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51 수수리 사바하(1)
콜린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낮잠을 즐기려 했던 것 같은데 벌써 저녁에 접어들 시간이 되어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면 곁에 누워있는 두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푸른 기운이 도는 은빛. 그리고 은은한 분홍빛.
시안과 헬렐이 알몸으로 콜린과 함께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물론 그냥 알몸도 아니고 여기저기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아, 한나 누나."
그러다가 상체를 일으켰을 즈음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한나가 들어온 탓에 깨고 말았던 것 같다.
"난장판이네."
"…나중에 청소할게."
그 광경에 한나는 잠시 한숨만 쉬었을 뿐이었다.
콜린이 시안, 그리고 난쟁이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난쟁이들이야 백설이 콜린을 침실로 데려가겠다 선언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고, 시안은 아예 같은 자리에서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한나의 감상은 음탕한 연회의 흔적을 둘러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게전부였다.
"……."
다만 저런 꼴을 하고서도 아름다운 건 역시 아름다운 것인지라 한나는 아주 잠깐 넋을 놓고 콜린의 나신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침대에서 콜린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도 스쳐지나갔다.
"영주님이 돌아오셨어."
"벌써?"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전달해야 할 말이 있었던 탓이다.
한나의 말을 듣더니 콜린의 눈이 약간 커졌다.
"우리보다 큰 길드를 집어삼키는 거니까 조금 더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솔직히콜린은 정치적인 절차 같은 건 잘 몰랐다. 이쪽 세계의 것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막연히 오래 걸릴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그였다.
'심하면 한 달까지도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그래도 아무튼 일이 빨리 끝났다니 좋은 일이긴 했다. 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다고 하시진 않았지?"
"그래."
"그럼 끈적거리는 건 씻고 갈게."
그리 말하며 욕실로 들어가는 콜린이었다.
한나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눈을감았다.
동생이 변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결코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싫어하기보단 좋아해주는 게 좋았고, 또 그 몸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준다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어쩐지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불안함이 사라져서 좋았다.
'그때' 이후로 어쩐지 위태로워보이기만 하던 콜린은,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어릴 적의 해맑은 모습을 되찾았다.
이제는 오로지 둘만이 남은 가족이었기에, 한나는 이따금씩 그가 보여주는 모습에 희미한 불안을 느끼곤 했다.
…동생 멘탈을 걱정하면 속옷부터 훔치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하는 한나였다.
"시안, 일어나."
"으… 으음. 한나 씨?"
"정리하고 집에 가야지."
그저 바닥에 널부러진 여자를 깨우는게 지금 한나의 두뇌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어서 와."
집무실에 들어가자 보랏빛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도 콜린을 알아차린 것인지 한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늘 돌아왔는데 일하시는 거예요?"
체셔는오늘 막 귀가한 주제에 집무실에서 그를 맞아주었다. 그 모습에 콜린은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불안해서."
"그거 일 중독이에요."
집무실에는 체셔를 위한 책상과 의자 외에도 낮은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어쩌면여기서 누군가를 맞이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고, 그저 이 저택에 사는 마치와 담소를 할 때 쓰는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야기하는 내내 서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콜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안젤리나 씨도 오랜만이에요."
다만, 선객이 한 사람 있었다.
갈색의 단발머리. 살짝의 야성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콜린은미소를 지었다.
안젤리나 역시 그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어보인다.
당연하지만 체셔가 까마귀 길드를 공격하기 위해선 그곳까지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활약했던 게 바로 안젤리나였다.
지치지 않는 해골마와, 전차에 가까운 이륜마차를 소환하는 그녀는 전력으로 달려 여기서 체셔를 태운 뒤 쉬지도 않고 저쪽 도시까지 이동한 것이었다.
지금 여기 있는 걸 보면 아마 돌아올 때 체셔를 태워준 것 역시 안젤리나였던 모양이다.
"지난 번에 만난 게 그리 오래 전은 아니지 않아?"
"그랬나요? 저는 그리워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는데 안젤리나 씨는 아니었나봐요."
"어…? 아니, 그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농담을 던지자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이 되는 그녀였다.
그 모습에 킥킥 웃으며 콜린은 그녀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제야 놀림을 당했단 걸 깨달았는지 안젤리나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래도 나름 연인인데 자주 보는 게 좋잖아요?"
안젤리나 쪽으로 몸을 살짝 기대며 콜린은 그리 말했다.
"…엥?"
다만 이내 저편에서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체셔가 안 그래도 큰 눈을 휘둥그레하게 더욱 키우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콜린. 레니랑 사귄다고 들었는데…?"
"어? 그거 어디서 들으셨어요?"
"그야 경비대 아이들에게서……."
일부 인원을제외하곤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콜린이었기에 의아해하며 묻자 체셔가 답해왔다.
듣자하니 경비대 내에서는 레니에게 남자가 생겼단 소문이 잔뜩 퍼져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부터 표정이 밝아지더니, 부하한테 갑자기 어느 쪽 셔츠가 낫냐고 질문한다든지. 어디 좋은 가게가 없냐고 물어본다든지…….
그리고 그 상대의 정체마저 공공연한 비밀취급이라는 듯 했다.
'어쩐지 이번 전투 때 추파를 안 던지더라니…….'
전투 당시는 몰라도 싸움을 전후해서 은근히 접근하는 병사가 있을 만도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자신과 레니가 연인 사이가 되었다는 걸 다들 알게 되어버린 모양이다.
"네, 맞긴 해요."
딱히 부정할 건 아니었으므로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체셔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 안젤리나에게로 향한다.
드물긴 해도 나름 일부다처도 허가되는 세상이다. 두 여자를 만나는 것 자체에 편견은 조금 있을지언정 문제는 없다.
다만 그가 레니와 연인이 되었다는 시점과 안젤리나를 처음 만난 시점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조금 고개가 갸웃거려지기 마련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두 명을?
그나마 콜린의 본성이 악하지는 않다는 걸 체셔가 알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면 레니가 어장관리를당하고 있는건 아닐지 의심했을 것이다.
"아, 체셔 길드장님. 너무 걱정하실 거 없어요. 레니 언니랑 셋이서 한 적도 있을 정도니까."
"쿨럭?!"
그리고 뒤이은 안젤리나의 폭탄 발언에 충격을 받았는지 연신 기침을 해대는 체셔였다.
"크흠, 흠… 그래. 본인들이 괜찮다면야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지……."
양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며 체셔는 그리 말했다. 확실히 이쪽 세계의 남자에게 꺼내기에는 너무 느닷없는 화제였던 모양이다.
"뭐, 아무튼 그건 됐고… 콜린, 전에 말했던 물건이야."
이어서 체셔는 책상 한쪽에 올려놓았던 무언가를 이쪽으로 휙 집어던졌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금속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가늘게 이어진 은빛의 체인, 그 끝에는 은으로 장식된 작은 루비가매달려 있었다.
원형을 알 수 없는 파편과, 모습을 슬쩍 내민 아기새가 루비 안에 갇혀 있었다.
다만 털은 푹 젖고 신체에는 생기가 없는 것이 아마도 부화하지 못하고 죽은 시체인 듯 했다.
'크기가 작아서 망정이지…….'
마치 곤계란 같다고 생각하며 콜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엇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모습이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험프티 덤프티. 까마귀 길드가 가지고 있던 번역 아이템이야."
입말을 넘어서 글말까지 번역할 수 있게 만드는 펜던트. 아무래도 이게 바로 그 물건인 것 같았다.
손에 쥔 펜던트를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손이 쑤욱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면 안젤리나가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아, 고마워요."
무슨 일인가 생각하면서도 일단 펜던트를 그녀에게 넘겨주자, 콜린을 살짝 끌어안듯 하면서 목에 펜던트를 감아준다.
그 친절에 콜린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가져온 책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아랍어가 표지에 새겨진 검은 책. 콜린의 존재에 엮여있는 그것이었다.
전생과 현생 양쪽에서 마주하여 지금의 콜린을 있게 만든 그 책이 바로 콜린이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물건이었다.
كتاب العزيف
عبد الله الحظرد
본능적으로 펜던트의 사용법을 깨달을 수 있었다. 콜린은 목에 걸린 루비를 손바닥으로 살짝 감싸쥐었다.
"……하하."
그리고는 그대로 얼굴이 굳어버렸다. 미소를 짓느라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소리의 책]
[압드 알 아즈라드]
"미친."
헛웃음이 나오고 그 다음 어처구니없는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소리의 책.
원어 발음은 아마도 '키탑 알-아지프'.
아랍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콜린이었음에도 그 발음을 알아차릴수 있던 건 이미 그 책을, 더 나아가 그 저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 정확히는 발음을 알아차린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압드 알 아즈라드. 머릿속으로 그 이름을 다시 되뇌어본다. 더욱 유명한 이름은 아마 압둘 알하자드(Abdul Alhazerd)일 것이다.
'미친 시인 압둘 알하자드.'
그리고 그의 저작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며 한 차례 이름이 바뀐다.
──사자의 서,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콜린은 침을 삼켰다.
사실, 아주 조금 정도는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었다.
전생의 정희원이 죽음을 맞은 방식은, 압둘 알하자드의 최후와도 너무나 닮아 있었기에.
물론 크툴루 신화는 러브크래프트의 창작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눈앞에 있는 체셔 캣 역시 루이스 캐럴의 창작이지 않았는가?
압둘 알하자드가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을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아니,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지…….'
아무리 콜린이라 해도 코즈믹 호러에 대항할 자신은 없다. 그건 애초에 인류의 무력함을 전제로 삼은 장르니까 말이다.
그러다가 콜린은문득 무언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안젤리나 씨.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누구였죠?"
"어? 그야 전능하신 태양왕 전하 아냐…?"
여기서도 몇 번이고 들었던 그 이름. 근원적 계약을세상에 이룩하고 뭇 존재들의 입말을 통일시킨 자.
그걸 반대로 생각해보면 온갖 권능을 휘두르는 이 세상의 존재들도 태양계 규모는 벗어나지 않는다고 추정해볼 수가 있다.
'즉, 아무리 강하다 해봐야 원작 수준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것이 다행이라면 또 다행인 일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증기선을 하나 장만해둬야지. 그런생각을 하며 콜린은 펜던트를 벗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벽을 바라본다.
"무슨일이야……."
이내 조금 피곤한 표정의 난쟁이가 그 자리에 나타난다. 그녀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아마이몬이라는 이름이었다.
보다시피 난쟁이들 중에서도 제일 게으른 여자다.
"보관해두세요."
"응?"
그런 그녀에게 콜린은 펜던트를 내밀었다.
난쟁이들의 소환 및 송환에는 기본적으로 그녀들의 소지품도 그 범위에 포함된다.
즉, 물건을 맡긴 채 송환해두면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금고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거 지켜야 되는 거면… 소환은 거의 없겠네."
"아마 그렇겠죠."
"와아, 최고의 인생이네 그거."
그야말로 그녀들을 일종의 도구로서 아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솔직히 꺼려지는 행위긴 했다.
…그 상대가 아마이몬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그녀는 콜린의 펜던트를 곧바로 낚아채더니 나른한 표정에서 내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기쁨을 얼굴에 머금었다.
다른 난쟁이들 대부분이 도구 취급 당하지않는인격체의 삶을 요구했던 반면, 유일하게 방탕하고 나태한 생활을 요구했던 게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한 명이라도 많은 인원이 필요한 상황이라 그녀에게도 도움을 받았기에 역시 불만이 쌓여있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잘못 지었지.'
정말 나태의 이름을 붙어야 하는 건 그녀가 아니었을까. 아마이몬의 소환을 취소하며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버리는 콜린이었다.
그렇지만 아마이몬… 맘몬은 황금의 신을 부르는 이름이니, 앞으로 금고 역할을 해줄 그녀에게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면 내일부터 바로 일하러 올게요."
이어서 콜린은 조심스레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번역 아이템도 있으니 여기저기서 몰려든 편지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드디어 제대로 세력을 불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콜린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갈 거라면 나도 같이 가자."
"안젤리나 씨도 용건 끝나셨어요?"
"오랜만에 너 얼굴 보려고 있던 거야."
그리고 콜린을 따라 안젤리나 역시 일어났다.
이내 두 사람은 체셔에게 인사를 남기고 집무실을 떠났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새어들고 있는 복도를, 안젤리나와 콜린은 나란히 걸었다.
"안젤리나 씨. 오늘 돌아가시나요?"
"아니.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돌아가기로 했어."
"그래요?"
아무래도 그녀는 영주저택에서 방을 빌린 듯 했다.
얼핏 보면 일개 병사에게 너무 큰 호의를 내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영주의 운전기사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안젤리나였다.
이번 성공의 공로자로서 이정도 대우는 받을 만 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콜린은 성큼 다가가서 살포시 팔짱을 꼈다.
"오랜만에 얼굴 보러 왔다고 했죠?"
뒤이어 안젤리나의 귓가에 살포시 속삭이며 말하는 것이었다.
"얼굴만 보고 끝낼까요?"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알아차리고서, 콜린은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