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84 빛나는 가축떼(2) (84/89)



〈 84화 〉84 빛나는 가축떼(2)

우아하고 잔잔한 음악이 들려온다.

악기에 대해서  알지는 못하지만 소리를 들어선 아마도 현악기일 것이다.

정장 차림의 사내는 음악에 살짝 취해선 미소를 짓는다.

그러다가 손을 뻗어 체스말을 옮긴다.

목재로 만들어진 기물이 또각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쥐고 있는 손은 평범하지 않다.

그 피부는불그스름했다.

아니, 단순히 피부라는 표현도 애매했다.

그의 손은 비늘로 덮여있었기 때문이다.

손의 형태도 사람의 것과는 달랐다. 마디가 훨씬 울퉁불퉁하고 손끝은 휘듯이 굽어 뾰족한 발톱을 자랑했다.

그런 게 오직 손뿐이겠는가?

정장 옷깃 너머로 빼꼼 모습을 내민 얼굴은 넙적했으며 주둥이는 툭 튀어나왔다.

그 사내의 이름은 빌. 생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도마뱀이었다.

"좋은 노래야."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다행이네요."

그는 흐뭇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게도 체스를 두려면 상대가 필요한 법이다.

마땅히 지금 그의 앞에도 한 사람이 존재했고, 이도 마찬가지 남성이었다.

다만 이쪽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옷차림도 단정하고 깔끔지만 소박했다.

굳이 따지자면 부잣집 시종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빌은 지위가 낮은 사람을 딱히 모욕하거나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애초에 설령 그러한 성격이라 했더라도 그리 행하지는 않았으리라.

얼마 전 제후 계승이라는 정치적으로 몹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에 권력을 쥐게 된 마치 헤어. 눈앞에 있는 소년은 그녀의 첩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꺼려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빌은 그 이상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일단 참모직을 맡고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후가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때 이따금 조언을 듣는 정도라 여기고 있다.

그와 잠자리를 가질 때 이따금 속내를 털어놓는 정도가 아닐까? 다들 그리 생각하던 것이다.

본래 침상에서 서로의 몸을 나눈 뒤에는 조금씩 마음이 풀어지기 마련이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도 술술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번 그의 계략에 휘말려 통구이가 될 뻔 했던 빌은 조금 의견이 달랐다.

그때의 그것이 누가 낸 계책인지 들은 바는 없지만 정황상 콜린의 아이디어였음이 틀림없다.

그런 악랄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존재가 그저 단순한 첩 취급을 받고 있다?

빌은 확신했다. 그는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뭐, 그다지 상관은 없나.'

다만 딱히 그로서는 크게 신경을 쓸 요소는 아니었다.

빌은 아랫사람을얕보지 않는 만큼, 윗사람을 존경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는 손톱으로  부분의 비늘을 살살 긁으면서 낄낄 웃었다.

"확실히 고상한 음악을 들으면서 하니까 좋은걸!"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잠겨 그는 콜린을 바라보았다.

물론 바로 근처에 악사를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은 저쪽 선반에 놔둔 나무 상자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백설이 만든 통신용 아이템이 들어있다.

"그 물건을 이렇게도 이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이 말은 진심이었다.

설령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하더라도 그걸 양산해서 보급한다는 발상은 차마 떠올릴 수 없었으리라.

"마치 누나는 아직 기반이 부족하니까요."

콜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사려면 뇌물이라도 드려야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콜린의 최종 목표는 일종의 관영언론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 매체가 될 라디오 이용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

사실 본래 목적인 뉴스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을  수는 있으리라.

열악한 교통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한곳에 머무르게 만들고,그러면 자연스럽게 바깥 이야기에 흥미가 동하기 마련이었다.

반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상인들도 정보를 빨리얻을 수 있으니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 외에 남은 시간은 일단 음악으로 채워넣었다.

하다못해 레코드판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니 실시간 연주라는 형태가 되지만 생각보다 비용은 들지 않았다.

현대만 하더라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산다는 이미지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현대보다 더욱 먹고 살기 힘든 이 세상에서는 어떠할까.

이곳저곳을 나돌며 재주를 선보인 값으로 겨우 며칠을 먹고사는 음유시인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있으리라.

그런 면에서이 시대에 연주를 하는 사람들은 부호에게 고용된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세 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수 있는 벌이가 이것뿐이거나, 배를 곯는 한이 있더라도 예술을 하고자 하거나, 혹은 둘 모두이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숙식을 충족하고도 남을 돈과 전국에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계약을 했을 때 거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마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고서 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러한 편성에다가  괴벨스가 만들었다는 시보(時報)까지 추가해뒀다.

라디오는 순식간에 일상으로 스며들어버리겠지. 나중이 되면 다른 편성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가구마다 하나씩 보급하는  아무래도 무리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유용한 물건을 마을마다 공짜로 내어주시니 이게제후님의 은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농민들의 지지가 권위에 중요한 건가?"

다만 그 유용함과 별개로 이를 통해 제후에게 돌아올 이익에 관해서는 다들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빌조차도 그냥 남들 좋은 일 해주는 거 아니냐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일개 농민은 정치적으로 어떠한 발언권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빌은,그뿐만이 아니라 콜린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은 아직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 씨는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콜린은 미소를 지으며 체스말을 옮겼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용을 무찌른 영웅. 정의를 위해 삶을 포기한 기사. 뭐, 이런 거 말이죠."
"그거야… 들어본 적은 있지?"
"그 정의라는 걸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음?"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도마뱀의 얼굴인데도 그 의아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거지? 잠깐만, 머리가 좀 아파서……."
"아뇨. 뭐, 아무튼 저희 쪽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으면 좋은 거잖아요? 아무리 약한 사람들도 모이면 강해지니까요."
"그건 그렇네."

그 반응을 지켜보다가 콜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적당히 얼버무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곳은아직 제대로 된 언론조차 없는 세계다.

그런 곳에서 언론 통제니 뭐니 이야기해도 쉽게 와닿지 않겠지.

무엇보다 콜린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각종 사상들의 광기 어린 폭주의 역사를 돌이켜볼 수 있었으니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각. 빌이 또다시 체스말을 옮겼다.

"음… 제가 졌네요."

잠시 판을 훑어보다가 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로 봐도 체크메이트. 콜린의 패배였다.

"저는 역시전체적인 판도를 내다보는  잘 안 되더라고요."

빌은 그리 너스레를 떠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의 말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실력을 숨기는 것에 불과한지는 여전히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회의 소집 명령이 내려왔더라고요."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빌은 지금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있었다.

왜 느닷없이 체스나 하자고 초대했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듣기로  씨는 회의참석 경험이 있으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모자 장수하고 카티 씨, 그리고 나까지  명이었지."

빌은 이전에 카드 쟁탈전 때도 체스와 비슷한 차투랑지라는 게임을 제안했던 사람… 아니, 도마뱀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그는 전략안이 뛰어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실력에 있어서는 모자 장수에게도 신임을 받았을 테고, 회의에 동행하는 것도 마냥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그때는 뭐 때문에 모인 거였죠?"
"모자 장수의 쿠데타 때문이었지. 정확하게는 당시만 해도 마치가 여왕님을 공격했다고 공표했지만."
"빌 씨는 그때도 진상을 알고 있었나요?"
"그래. 물론이지."

모자 장수의 밑에서 일하던 인물 가운데 모자 장수 본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케이스는 그리 많지 않았다.

빌도  중 하나였다.

"나는 그냥 이 나라에 충성할 뿐이야. 제후가 바뀐다면 충성할 상대도 바뀌는 거지 뭐."

꽤나 적당히 살아가는 남자─아니, 수컷?─라고 콜린은 생각했다.

"아무튼 그래서  가지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부터다른제후들은 어떠한지."
"으음, 사실 이쪽은 여왕님에게 물어보는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빌은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내가 회의에 참석한 건  번뿐이고, 여왕님이 쓰러지기 전에는 그분께서 몇 번이고 가셨을 테니까."
"여왕님께도 나중에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렇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뭔가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적당히 말해주면 되겠네."

어느새 종이와 펜을 꺼내든 소년을 바라보며 빌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미 사그라들고 다음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


복도를 나아가며 콜린은 길게 하품을 했다.

이런저런 정보를 적어둔 종이는 대충 접어서 모자 안에 던져넣은 뒤 그것을 머리에  썼다.

흑람색의 모자에는 작은 금속 장식이 하나 달려 짤랑 소리를 내었다.

아마  궁전에 와본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습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자 장수가 쓰고 다니던 실트 햇이었기 때문이다.

콜린도 이게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전에 하얀 여왕이 모자 장수를 집어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그녀의 뱃속에서 소화된 셈 치고 있었는데… 조금전 제후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간 콜린에게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물론 콜린은 딱히 주는 걸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불만이라 해봐야 그 거슬리는 남자의 물건이라는 정도지만, 그런 마이너스 요인을 압도할 정도의 플러스가 있었다.

모자 장수가 여기서 총이니 단검이니 하는 것을 마구 꺼내는 모습에서 짐작했던 거지만 보통 모자는 아니었다.

바깥에서 보는것보다 안쪽이 훨씬넓은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4차원 주머니였다.

그것도 단순히 넓이 측면에서만의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아이템을 포함하여 이런저런 유용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설령 원수의 것이라고 해도 좋은 건 좋은 거다.

오히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적대를 했으면 등골까지 뽑아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콜린은 별 거절 없이 이 모자를 받아왔던 것이다.

평범한 약초꾼이었던 콜린은 물론이고, 지구에서의 기억을 포함해도 이런실크 햇을 써본 기억은 없었기에 묘한 기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마 쓰다보면 적응이 될 거다.

그리 생각하며 콜린은 천천히 계단을 걸어내려가 어느 방문 앞에 섰다.

노크도 없이 바로 문을 열자 안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콜린 님!"

방 안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사람의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검은 머리칼의 여성, 백설은 콜린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금세 환한 표정이 되어 반겨주었다.

다만 결코 일반적인 풍경이라고는 생각할  없는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번째로 이상한 부분은 그녀가 알몸이었다는 점.

문자 그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몸매가 빈약한 축에 속하는 백설이었으나, 뽀얀 가슴에 대조적으로 분홍빛으로물든 돌기는 충분히 야릇함을 느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체모라곤 없이 훤히 드러난 하반신에는 투명한 액체로 번들거리는 균열이 눈에 띄었다.

 아랫쪽에서는 분홍빛의 귀여운 항문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여성이 알몸으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것보다 일반적이지 않은 풍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그녀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배꼽 언저리를기분으로 백설의 신체는 잘려나간 상태였다.

다만 딱히 고어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애초에 혈액이라고는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엄밀히 표현하자면 '절단'보다는 '분리'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상태는 어때?"

콜린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갑갑한 것만 빼면 괜찮은 것 같아요. 딜레이도 꽤 줄었고."

백설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그의 물음에 답했다.

"어… 5초 정도려나요?"

이윽고 그녀의 발가락이 살짝 꼼지락거렸다.

대체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이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

하얀 여왕에게서 물려받은 포탈의 성능을 테스트해보고 있던 것이다.

포탈은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신체에 약간의 부담이 있지만 불사신에 가까운 백설이라면 리스크는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일이 잘못 돌아가서 요참(腰斬)을 당하더라도 괜찮을 인물은 콜린의 주변에서 백설과 난쟁이 정도밖에 없었다.

다만 난쟁이의 경우는 평범한 생물보다는 소환체에 가까운 느낌이었기에 표본으로 적합하지 않아 백설이 실험체로 발탁되게  것이었다.

그녀의 몸을 이용해서 포탈에 대한 여러 실험을 진행했고, 지금은 포탈에 신체 일부만을 집어넣었을 때 생기는 현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백설이 조금 전 말한 '딜레이'는 감각이나 뇌의 명령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지금의 백설은 다리를 움직이려고 시도하면 5초 뒤에야 근육이 움직이고, 반대로 하반신에 가해진 자극도 5초 뒤에야 전달된다는 것이다.

"으음, 그런가. 다행이네. 처음에는 딜레이가 너무 길어서 실험이 힘들었거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실험을 해볼  있겠다.

콜린은 미소를 지었다.

"어… 무슨 실험인가요?"

백설은 문득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뒤이어 인기척이 나타난 것을 알아채곤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홍빛 머리칼의 난쟁이가  자리에 서있었다.

백설은 난쟁이들을 서로 구분할 없었다.

그나마 목에 걸려있는 초커를 보고서 그녀의 이름이 페올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을 뿐이었다.

"하체에서 절정한 감각이 도착하는 동시에 상체 쪽에서 따로 절정하면 어떻게 될까?"
"……네?"

그리고 백설은 잠시 그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도망칠 기회가 있었다면 그때뿐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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