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53 슈프레히펜스터(1)
"어떻게 한 지붕 아래에서 떡을 치는데 저를 안 부를 수가 있나요!"
"어? 화낼 부분이 거기였나요?!"
영주 저택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있는 콜린은 마치에게 혼나고 있었다.
안젤리나를 다시 아라크네 길드로 돌려보낸 날의 일이었다.
"뭐, 농담이에요. 그치만다음에는 끼워줘요."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요."
물론 진심으로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는 쪼르르 다가와선 콜린의 곁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포근한 그 웃음은 자애롭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지만, 하고 있는 말이 '쓰리썸을 하자'이니 외모로 올려놓은 호감도를 곧바로 깎아먹는다.
"…내 집무실에서 왜 그런 화제가 나오는 거야?"
당연하지만 호감도를 깎는 건 콜린이 아니라 체셔 쪽이었다.
보랏빛 고양이는 미간을찌푸린 채 마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콜린.저 녀석은내버려두면 한없이 기어오르니까 적당히 거부해둬. 아니, 밀어내도 달라붙으니까 무조건 거리를 두도록 해."
"저는 괜찮은데요? 마치 씨의 애무 기술도 좀 배우고 싶었던 참이고."
"……여기 정상인은 나뿐인가?"
사실 체셔는 인(人)이 아니라 묘(猫)이므로 이곳에 정상인은 없다.
"아무튼 노닥거리러 온 건 아니잖아?"
성에 관련된 것은 솔직히 꺼려졌기에 체셔는 손을 휘휘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가 입에 담은 것은 콜린의 방문에 대해서였다.
안젤리나와 동침하느라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서, 아침식사 직후 바로 이곳에 온 그였다.
콜린이 단순히 수다나 떨려고 영주의 집무실까지 왔을 리는 없었다.
이 도시에서 그 정도 마이페이스는 마치 한 사람뿐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어제 말했던 대로 오늘부터 일하러 오겠다는 약속을 실천하러 온 것이겠지.
"남아있는 편지들 전부 확인해볼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의 목에는 번역 펜던트─험프티 덤프티가 걸려 있었다.
그는 이전에 해석하지 못하고 넘겨두었던 편지들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까먹었거든요."
체셔가 자물쇠가 걸린 서랍에서 종이 다발을 건네어주자, 콜린은 그걸 받으며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이야기?"
"제3세력에 관해서에요."
당연하지만 느닷없이 '말할 게 있다'라고 해봐야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체셔였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콜린은 잽싸게 첨언했다.
"아아, 저번에 통신 아이템으로 잠시 말해줬던 그거구나?"
거기까지 말하자 체셔는 이전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에 제3세력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콜린에게 한 차례 보고를 받았던 참이었다.
"네, 이쪽 제후국에 개입하려는 세력이 있어요."
콜린은 편지 한 장을 들고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사실 저는 정치 쪽은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이런 방법도 있다는 정도만 알려주고 선택은 여러분에게 맡기고 싶어요."
그리고서 그는 '이건 아마 진심인 거 같네요.'라며 훑어본 편지를 테이블 한쪽에 휙 던졌다.
"다른 제후들 중 하나가 이곳을 침식하려고 한다는 게 일단 제 추측이에요."
만약 그것에 성공한다면 제후국 두 개 분량의 힘을 얻게 되는 셈이니 탐이 날 만도 했다.
거기까지 말하고서 콜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그쪽과 손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콜린은 잠깐 정도 숨을 고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을 때려눕히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어요."
"그렇다는데? 솔직히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야 좋지."
그리고 둘의 반응은 꽤나 호의적이었다.
'역시나.'
그들의 말을 듣고서 콜린은고개를 끄덕거렸다.
제후국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정치 체계를 봤을 때부터 대충 감은 잡고 있었지만, 이 세계는 제대로 된 민족주의라는 게 적용되고 있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외세니 뭐니 하는 것을 떠나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통하는 상황인 것이다.
유일한 문제는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빌린 힘은 본인의 힘이 아니라는 반발이 일어나는 정도다.
'뭐, 그렇게 되면 권력을 내려놓아도 되니까.'
조금 아쉽긴 하겠지만 애초에 그들의 목적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제후 대리의 몰락이었다.
그것만 성공시키면 혁명군의 다른 야심가에게 적당히 권력을 넘겨주고 떠나도 된다.
"지금은 그 외세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점이 난관이지만 말이죠."
그러다가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내정개입은 정치적 규탄의 대상이다. 저쪽에서도 어느 정도 각이 보일 때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콜린은 뭔가 예상이 가는 게 없나요?"
"애초에 저는 제후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요?"
이내 마치가 질문을 해왔고, 콜린의 답을 듣더니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시민으로 살던 그가 정치에 대해 어떻게 빠삭하겠는가.
"설명이 필요한가요?"
"네. 그리고 펜 좀 주실래요?"
콜린은 편지 한 장을 뒤집더니 체셔가 던져주는 펜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마치가 불러주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적어내려갔다.
여디디야
엔키두
테세우스-헤라클레스 가문
제천대성
빨간 망토
노일자대귀일
프리기야의 미다스
대성환희재천
주르투르(대리: 아우둠라)
하얀 여왕(대리: 모자 장수)
바다마녀
베누스
마지막으로 점을 찍고펜을 내려놓은 콜린은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너무 쟁쟁하지 않아요?"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이름이 줄줄이 나오니 슬슬 어처구니가 없어진다.
'제후라는 건 다들 이 정도인가.'
"마치 씨는 여기서 누구 이길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순수한 1대1이면 모자 장수 녀석과 맞붙어도 장담을 못해요."
다르게 말하자면, 계략을 썼다곤 해도 그런 제후를 제압하고 지금 자리를 차지한 모자장수 역시 보통 실력자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브라함 계통이 하나, 그리스-로마가 셋, 메소포타미아, 중국, 한국, 인도, 북유럽이 하나씩. 마지막으로 동화 출신이 셋. 요상한 밸런스로군.'
그러나 단순히 겁먹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모자 장수를 적대하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다른 제후들과 엮일 수 있었으니까.
"그럼 이 중에 직접 만나본 사람은요?"
"여왕님이랑 모자 장수 정도일까요."
사실상 어지간해선 제후국끼리 큰 규모의 교류는 없다는 의미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는 나름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그런 그녀가 다른 제후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말이다.
"체셔 씨는?"
"나는 아예 없고."
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곧 제후들이 일종의 균형을 이룬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싸움에 개입한 제3세력은 그런 균형을 깨트릴 짓을 한 것이고, 그 행동은 엄청난 비난을 받을 행동일 것이다.
"여기 개입했던 사실을 공표하겠다며 협박할 수도 있겠네요."
그 사실을 숨기고 싶다면 이쪽에 협력하라는 식으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는 게 가능하리라. 콜린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게 누군지 알아야 가능한 일이잖아?"
체셔는 조금 미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몹시 비난받을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데 신경을 쓴다는 소리이니 말이다.
실제로 상대는 까마귀 길드에 협력하면서 비밀 유지 조항을 추가할 정도였다.
"뭐,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요."
한숨을 쉬며 콜린은 보란듯이 편지를 집어들었다.
"저희가 왜 굳이 오는 사람 다안 받아주고 이런 작업을 거치고 있죠?"
"그야 제후 대리 쪽의 내통자를 피하기 위해서… 아, 그렇구나."
이내 체셔는 무언가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오는걸 기다리면 돼요."
제후 대리는 한동안 공포정치를 펼쳤다.
부점 길드가 이렇게 들고일어나기 전까지는 다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바싹 엎드려 있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인물을 연기하며 그에게 칼을 꽂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자가.
"사실 까마귀 길드를 병합하는 게 훨씬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대충 한 달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생각했다.
그리고 그 동안 제3세력이 '가짜 충성파'에게 접선하면 그 경로로 협상을 하는 게 콜린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단 말이죠."
까마귀 길드 때문에 한동안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일찍 다음 행동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모처럼 일이 잘 풀렸는데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기엔 아깝다는 거죠?"
"마치 누나 말 대로에요."
뒤이은 마치의 말에 콜린은 긍정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면 조금 더 나은 수단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흐음……."
그러다가 체셔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는 싸움한 번에 끝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도 동감이에요. 내전이 벌어지면 피해자가 너무 많이 나와요. 저 하나 복수하자고 그러는 건 조금 꺼려지네요."
두 사람은 이번에도 최대한 단기간에 끝내고 싶다는 통일된 의견을 내놓았다.
콜린도 그들의 말에 납득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길드, 부점은 갈 곳 없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였다.
그런 걸 만들고 관리할 정도면 체셔는 꽤 정이 깊은 인물, 아니, 고양이일 것이다.
마치도 복수라는 목적을품고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참고 있던 여자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내전이 일어나 민간인 피해가 확대되는 건 그다지 기꺼운 일이 아니겠지.
"즉, 일기토로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게 제일이라는 거네요."
"그야 그렇죠. 물론 그 비겁한 남자가 받아들일 리 없겠지만."
마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일단 협박해서라도 테이블로끌어내면 되잖아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콜린은 피식 웃었다.
방금 막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참모는 그걸 이루기 위한 책략을, 가장 좋은 길을 내놓을 뿐이다.
"…이따금 보면 너는 나보다 더 길잡이 같다니까."
체셔가 쓴웃음을 지었다. 또다시 무언가 계략이 떠올랐다는 듯한 콜린의 표정을 보았던 탓이다.
"하지만 협박이라고 해도 무슨 방도가 있죠?"
"이게 있잖아요."
그러더니 콜린은 손가락으로 편지를 톡톡 두들겼다.
물론 편지 자체가 아니라 그가 메모해둔 제후들을가리키는 것이리라.
"외세의 개입을 바라지 않는다면, 누가 끼어들기 전에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자고 말이죠."
제3자의 개입을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물론 당사자들끼리 잽싸게 일을 마쳐버리는 것이다.
"모자 장수가 외세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제3자와 협력하면요?"
"그 경우에는 이쪽은 그걸 까발리고 명분으로 삼아 다른 협력자를 구하겠다고 말하면 되죠."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제후들 간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건 물론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어떤 제후가 사태에 개입했듯이, 모두가 세력 확장에 관심이 없지는 않다는 것역시 사실이었다.
알맞은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타국을 침략할 수 있는 준비가 된 녀석들은 분명히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명분만 던져주면 그들의 협력을 받아낼 수 있다.
"다만 상반되는 두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으면 협박의 강도가 흐려진단 말이죠. 그러니 짧고 굵게 한 방 날려줍시다."
그리고 콜린은 다시 펜으로 편지지 구석에 문장 하나를 거침없이 써내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체셔의 책상에 탁 내려놓는다.
체셔는 그것을 보더니 잠시 눈을 크게 뜨곤, 다시 콜린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삼파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고양이의 얼굴을 콜린은 씨익 웃으며 마주보았다.
"그 남자의 계획이 뭐든, 일단 테이블로 나오는 수밖에 없을 걸요?"
만약 그가 제3세력의 개입을 꺼려하고 있다면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될 것이다.
'제3세력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다. 그러니 우리끼리 끝을 내자.'
혹은 조금 더 나아가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아예 제3세력을 끌어들여서 이파전으로 만들어버릴까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 제3세력이라는 게 뭔지도모르고 협력해 줄지는 더욱 모르지만, 아무튼 시장에서는 물건을 받기도 전에 판매 계약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 않은가?
그리고 모자 장수가 만일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한다면─혹은 이미 협력하고 있는 중이라면─ 이렇게 이해될 것이다.
'그쪽이 다른 제후의 협력을 받으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삼파전을 사파전으로 바꿔서 깽판을 쳐볼까 하는데, 그게 싫다면 테이블로 나와라.'
또한 '우리'라는 표현 역시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다.
부점 길드의 의견일 수도 있고, 반 제후 대리 연합의 총의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물밑으로 협상한 4번째 세력의 의견일지도 모른다.
"뭐, 개인적으로는 외세 개입을 꺼릴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조용히 쿠데타를 일으키고 옥좌를 차지한 권력의 아귀(餓鬼), 혹여나 자신에게 반기를 들까 겁나 공포정치를 펼치는 편집증 환자.
그런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기도 전에 외세의 개입을 인정하려 들 리가 없다.
까놓고 말해서 외세가 나라를 장악해버리면 그 자신도 갈아치워질 수 있는 입장인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편지 한 통만 보내면 빠른 시일 내에 연락이 올 거예요."
"…어떻게 이런 계략이 툭툭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네."
체셔는 이마를 짚으면서도 콜린의 메모를 고이 접어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마 빠른 시일 내에 편지가 보내질 거라고 콜린은 짐작했다.
"뭐, 아무튼 원래 하려던 일이나 계속하죠."
콜린은 다시 소파에 앉아 편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여도 되는 길드와 그렇지 않는 길드를 구분하는 그 작업은, 일곱 시간 정도가 지나자 끝이 났다.
─그리고, 제후 대리로부터 초청장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