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88 작은 동물들의 원탁(1) (88/89)



〈 88화 〉88 작은 동물들의 원탁(1)

천천히 의식이 떠오른다.

창밖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 콜린은 이내 희미한 압박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한나가그를 끌어안은  곤히 잠들어있던 것이다.

몸에 휘감긴 팔을 살짝 치워낸 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길게 하품을 한다.

콜린은 다시금 알몸으로 드러누운 한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꽤나 부스럭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쿨쿨 잘도 자고 있었다.

"아, 일어났어?"

레니가 욕실에서 나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씻은 참인지 머리가 아직 젖어있었다.

피부도 아직  마른 채로 대충 옷을 입었던 것인지 옷자락이 습기에 들러붙어있다.

"레니, 이쪽으로 와요."
"응? 갑자기 왜?"

콜린은 그런 그녀를 손짓하여 불렀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따르는 레니였다.

이윽고 콜린은 침대 맡에 놔두었던 모자 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작은 가죽 자루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좀 더 숙이고… 아니다. 그냥 침대에 걸터앉으세요."
"그러니까 대체 무슨 일인데… 으?!"

그저 시키는 대로 하던 레니는 갑자기 목덜미에 닿은 서늘한 바람에 몸을 움찔거렸다.

"가만히 있어요. 머리 말려줄게요."

하지만 콜린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단단히 고정시킨다.

"모자 장수의 아이템이야?"
"네. 바람이 조금 나오는 게 전부이긴 해도 머리 정도는 말릴 수 있으니까요."
"…하긴 뭐, 그 녀석도 일단 남자였으니까 머리 관리는 하던 걸까."

레니는 납득한 듯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움직이지 말라며 콜린에게 다시 붙잡혔다.

이쪽 세계는 아무래도 남자 쪽이 머리카락 관리에도 더 신경을 쓰는 것일까.

콜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레니의 머리를 꼼꼼히 말려주었다.

"남이 머리를 말려주는 건 오랜만이네──.."
"어라, 전에 누가 말려줬어요?"
"뭐어, 집안이 집안이다보니까… 여자라 해도 몸은 단정히 해야 한다는 거지."

하긴 그녀가 어디 고작 졸부 집안 출신이던가.

태양왕을 제외하면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제일 높은 제후 자리까지 오른 가문이라지 않았는가.

그것도 장녀다. 이쯤 되면 오히려 본인이 머리를 말리는 쪽이 이상하다.

"그야 집을 나오면서부터는 전부 혼자 해야 했지만 말이야."
"어차피 대충 수건으로 닦는 게 전부였죠?"
"크흠… 어차피 여자가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면서 어떻게 살아?"

당연하지만 한평생 시종이 수발을 들어주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레니의 성격을 감안하면 집을 나오기 전에도 그런 것들을 번거롭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 적당히 닦아내고 바람에 말리는 게 전부였겠지.

"그래도 뭐랄까……."

잠시 그렇게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던 레니는 문득 미소를 짓는다.

"남자애한테 이렇게 머리 관리도 받아보고,  호강이구나."
"마음에 들었으면 다음에도 해줄게요."

그녀의 표정을 뒤에서 비스듬하게 바라보다가 콜린도 따라 웃었다.

"괜찮아?"
"일단 연인이잖아요. 이 정도야 힘든 것도 아니고."

이어진 말에 레니는 잠시입을 다문다.

"연인……."

아름다운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콜린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야?"
"좋아해요."

콜린이 잠깐의 주저도 없이 답을 내놓은 탓에 레니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사실 가끔 그저 그런 플레이를 위해서 이런 관계를 맺고 있는  아닌가 싶어지기도 해. 그게 아니더라도 내 성벽에 맞춰주다가 결국 나한테서 멀어지는 건 아닐까……."
"……."

레니의 머리를 말려주던 손이 멈추었다.

"읏, 콜린…?"

그리고는 이어서 그녀의 금발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헝클어뜨렸다.

"뭐어, 이건 조금 예전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네요……."

이내 콜린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불안해하거나 할까봐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했는데."

이내 레니의 머리카락에서 그의 손이 떨어진다.

그것을 알아차리고서 그녀는 몸을 완전히 돌려 콜린을 바라보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그냥 처음부터 이야기하죠."

콜린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을 잇는다.

"혹시 알아차리셨어요? 어느 순간부터 제 성격이 조금 바뀐 거?"
"응. 직접 느낀 것도 있고. 좀 변했다면서 한나한테 전해듣기도 했고."

그러더니 '특히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졌지.'라며 덧붙이는 그녀였다.

콜린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선 자신의 현재 상태를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저쪽 세계의 이야기, 전생의 이야기, 그리고 콜린이 갖고 있는 여성관에 대한 이야기까지.

콜린은 본인이 말하면서도 꽤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레니는 딱히의심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이쪽 세상이 판타지에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저 콜린에 대한 레니의 신뢰도가 매우높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솔직히 많이 부끄러운 소리긴한데요……. 아무튼 저는 레니가 치맛자락을 살랑거리기만 해도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치마 좋아해? 입어줄까?"
"어… 나름 좋을  같긴 한데 지금 이야기랑 조금 핀트가 어긋나지 않았어요…?"

단지 비유였을 뿐,  그래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입어준다면야 환영이긴 했다.

"낯선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미인계를 경계하긴 하겠지만, 레니는 믿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콜린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무엇보다 말이죠. 전에 말했잖아요? 예전부터 레니를 좋아했다고."
"그거… 내 성벽을 알고 흥분시키려고 했던 말 아니었어?"
"글쎄요. 돌이켜보면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이상형이었죠."

그 말에 레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야 신사적… 아니, 여기서는 숙녀적이죠. 아무튼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적어도 야한 눈으로 바라보진 않고, 외모도 준수하고… 연애 감정을 품고 있었던  아니지만 아무래도 동경의 대상이긴 했거든요."
"야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는 건… 그야 친구 동생이니까예의 때문에라도……."
"잊으셨어요? 그 친구가 자기 남동생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던 거?"
"아하하… 그건 그랬지."

이따금 콜린이 한나에 대해서 자신에게 한탄을 토해내던 걸 떠올리고 레니는 쿡쿡 웃었다.

참고로 그 장본인은저쪽에 드러 누워서 새근새근 잠들어계신 중이다.

"아무튼, 아시겠어요?"
"…대충은."

레니는 조금 어색한 듯이 시선을 돌리면서도 납득은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부끄러울 만도 하긴 했다.

면전에서 이러저러한 면이 좋다고 보고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저… 콜린. 그나저나 그런 세계에서 왔다는 거면……."

레니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스스로의 상의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곤 옷자락을 가슴 근처까지 들어올린다.

슬렌더한 몸매에 희미하게 드러난 일자 복근. 그리고 귀엽게 자리잡은 배꼽.

"콜린은 이런 거 보면 흥분하는 거야…?"
"그거 반대로 말하면 레니는 그런  흥분한다는 거죠?"
"응… 뭐, 그렇지…?"

웃으며 이어진 콜린의 말에 뺨을 살짝 붉히며 눈을 피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휘청인다.

콜린이 그녀 위에 올라타서 어깨를 살짝 억누르고 있었다.

"레니, 진짜 매번 그렇게 귀엽게 사람 유혹할 거예요?"
"귀엽다니……."
"됐어요. 애정을의심했으니까 이제는 증명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콜린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춘 뒤 옷을 젖혀올리기 시작했다.

"아니, 잠깐만. 나 방금  씻고 나왔…!"
"나중에 또 씻어요. 아직 아침이니까."

잠깐 이어진 '설득' 끝에 결국 레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야마는 것이었다.

×


"잘 어울리네요."

콜린은 팔짱을 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 끝에는 자켓 차림의 여성이 서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머리 위에 쫑긋 솟은 귀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보병관의 제후가 된 마치 헤어가 그곳에 있었다.

"불편하진 않아요?"
"나름 괜찮은데요."

베이지색 자켓 아래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입고, 바지는 검정에 가까운 진청색.

굳이 따지자면 이쪽 세계의 것이라기보단 현대의 패션에 가까웠다.

코디네이터부터가 콜린이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가 마치의 옷을 맞춰주고 있는가 하면… 물론 제후 회의 때문이었다.

제후 회의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콜린은 회의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태양왕의 대리인, 그리고 열두 제후 혹은 그들의 대리인.

그 외에 동행을 데려오는 일도 있으나 보통 두세 명을 넘기지 않는다.

또한 복장에 대해서는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는 모양이다.

차라리 드레스 코드가 정해져 있다면 편하겠건만. 콜린은 한숨을 쉬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기본적으로 태양왕의 대리인을 제외하면 동등한 제후들이다.

비록 마치가 가장 신참이라고는 해도, 남들 다 편하게 입고 오는 자리에서 홀로 숙이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막무가내로 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거적대기를 입고 회의장에 갔다가는 주최자인 태양왕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편하면서도 단정한 복장이 가장 적합하지만… 그것도 참 말만 쉽다.

결국 멋을 어느 정도는 부리면서도 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그 밸런스를 누구나 쉽게 잡을 수 있었더라면 코디네이터라는 직업은 왜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콜린에게 이쪽 세계의 보편적인 패션을 바탕으로 깔끔하게 차려입는 재주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미적 감각 자체는 지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고, 마치 본인도 약간의 애매한 부분을 커버할 정도의 얼굴이 되므로, 그냥 콜린이 이전에 자주 봤던 옷차림을 기반으로 입히기로 했다.

그마저도 수십 벌 정도를 마련해서 이것저것 비교해가며 겨우 적합한 걸 골라내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에 대해선 방직과 재단 위주의 산업에 손을 뻗고 있던 아라크네 길드에게 주문 제작을 맡겼다.

나름 돈이 깨졌기에 아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정치인에게는 패션도 중요한 법이다. 막 제후가 된 마치의 정착을 위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값싼 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콜린의 색다른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요──."
"정장 정도면 충분히 색다르지 않아요?"

반면 콜린의 경우는 단순한 검은색 정장 차림이었다.

이건 이번에 동행하기로 했던 레니도 마찬가지였다.

제후들이 서로 동등한 입장이기에 편한 복장으로 온다면, 반대로 그 아래에 있는 인물들은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는 게 올바른 수순이었다.

그러다 보니 콜린과 레니  사람은 적당히정장 차림으로 향하기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조합을 감안해보면 부잣집 아가씨를 호위하는 양복 보디가드  사람이라는 느낌일까.

…정작 그 부잣집 아가씨가 여기서 제일 강하다는  넘어가고서 말이다.

"그리고 실크 햇에는 이런 복장이 어울리잖아요?"

사실 이런 복장이 된 이유는 오로지 예의 때문은 아니었다.

제후만 열두  모이는 회의다. 무슨 변수가 나타날지 모르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서 요술 모자는 언제든 사용할  있게들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가장 어울리는 복장이 양복이었던 것이다.

사실 모자를 마치에게 씌우고 그녀가 양복을 차려입는다는 것도 생각해보긴 했으나, 토끼귀가 솟아 있으니 모자를 쓰고 있으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모양인지라 포기했다.

"아무튼, 이제 출발해볼까요?"

딱히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마치는 기지개를 켰다.

"레니. 준비됐죠?"

콜린은 그녀의 말을 듣고서고개를 돌려 뒤쪽에 있던 여성에게 말을 건다.

레니는 벽에 기대어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콜린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가왔다.

그리곤 손을 뻗어 콜린의 옷깃을 살짝 붙잡는다.


콜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피식 웃은 뒤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었다.

"으?!"
"뭘 그렇게 수줍어해요?"

그리고는 레니와 손가락을 엮어 깍지를 꼈다.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깜짝 놀란 레니였으나 손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가요, 마치 누나."

이어서 콜린은 비어있는 반대쪽 손을 마치에게 내밀었다.

'윽?!"

하지만 마치는 잠깐 음흉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앙 하고 물어버렸다.

콜린이 당황하며 굳어 있으니 혀로 손가락을 날름거리면서 품에서 종이를 한 끄집어낸다.

이전에 태양왕으로부터 도착했던 회의 소집 명령.

그것을 양손으로 붙잡고  찢어버린다.

그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마치 누나… 놀랐잖아요."
"어차피 신체 접촉이기만 하면 뭐든 상관없잖아요?"

콜린은 한숨을 쉬며 마치의 돌발행동에 불평했지만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그녀였다.

"아무튼 여기가 입구로군요."

이내 마치는 감탄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주위를 둘러보았다.

콜린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사람은 어느덧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에 서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서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검은색의 거대한 문.

아마도 이곳이 회의장의 입구일 것이다.

"다들 준비는 되셨어요? 통신기 확인도 해주시고요."
"저는 괜찮아요, 콜린."
"나도… 아마도괜찮아."

이내 콜린은 레니의 손을 놓아주며 물었다.

당연하게도 모자 장수와 협상할 때처럼 통신 아이템을 귀에 장착하고 있던 레니와 마치였다.

이 장소에서도 그게 멀쩡히 작동하는  확인하고서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디 가보죠."

할 수 있는 준비는 이걸로 모두 끝났다.

콜린은 입꼬리를 올려 웃은 뒤 마치의 뒤에 섰다.

레니와 콜린이 그녀의 등 뒤 좌우로 버티고 선 모양새가 된다.

'역시 아가씨 한 명에 호위 둘이면  구도지.'

굳이 따지자면 호위를 받아야 하는건 이쪽이지만 말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긴장을 가라앉히고는 콜린은 호흡을 들이켰다.

이내 마치는 거대한문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닿은 순간,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보이던 그 육중한 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나. 대충 7할쯤 열렸을 때 들어가는 거예요."
"…알았어요."

너무 깐깐한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제후 마치 헤어의 데뷔전이다.

우선 첫인상을 먹고 들어가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서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보병관의 주인이자 공의의 수호자, 마치 헤어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사람은 안쪽으로 걸음을 뻗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