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9화 〉79 공기의 딸(2) (79/89)



〈 79화 〉79 공기의 딸(2)

마치 헤어. 새로운 제후.

되는 대로 내달리다보니 어느새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와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마치에게 통치 경험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평범한 나라를 맡아도 과연 멀쩡하게 굴릴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데, 모자 장수가 반쯤 작살을 내놓은 상태라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름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나마 보좌를 해주는 콜린이 있기는 했지만, 그로서도 정치와 그다지 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론적 지식이라면 적지 않았으나그걸 실제로 적용하는 건 많이 다른 문제였다.

지금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결과적으로는 부점 길드가 모자 장수와 일기토를 하여 마무리를 짓긴 했다.

그러나 그를 협상 테이블에 끌고올 수 있었던  다른 반대파들을 뭉쳐 세력을 꾸렸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그저 모자 장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누군가는 정의 때문에 여기에 손을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번 일이 성공했을 때의 콩고물을 노리고 협력한 녀석들이 많으리라.

당연히 그들에게는 입에 뭐라도 물려줘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체셔가 자기 영지를 관리하고자 마치와 결별하면서, 그녀는 부점 길드를 떠난 상태가 되었다.

하려고만 한다면 이제 자신은 체셔와 그쪽하고 맺은 동맹과는 관계가 없다며 입을 싹 닦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랬다간 반란군 제2부가 개봉될 가능성이 높으니 실천할 리는 없는 방안이지만 말이다.

그 반란군이 반 제후 대리 연합 때보다 규모가 작을 거라는 건 확실했다.

그러나 정작 지금 이쪽 상황도 모자 장수에 비하면 나쁘기에 오차 범위라고 볼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페스트의 폭주로 수도 일부가 작살나기까지 했다.

지쳐서 뒤로 물러난 하얀 여왕이 협력을 얼마나 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적당히 호의적으로 대할  있는 인간을 굳이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힘을 실어주는 것도 곤란하다.

중앙과 지방이 역전되어서야 곤란하다. 그 순간 춘추시대 개막이다.

'그나마 이쪽에 정당성이니 권위니 하는  뚜렷해서 전국시대까지는 안 간다는 게 다행이겠지만…….'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지방의 길드들은 어느 정도 휘어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다만 모자 장수처럼 자라나기도 전에 짓밟는 건 논외였다.

당장에 다른 녀석들을 무릎 꿇릴 수는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혁명이라는 정당성이 증발해버린다.

'이러면 뭐, 별 수가 있나. 선동으로 승부해야지.'

콜린은 길게 하품했다.

단기간 내에 힘을 기르는 건 용병이라도 고용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콜린은 용병이라는 것에 그다지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국가에서 사업을 주도하는 대형용병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쪽은 후손 밥줄 끊기는  걱정해서라도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신용을 지키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콜린 입장에서는 믿을 만한 용병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는 지방에 목줄을 잡히는 걸 피하려다가 용병에게 목줄을 잡히는 수도 있다.

힘을 늘릴 수 없다면 권위를 아득히 높이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괜찮을  같아요?"

이어서 콜린은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물었다.

"글쎄……."

테이블 너머에는 은발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벽 보고 대화하는 느낌이라서 아직 좀 어색해."

시안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렇게 말했다.

콜린이 사용하기로  수단이 무엇이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라디오였다.

백설의 권능으로 만들어낸 통신용 아이템.

그러나 이전의 게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거기에 약간 손을 대는 것으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소리를 보내는 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아이템이 동시에 연결되어 통신할 수도 있었다.

즉, 이론상 라디오의 양산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실 마음같아서는 영상까지 확실히 보내고 싶었다.

이전에 아라크네 길드와 부점 길드가 친선전을  때 그 영상을 송출했다지 않았는가.

하다못해 체셔나 아라크네도 그걸 가지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몹시 비싸긴 해도 충분히 생산은 해볼 수 있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다만 제조 비용을 전해들은  콜린은 양산 계획을 포기했다.

그야말로 귀족의 전유물이라는 표현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가격이었다.

사실상 그냥 돈 많은 양반들에게 이따금 흥미로운 경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었다.

최소한 마을마다 하나씩 장만해서  집에 옹기종기 모여드는옛 시골 풍경조차재현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콜린이 마음을 붙잡고자 했던 것은 일반 대중이었으므로 그다지 적합한 수단이 아니었다.

거기서 대안으로 떠올린 것이 바로 라디오였다.

이쪽은 그야말로 양산이 가능할 정도였다.

아주 작은 거울 조각 하나와 백설의 애액이 있으면 곧바로 만들  있었으니 말이다.

…후자가 조금 정신이 아득해지는 재료라는 것만 빼면 완벽하기 그지 없었다.

덕분에 최근에는 지하 감옥에 구속돼서 연속 절정 고문을 맛보고 있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는  제일 아이러니했다.

그녀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세뇌를 하는 걸 목표로 삼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금 과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새 자주 들곤 하는 콜린이었다.

아무튼 라디오만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다면 우선 그것만으로도 마치의 이름을 높일  있다.

매번 시각을 알려주고, 예술 진흥이라는 목적으로 음악가를 고용한 다음, 그 음악을 틀어주기도 한다.

거기에 이런저런 사건사고의 소식을 알려주기도 하며, 사람들이 조금 익숙해지면 방송 프로그램을 꾸려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 간간히 마치 헤어라는 제후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놓으면 된다.

 그대로 대중선동이었다.

요컨대 콜린은 마치를 이른바 '수령 동지'로 만들어버릴 작정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선문화텔레비죤' 수준의, 아니, 어쩌면 그 이하의 조잡한 선동이다.

다만 그 평가는 현대의 지식을 갖고 있는 콜린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제대로  대중매체라곤 없는 이쪽 세계의 관점에서는 이게 선동이라는 것부터 알아채기 힘들 테지. 콜린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실제로 그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시안은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되물을 정도였다.

물론 이해와는 별개로 콜린의 부탁은 들어주었지만 말이다.

"머잖아 익숙해질 거예요. 아니면 사람 한  정도 더 붙여드릴까요? 대화하는 느낌을 낼 수 있게."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은 물론 그녀가 이번 일에 힘써주기로 되어있던 탓이다.

그녀는 엄밀히 말하자면 전투에 특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펠레이라 경비대에서는 규격 외의 존재인 레니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겠지만, 이제는 그녀의 성장보다도 빠르게 환경이 뒤바뀌어버렸다.

앞으로 엮일지도 모를 일들의 규모를 감안하면, 전투에 도움이 되는 권능도, 권능의 부재를 극복할 정도의 실력도 없는 시안을 함부로 투입하기엔너무 위험했다.

사실 시안 스스로도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만 해도 그녀가   있었던 것이라고는 취객을 연기하며 난동을 부리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최소한의 연기력만 된다면 누구라도 할  있는 일이었다.  시안이 필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앞으로  심해질지도 몰랐다.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콜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바칠 수 있다고 그리 마음먹었는데, 정작 그에게 자신이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콜린이라면 시안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대기만 하더라도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스스로가 차마 용납할  없었다.

그렇게 앞으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도움의 손길이 내려왔다.

그 순간 시안은 기쁨과 황당함이 섞인 쓴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이 소년에게는 몇 번이고 간파당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콜린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사이기도 했다.

적어도 자기 주변 사람들이 우울감에 휩싸여 땅이나 파는 꼴을 잠자코 지켜볼 수는 없었다.

때마침 라디오 쪽과 관련해서 사람이 필요하던 참이기도 했다.

콜린이 시키는 대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하고, 비교적 외향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어느 정도는 목소리도 받쳐줘야 한다.

거기에 괜한 이상사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까지 붙이면 콜린 주변에서는 시안을 빼면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야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시안은 무관으로서 은퇴하겠다는 대답을 콜린에게 돌려주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한계에 부딪혔다 해도 그걸 인정하고 한평생 해온 일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어떻게 보자면 그만큼 콜린을 신뢰해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파트너로 저희 누나는 어때요? 방송 파트너로 말이에요."
"그렇게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거든? 또 무슨 파트너가 있다고……."

이어진 콜린의 말에 시선을 피하는 시안이었다.

얼버무리고는 있지만 한나와 '그런 쪽'의 의미로 같이 밤을 보내본 적도 있는 시안이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셋이서 했다기보단 같은 장소에서 따로 즐겼다고 보는  맞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이내 시안은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입을 연다.

"괜찮아. 나름 활기찬 분이기도 하고."
"그러면 그쪽 파트너로는요?"
"…꼭 그걸 물어야겠어?"

콜린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모습을 보더니 이마를 짚는 시안이었다.

"…네가 좋으면 누구랑 같이 해도 상관없다니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그걸 굳이 다시 입으로 들어야겠냐며 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소악마 같은 미소를 만면에 띨 뿐이었다.

"아,맞다."

그러다가 콜린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무슨 일인데?"

갑자기 왜 저러는가 싶어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말해야지 하고 있다가 깜빡했지 뭐에요."
"궁금하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해줘."
"그거 아세요? 저 시안 씨가 첫 상대였는데."

이내 침묵이 내려앉는다.

"……뭐, 뭐를?"
"에이, 아시면서."

이내 콜린은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든 뒤,  구멍에 반대쪽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어?! 잠깐만, 그게 처음이었다고?!"

이어서 소스라치게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시안이었다.

하긴 놀랄 만도 하다. 그녀와의 첫 경험은 매춘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콜린이 판매자였다.

"하아…그래. 너는 원래 내가 알던 상식으로 재면 안 되는 녀석이었지……."

시안은 잠시 그렇게 굳어있다가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풀썩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손가락 틈을 조금 벌려 콜린을 지그시 바라본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 뭐랄까.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새삼스레 정복감이 피어오른달까……."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자 뱉은 말이긴 했지만 저 정도로 화려한 반응을 보여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콜린은 킥킥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또다시 시선을 피하는 시안이었다.

"잠깐만. 그러면 나는 처음인 남자애한테 그렇게 털렸단 말이야…?"
"에이, 상대가 저였잖아요."
"…뭐, 그건 그래."

아주 잠시 여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날 것 같았던 시안이었지만 뒤이은 콜린의 말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밤새 난교파티를 즐기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그쪽 분야에 있어서는 괴물이라 생각하는  편했다.

문자 그대로 물리법칙을 무시해버리는 수준이란 말이다. 인간이 어찌 자연재해에 대항할 수 있겠는가.

"뭐, 이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수업이나 해볼까요?"

이내 콜린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시안과 마주보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았다.

병사 일은 은퇴하고 방송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콜린이 시안에게 제안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자고로 콜린이 생각하기에 참모라는 건 의견 충돌이 과해서 중요할  선택을 할  없을 정도가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많을수록 좋았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콜린은 만능이 아니었다. 그가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고, 어쩌면 실수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소한의 정도로는 그를 보조해줄 사람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렇기에 콜린은 그녀를 가르칠 계획이었다.

물론 전문가가 아닌 입장에서 전략전술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합리적인 사고를 전개하는 법 정도라면 잡아줄 수 있었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그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상황을 추론하는 방법 쪽으로 가닥을 잡아볼까요."

그리고서 품에서 거울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불완전한 정보에서부터  다른 정보를 끄집어내고,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연습해봅시다."

이번에 찾아온 루살카의 객실에 연결되어 있는 거울이었다.

번거로운 설명은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말하자면 그냥 도청장치였다.

"우선 소리를 들으면서 시안 씨 혼자서 어떤 상황일지 추측해보세요."

거울 위에 손바닥을 대고 가볍게 문지르며 콜린은 말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시안은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그녀의 귀여운 반응에 콜린은 살짝 웃었다.

[흐읏…♥ 아♥]

그리고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린다.

"정답… 딸치고 있다…?"
"어… 네, 정답입니다…?"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그의 두뇌는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이내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시안의 추측이 정답이었다고 말이다.

'어떤 미친 양반이 이런 상황에 자위를 해?!'

물론 그것이 잃어버린 콜린의 어이를 되찾아주는 일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