놀라면서도 콜린은 다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조심스레실눈을 뜨고서 콜린은 손님의 모습을 확인했다.

'왜 저 둘이 같이 들어오지?!'

방으로 조심스레 들어온 사람은 안젤리나와 레니였다.

안젤리나가 레니에게 예전 일을 사과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레니가 그런  담아둘 성격도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지금의 상황은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콜린은 잠든 척을 하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당장에 떠오르는 가능성은 둘이었다.

하나는 레니가 콜린의 상태에 불안을 품은 나머지 직접 확인하러 왔다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서 콜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으음… 누구 있어요…?"

어느 쪽이건 간에 의식은 깨어있다고알려두는 편이 나았다.

콜린은 몸을 뒤척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부러 레니 쪽으로는 시선을 향하지 않았고 애초에 눈을 뜨지도 않았다.

"나야."
"레니 씨…?"

아직 취기가 돌고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약간 늘어뜨렸다.

그러자 저쪽에서 잠깐 놀란 듯한 기색이 풍기더니 누군가 걸어왔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레니 쪽이었다.

뒤이어 그녀는 콜린의 턱을 살짝 잡더니 끌어당겼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면 가까이서레니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각도에서 안젤리나는 보이지 않았다.

'…허.'

너무나도 절묘한 각도였기에 콜린은 다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레니의 의도를 알아버린 탓이었다.

물론 콜린의 관점에서만 생각해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녀의 계획에 올라타주기로 했다.

콜린은 배시시 웃으며레니의 목을 팔로 살짝 휘감고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잠깐 당황한 모습을 보인 레니였지만 이내 콜린을 끌어안고 여러 차례 가볍게 입술을 겹쳤다.

"콜린."
"네."

그러면서 레니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몸을 더듬었다.

콜린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다리를 살짝 벌려 애무를 받아들였다.

해도 괜찮다는 의미였다.

"그, 오늘은 눈을 가리고 해보면 어떨까?"
"눈을 가려요?"
"그, 그게 말이지. 그러면  기분이 좋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길래……."

횡설수설하며 레니는 콜린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 눈동자에는 짙은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러면 될까요?"

왜곡된 성벽에 취한 레니의 모습이 콜린에게 야릇한 흥분을 불러왔다.

콜린은 덮고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눈만 가려지도록 덮었다.

그의 움직임을 보며 레니는 침을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이불은 그리 두껍지 않아서 그 너머의 실루엣 정도라면 확인할 수 있었다.

콜린은 숨어있던  다른 인물이 레니 곁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콜린… 그, 벗길게."

레니는 긴장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은 레니가 아닌 또 다른 인물, 안젤리나였다.

레니는 안젤리나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자기 눈앞에서 콜린을 범해달라고 말이다.

'진짜 중증이긴 하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콜린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잔뜩 흥분해서 비부를 문질러댈 그녀의 귀여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주 쿵짝이 맞는 변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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