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2화 〉72 Because Poe wrote on(6) (72/89)



〈 72화 〉72 Because Poe wrote on(6)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고급스러운 정장과 모자.

그러나 그것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사내는 급박하게 달리고 있었다.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어서 마치 광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거냐, 하타."

그리고 수도의 시벽,  문 앞에는 어느 노인이 서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그는 낄낄 웃으며 모자 장수를 바라보았다.

"당장 도시를 뜰 거다, 할멈!"

모자 장수는 거칠게 숨을 토해내고서 외쳤다.

"역시 페스트를 풀었던  도망치기 위해서였나."

그러나 카티는 여전히 느긋한 모습으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확실히 오로지 동귀어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묘했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왜 굳이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자살을 했을까?"

노파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최후의 발악으로 녀석들에게  방 먹여줄 심산이라면 어째서 그랬던 걸까."

아공간 내부는 페스트로부터 안전한 지역이다. 게임을 끝내버리면 모자 장수 본인도 위험에 처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공간에 갇혀 있던 백설과 체셔마저 풀려나게 된다.

체셔는 그렇다 쳐도 백설은 불사신. 과장을 조금 보태면 페스트의 천적에 가까운 존재였다.

물귀신 작전이었다면 최대한 게임을 질질 끌어야 하는  올바른 선택이었다.

반대로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더 구체적으로는 모자 장수가 급히 아공간을 나와야 했던 이유가.

"페스트를풀어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 후  틈을 타 도망친다. 맞지?"
"할멈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어. 그냥 따라오기나 해."

모자 장수는 혀를 차더니 그녀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무슨 짓이지?"

하지만 카티가 그 어깨를 붙잡는다.

모자 장수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놔. 할멈."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없지."

모자 장수의 으르렁대는 목소리에 카티는 손을 떼었다.

그의 명령을 따른다는 계약이 되어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말이다. 방금 추측은 내가 떠올린 게 아니거든."
"뭐?"

그러다 카티는 여전히 낄낄 웃을 뿐이었다.

모자 장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의아함으로 물든다.

"저쪽의 콜린이라는 녀석에게서 전해들은 말이야. 아니,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

체셔와 백설이 급히 그에게 달려온 시점에서 이미 모자 장수의 도주 계획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대응도하지 않았겠는가?

"푸하하핫! 그래! 그렇단 말이지?"

거기까지 깨닫고서 모자 장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 모자 장수에 대한 대응으로 카티를 보낸 같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명령을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그녀를 보내어 가로막을 생각을 하다니 운도 지지리도 없는 소년이었다.

"어리석어도 어쩜 이렇게 어리석을 수……."

모자 장수는 웃었다.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시야가 낮아진 것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의 하반신이 사라져 있었다.

모자 장수가 아래쪽을 내려보았을 때, 그는 이미 허리 아래쪽이 잘려나간 상태였다.

"하타. 정말로 어리석은 건 너다."

카티는 쪼그려 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한숨을 쉬었다.

학습 능력이라는 없는 걸까. 아니면 너무 오만한 걸까.

콜린은 이미 그에게 일격을 꽂아넣은 상대이지 않은가.

 번 상대를 과소평가하기 시작한다면 이만큼이나 어리석어지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카티는 눈매를 씰룩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투 능력도 없는 이 노친네를 왜 홀로 보내겠냐는 말이야."

삐그덕. 모자 장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낡았지만 단정한 옷을 차려입은, 또  사람의 노인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얼굴에서는 인자함이 가득 넘쳐흘렀지만, 그녀의 눈빛에서는 연륜이 돋보였다.

"여… 왕?"

무심코 그녀를 부르고 마는 모자 장수였다.

"미안하다, 하타.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고 말았던 걸까."

쥬브는 신체가 잘려나간 그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모자 장수의 얼굴을 붙잡았다.

"아니, 죄송… 죄송했습니다. 여왕님! 잠시, 그러니까 제 말을……."

우득.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 그리고 동시에 모자 장수의 신체가  하고 사라져버렸다.

본래라면 콜린은 모자 장수를 살려서 써먹으려 했던 모양이지만… 카티는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친구는 모자 장수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카티는 그가 더 고통받아도 괜찮다는 입장이었으나, 쿠데타를 당했던 본인이 그러고 싶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무척이나 아쉬워하던 콜린이었지만, 다른 일에 협력해주는 대가로 결국 그 역시도 이번 처분에 동의했다.

"이제 좀 쉬고 싶은걸."
"계속 자고 있었잖아?"
"잠은 쉬는 게 아니야."
"…그렇군."

그러다 문득 하얀 여왕이 천천히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일은 끝내고 쉬어야겠지."

그녀의 말에 카티는 그저 로브 아래로 얼굴을 감출 뿐이었다.

오늘, 친구가 돌아왔다.


×

건물이 으스러진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오지만, 적어도 잔해 아래에서 들려오진 않았다.

"이쪽은 대피 완료에요!"

쫓고 쫓기는 안젤리나와 페스트.

그 경로 앞에서 마치가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는탓이었다.

그녀의 외침을 듣고서 안젤리나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처음에는 오로지 뼈만 존재하던 해골마는 어느새 시꺼먼 기운을 잔뜩 휘감고 있었다.

반대로 그 뒤를 쫓는 괴수에게서는 검은 안개가 꽤나 가신 상태였다.

"아직 멀었… 으끄윽?!"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거 같아요!"

백설이 괴물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저 멀리 뻥 하고 날아갔다.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며 안젤리나는 더욱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발톱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옆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다가 문득 안젤리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색이 깃들어 있었다.

"다, 다 됐어요!"
"마치 씨!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때려눕혀요!"

드디어 끝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레니는 저 멀리 있던 마치에게 외쳤다.

"예?!"
"이제 통하니까 쥐어박으면 된다고요!"
"진짜 그게 봉인 방법 맞… 윽?!"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자신이 파악한  맞는가 되물으려 했던 레니였으나, 순간 집중이 흐트러진 탓에 괴물이 부웅 휘두른 팔에 맞아 날아가고 만다.

"레니…!"
"괜찮… 쿨럭, 괜찮습니다……."

어디 한 군데 박살나지 않은 게 기적이다 싶을 정도의 충격량이었다.

근처에 있던 가게에 곧장 쳐박힌 레니는 팔을 들어올려 일단 무사함을 알렸다.

마치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기만 하다가 괴물에게 덤벼들었다.

심하게 다치진 않은 듯 했으니 레니를 구하는 것보다는 페스트를 퇴치하는  우선이라고 여겼던 탓이다.

앞으로 크게 도약한 마치는 괴물의 허리 부분에 검을 박어넣고 힘껏 그었다.

상처가 헤집어지며 시꺼먼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점은 더 이상 상처가 재생되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이어서  위에 올라타 다시 한  검을 휘두른다.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페스트의 손이 뻗어왔지만 마치는 공중에서 몸을 빙글 돌려 괴물의 팔 위에 안착한다.

그리고는 비탈을 미끄러지듯 쭈욱 내려와 괴물의 눈앞까지 도약해 이마에 검을 찔러넣었다.

"────!!"
"윽…!"

괴물이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그 힘찬 움직임에 마치는 검을 놓치고 휙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지면에 부딪히기 직전에 겨우 낙법을 펼치긴 했으나, 무기를 놓쳐버린 손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였다.

괴물은 고통스러운지 사방으로 팔을 마구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급소를 찔렀으니 보통 생물이었으면 죽고도 남았을 상황인데도…무심코 혀를 차버리게 된다.

또한 괴물은 무지막지하게 튼튼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어느 정도는 현명했다.

페스트는 조금 전 자신을 공격한 마치를 덮치기보단 우선 자기 힘을 되찾는  먼저라 판단한 것인지 안젤리나에게 달려들었다.

거구가 거리를 내달리자 쿵쿵 지면이 울렸다.

이제 다 끝났겠거니와 싶어 아주 잠깐이지만 마음을 놓고 있던 안젤리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급히 고삐를 당겨 속력을 높이려 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속도라는  느닷없이 끌어올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모습을 바라보고서 마치는 몸을 던졌다.

저 커다란 괴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꽉 잡아요!"
"으아악?!"

그렇다면 안젤리나 쪽을 이동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온힘을 다해 그녀에게로 달려든 마치는 팔을 모아 몸에  붙이고, 어깨로 안젤리나가 타고 있던 마차를 들이받았다.

그 충돌에 익살스러울 정도로 마차와 함께 뻥 하고 날아가는 안젤리나였다.

그녀가 괴물의 경로에서 벗어난 걸 확인하고서 마치는 다급히 몸을 굴려 자리를 피했다.

사실상 몸을 던진 것에 가까웠다.

"…이런."

그러나 마치가 있는 힘껏 도약한것 이상으로 페스트는 너무나 거대했다.

그녀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괴물의 발톱을 볼  있었다.

'다리를 포기하더라도……."

그래도 마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예 회피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바닥에 반쯤 널브러진 상태에서 팔의 힘만으로 몸을 억지로 들어올렸다.

이내 겨우 위치를 조금 정도 옮길 수 있었던 마치였다.

이 위치면 여전히 하반신은 박살이 나겠지만, 상반신까지 같이 작살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어?"

쾅!

거대한 폭음이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의 일이었다.

충격을 각오했던 마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괴물이, 그 거대한 페스트가 공중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페스트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

그것은 양과 염소를 뒤섞어 놓은 듯한 새하얀 짐승이었다.

하지만 결코 양도 염소도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신체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눈알이 달려있었기 때문이고, 발굽이 달린 다리가 여섯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왕님?!"

쥬브. 보병관의 제후가 괴물을 들이받아버린 것이었다.

[…미안하구나. 하타 녀석을 끝내고 오느라 늦었단다.]

이어서 머릿속에 울리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주 다정했지만 동시에 섬뜩하기도 했다.

[고생했다. 헤이어.]

짐승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내뱉더니 그대로 곧장 도약해 입을 쩌억 벌렸다.

이어서 페스트의 목덜미를 베어물었다. 시꺼먼 액체와 기체가 사방으로 마구 퍼졌다.

꾸득꾸득 하고 고깃덩이가 기이하게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제후님의 힘인가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안젤리나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헤어와 레니 테세오. 그녀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강하던 두 사람이 고전하던 상대였다.

그런데 아무리 두 사람을 상대하느라 지치고만신창이가 되었다곤 하나, 그런 괴물을 단숨에 제압해버린 제후의 위용은 그야말로 아득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까지 멈출  있던 모자 장수조차 봉인된 괴물을 풀고 기습까지 해가며 겨우 제후를 제압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어서 페스트는 완전히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검게 물들었던 하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하얀 짐승은 점점 스스로의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한 사람의 노파가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늙은 노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웅대한 기운이 그곳에 있었다.

또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녀의 머리 위에는 찬란한 왕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이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었는데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지는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는 여왕의 풍모를 잔뜩 사방으로 흩뿌리고있는 존재였다는점이다.

안젤리나는 급히 마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었다.

제후가 직접 나왔는데 감히 일개 시민인 그녀가 마차 위에서 내려다보고만 있다면 얼마나 예의 없는 짓일까.

오만한 백설이나 마이페이스인 마치조차도 한쪽 무릎을 꿇고서 예를 갖출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오랜만이구나, 헤이어."
"…네, 그렇네요. 여왕님."

하얀 여왕은마치에게 다가가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치도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보았다.

"내 탓에  명예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하얀 여왕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모자 장수의 쿠데타로 그녀가 쓰러지며  원흉으로 마치 헤어가 지목되었던 것이다.

"아뇨. 그건 그 녀석의 문제였던 거니……."
"내가 대처하지 못한 탓도 있지."

마치 헤어가 명예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녀의 명예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고, 또한 무엇보다도 여기에 휘말린  오로지 마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여동생으로 여기던 마틸다 역시 죽음을 맞이하고 만 것이었다.

"마틸다는, 어떻게든 되돌려주마."
"…안 됩니다."

그러나 마치는 고개를 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은 건 아니란다. 혼이 갈기갈기 찢겨 깨어나지 못할 뿐이지."
"그렇기에 더더욱 돼요."

마치 헤어는 여전히 그녀의 제안을 거부했다.

"혼의 값은 혼으로만 치른다……. 마틸다를 되살리기 위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그건  아이가 바라는 게 아닐 테니까요."

마틸다는 남들을 위해서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모자 장수에게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다 해서 타인을 희생시켜가며 목숨을 건지고 싶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저 자신이 멋대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마치가 알고 있는 마틸다는 그러한 아이였다.

"모자 장수라면 어떨까?"
"한 사람의 목숨 정도로 되돌릴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압니다."

 사람을 되살리는 데 비용이 고작 한 사람의 목숨이라면  세상에는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로 금방 가득 차버릴 것이다.

애초에 에너지라는 게 어디 100% 일대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던가.

…반대로 말하자면 마치도 그 작자를 죽여서 동생을 살리는 것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마틸다가 비교적 양호한케이스라고 해도……."
"죽지 않고 영혼을 보충할 방법만 있으면 괜찮다는 말이니?"
"…예?"

뒤이은 말에 마치는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 제안은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 너희  남자아이가 꺼낸 이야기야."
"콜린, 말인가요."

여기서 남자아이라고 하면  외에는 떠올릴  없었다.

그라면 분명 무언가 생각하는 게 있을 터다.

누구도 죽지 않고 마틸다를 되살릴 방법─모자 장수는 물론  가치가 없으므로 제외해도 좋다─을, 콜린이라면 어쩌면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해버리는 것이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단다."
"…조건 말인가요?"

이어진 하얀 여왕의 말에 마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많이 지쳤어. 이제 조금 쉬고 싶구나."
"얼마든지요. 마틸다가 돌아올 수 있다면 잠시 정도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

그녀의 말에 마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톡. 마치의 머리가 조금 기울어진다.

"……응?"

어쩌면 무의식중에 머리를 갸웃거리고 만 것이었을까?

잠깐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마치는 멍하니 그 자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머리에 무게감이 느껴짐을 깨닫고 무심코 손을 가져간다.

손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무언가. 실루엣을 더듬는 것만으로 화려함이 느껴지고, 알 수 없는 장엄한 기운이 느껴졌다.

"늙고 병든 하얀 여왕 쥬브 니구라스가 선언하노니, 헤이어. 마치 헤어. 그대를 보병관의 마땅한 주인으로, 이 땅의 제후로 인정하노라."
"뭣."

그리고 하얀 여왕의 모습을 다시 보았을 때,그녀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얹혀있지 않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 잠깐만요?! 응?! 이거 뭐에요?! 어, 진짜 무슨 상황인데요?!"
"이것만큼 빠르고 확실히 네 명예를 돌려받을 방법이 어디 있겠니."
"아니, 필요 없……."

마치 헤어의 마지막 발악은 안전거리에서 모든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의 박수소리에 분쇄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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