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 정직한 하인(2)
백토라는 존재에 대해 평하자면, 그야말로 괴물이라는 표현 외에는 쓸 수가 없었다.
귀가 길다는 점만 빼면 이름과 다르게 곰에 가까운 형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하얀 여왕 쥬브를 제외하면 그 육탄전 능력은 마치 헤어와 함께 제후국 내에서도 최고에가까운 수준이었다.
이른바, 여왕의 두 마리 토끼.
"……."
그리고 지금 그런 이름으로 불리던 두 존재는 지금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백토는 충직하고 굳세지만, 그만큼 우둔하고 독선적인 자였다.
또한 무엇보다도 투쟁과 명예를 즐기는 전사였다.
그런 백토가 보기에 마치 헤어라는 여자는 매우 비겁한 자였다.
힘이 있으나 간사하다. 그녀는 자기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정당한 결투조차 거부하곤 했다.
최후에는 그녀를 받아준 여왕에게 반역을 일으키고 도망치기까지 한 최악의 인물이었다.
듣기로는 변방에 숨어서 남자나끼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지.
"신호는 이걸로 하죠."
백토는 마치가 동전을 꺼내어 하늘 높이 던지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히죽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드러났다.
겨우 저 비겁자를 여기까지 데려올 수 있었다.
신성한 결투의 장에서 반역자를 때려눕힌다는 통쾌함.
그리고 오랜만에 즐길 수 있는 '진짜 투쟁'에 대한 기대감.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었다.
백토는 당장이라도 달려들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마치 헤어도 자세를 낮춰 돌진을 준비했다.
그녀의 손에는 랜스라고도 불리는 기병창이 들려 있었다.
창이라는 무기가 낼 수 있는 전술의 폭을 포기하고 오로지 질량과 충격력에만 모든 것을 실은 무기.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효율을 내기 위해선 최대한의 힘을 가할 수 있게 말 위에서 사용해야 하는 물건이다.
하지만 비록 찰나에 가까운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말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괴물에게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토는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희열에 빠진 상태였다.
'와라. 마치 헤어.'
그녀가 온힘을 실어 돌격해온다면, 자신도 마찬가지로 달려들어 정면에서 받아칠 것이다.
거기에 전술이나 기술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바위 두 개를 부딪쳐서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 겨루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백토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동전이 허공을 가르고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진다.
땡그랑. 지면에 떨어진 동전이 소리를 내며 한 차례 튕겨올랐다.
백토는 호흡을 들이켰다.
"……?!"
──그리고 그것에게 호응해준 것은 뒤통수를 후려친 슬레지해머, 통칭 오함마였다.
×
백토는 괴물이다.
얼핏 보면 비하적인 표현일 수 있겠으나, 전사에게있어선 이만한 찬사도 없을 것이다.
"마치 헤어, 이 비겁한 년…!"
솔직히 말해서 마치는 지금 그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하얀 여왕과 마틸다가 아직 깨어있을 때, 그러니까 마치가 아직 수도에 있었을 때 이따금씩 이런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마치 헤어와 백토 중 누가 더 강할까?
그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매번 승부를 보자고 소리를 쳐대던 백토였지만, 마치는 한 차례도 그 제안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때문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타칭 토끼가 말하는 '결투'는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토의 결투를 받아들이는 녀석은 자기가 백토보다 강한 줄 착각하는 얼간이 정도였다.
결국 두 사람이 부딪힐 일이 생기기도 전에 사건이 터지며 마치가 변방으로 도망친 바람에 누가 더 강한지는 아직 판가름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수준을 넘어선 자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마치 헤어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아마 정면승부를 한다면 자신이 근소하게 밀릴 것이라 판단했다.
그 정도로 백토는 강했다.
그렇다면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콜린이 내놓은 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약간의 격차는 수의 폭력으로 극복한다.'
콜린은 그녀에게 권능을 빌려주었다. 벌써 세 번째 주인을 만난 난쟁이 소환의 권능이었다.
그래서 동전에 시선이 끌린 틈에 난쟁이를 공중에 소환해 슬레지해머로 백토의 머리를 내려찍었는데…….
"당신, 더럽게 튼튼하네요."
바닥에 널부러진 난쟁이의시체를 바라보며 마치는 한숨을 쉬었다.
잠시 꿈틀거리던 난쟁이는 마침내 숨이 끊어졌는지 빛의 입자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다.
"감히 신성한 결투의 장에…!"
"제가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해줬거든요. 약자의 계책은 비겁한 게 아니라고."
백토의 새하얀 털이 검붉은 피로 물들고 서로 엉켰다.
붉게 변한 머리와 손.
그러나 한손을 적신 핏덩이는 이내 사라진다. 거기 묻어있던 건 난쟁이의 피였기 때문이었다.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망치로 머리를 쪼갰는데 조금 비틀거리는 게 전부라니. 어이가 없어서 마치는 웃었다.
그녀조차도 저기에 맞았더라면 다시 일어나기까지 최소한 1분은 걸렸을 텐데.
"어쩔 수 없네요. 한 방에 끝낼 수 있길 바랐는데."
이내 마치는 손가락을 퉁겼다.
그와동시에 네 명의 난쟁이가 백토를 둘러싸듯 소환된다.
'이건… 뭐하는 짓이지?'
그런데 그 넷은 어째서인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둔 상태였다.
굳이 따지자면 발도술 내지는 거합도라고 불리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기 위한 자세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작 뽑을 검이 없다.
기이한 이 상황에 잠깐이지만 백토의 사고가 정지했다.
"…윽!"
그렇지만 뒤이어 갑자기 몰려드는 살기에 백토는몸을 급히 돌렸다.
들려오는 것은 혀를 차는 소리.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백토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있던 곳에 그어지는 검을 볼 수 있었다.
이내 다시 사라지는 난쟁이들.
"레니 테세오의 무구인가!"
그제야 백토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들은 적이 있었다. 레니 테세오는 뽑을 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명검을 가지고 있다고.
타인의 권능에 이어서 아이템까지 두 개나 빌려오다니. 비겁한 데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백토는 분노에 차서 마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마치는 쏜살같이 백토의 앞으로 도약했다.
창은 어느샌가 본래의 단창 형태로 돌아온 상태였다. 백토는 팔을 들어 휘둘러진 그 창을 막아낸다.
반대쪽 손으로 그녀에게 발톱을 꽂아넣으려는 찰나 또다시 난쟁이들이 소환된다.
거기에 주춤한 사이 마치는 창으로 백토의 공격을 흘려내었다.
다시금 난쟁이의 검이 나타난다.
"큭……."
그것을 보고 회피하려 했지만 마치와의 연계 탓에 차마 온전히 피해내지 못한 검이 옆구리를 쓸고 지나갔다.
'보고 피하는 건 무리인가!'
누가 검을 들고 있는지 확인하고서 회피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사지선다. 그러니 누가 검을 갖고 있는지 맞힐 확률은 25%.
마음 같아서는 미리 난쟁이들을 쓸어버려 그 확률을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었지만 마치 헤어를 상대하며 그럴 여유는 없었다.
다시금 찔러들어오는 창을 피하고 발톱을 휘두른다.
마치는 몸을 살짝 숙이며 측면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깊게 찌른다.
뒤로 크게 도약해 마치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난쟁이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이번엔어디지? 앞? 뒤…?'
찰나의 순간에 판단해야만 했다.
'방금은 왼쪽이었으니까 어지간해선 연속으로 두 번은…….‘
그리고 백토는 왼쪽으로 돌진하며 난쟁이의 포위를 돌파하려고 했다.
"미, 미안해요. 오답이라서……."
이윽고 백토에게 찾아든 것은 어째선지 사과를 하는 난쟁이의 목소리와 어깨에 꽂힌 검이 가져오는 통증이었다.
그 난쟁이는 백토의 돌진에 들이받혀 몸이 으스러지는 와중에도 백토에게 꽂은 검을 다시 뽑아 다른 난쟁이에게 되던졌다.
눈앞의 난쟁이는 죽어 빛으로 되돌아갔고 나머지 난쟁이들은 다시 사라졌다.
하지만 거기에 어떠한 감상을 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다시금 손에 든 창을 기병창으로 바꿔온 마치가 백토에게로 돌진해온 탓이었다.
"젠장…!"
또 나타난 네 명의 난쟁이를 보고서 백토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다가 백토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결코 하고 싶은 행동은 아니었지만, 사방을 둘러싼 네 명을 확실히 피하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공중전인가요! 저도 그거 꽤 좋아하는데요!"
높게 뛰어오른 백토를 보고서 마치는 씨익 웃더니 창의 형상을 바꾸었다.
그리고는 멀리뛰기를 하듯 장대를 바닥에 내려찍고 그 반동으로 뛰어올랐다.
"마치 헤어…!"
"그렇게 이름을 잔뜩 불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백토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창대.
당연하지만 허공을 걸어다니지 못하는 백토 입장에선 팔을내어주고 머리를 지키는 게 그나마 최선이었다.
'이래서 뛰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지만 그렇다 해서 휘두르는 검을 가만히 맞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았는가.
마치의 공격에 맞아 빠른 속도로 바닥에 꽂히며 백토는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흙먼지를 흩날리며 백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명을 상대하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얼른 균형을 잡고 돌파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
이미 네 명의 난쟁이가 백토를 둘러싼 상태였다.
설령 백토가 자리를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어차피 바뀐 그 자리에서 포위당했으리라.
'회피는 포기한다.'
뒤늦게 백토는 직감했다. 어차피 잔머리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다른 잔챙이였으면 압도적인 힘으로 계책을 찢어버렸을 테지만, 마치 헤어는 출중한 무력 역시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공수가 바뀌었다.
마치 헤어는 공중에 떠있는 상태라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한 방 먹여줄 차례였다.
등 뒤에서 살점을 써는 통증이 몰려왔다.
난쟁이가 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러나 백토는 그 고통을 꾹 눌러 참았다.
떨어진다.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마치 헤어가 사정거리 내에 들어온다.
어깨에 힘을 주고 발톱을 세차게 휘두른다.
그리고, 온힘을 실은 백토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뭐?"
백토는 스스로가 본 것을 믿지 못했다.
발톱을 휘두르는 순간, 마치 헤어는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도약했다.
"──안녕히 가시길."
우아하게 바닥에 착지한 마치가 순백의 창으로 턱 아래에서부터 꿰뚫어버리기 직전까지도, 두개골을 관통한 단창이 기병창의 형태로 부풀어올라 머리를으스러뜨리는 순간까지도, 백토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것이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파악한 것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시커먼 책, 그리고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뿐이었다.
×
파르르. 콜린의 검지가 경련했다.
그 감각에 그는 남몰래 웃었다.
마치가 카드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콜린이 백설의 권능을 얻은 다음 날, 그는 몇 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그 역시 권능 보유자가 되었으므로 근원적 계약을 선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백설과 관계를 맺을 때의 기억 탓에 계약에 강제성이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증이 있었다고 한다면, 바로 그 강제성이 어디까지 적용되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설이라는실험체도 생겼겠다 이것저것 실험을 해본 결과, 썩 나쁘지 않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온 결과를 응용한 게 바로 지금의 신호였다.
콜린이 마치와 맺은 계약의 내용은 그녀가 어떤 노래를 부르면 반드시 그가 검지를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근원적 계약을 이런 식으로 써먹어보자는 제안에 다들 그를 기이한 시선으로 보긴 했지만, 아무튼 편리한 아이디어라는 건 사실이었다.
결국 남들 몰래 간단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콜린의 의견에 따라주긴 했지만 말이다.
마치를 보조하고자 추가로 맺은 계약 역시 이를 응용한 것이었다.
콜린의 책, 알 아지프는 어느정도 그의 의사대로 움직일 수 있다.
만약에 이걸 숙련자가 이용할 수만 있다면 전투에 몹시 도움이 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그리 간단히 양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콜린은 마치가 특정 신호를 하면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책을 이동시켜준다는 계약도 맺어두었다.
'…다행이다.'
아무튼 콜린은 그녀의 승리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카드를 얻었다는 것보다 그녀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권능을 빌려주는 게 전부였다.
무언가 조언을 해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전투 센스에 있어서만큼은 마치 쪽이 더욱 뛰어날 터였기에 괜히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영 카드가 안 붙네요. 죽을게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있을 때는 아니었다.
콜린은 한숨을 쉬며 카드를 내려놓았다.
"저런. 오늘은 운이 안 따라주시는 모양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은 검은 머리칼을 올림머리로 정리한 정장의 여성, 유디트였다.
그녀 앞에는 54개의 칩이 놓여 있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요."
"여유를 갖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얼른."
콜린은 미간을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여섯. 그에게 남아있는 칩의 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