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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화 〉89 작은 동물들의 원탁(2) (89/89)



〈 89화 〉89 작은 동물들의 원탁(2)

입장은 회의가 시작하기 10분 전.

이전에 콜린은 그리 말했다.

처음 참석하는 회의에 늦어버린다면 그야말로 불상사가 따로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일찍 가있는 것도 저자세로 보일  있다.

'사실 10분도 조금 이르긴 하지만…….'

콜린은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며 그리 생각했다.

넓게 펼쳐진 방. 바닥에는 자줏빛 융단이 깔려있고, 붉게 칠해진 나무 기둥이 천장을떠받들고 있었다.

이에 대한 콜린의 감상을 말하자면 '중화풍 궁전'이라는 느낌이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천장 정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는 점이다.

구멍에서 일직선으로 내리쬐어진 햇빛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회의실 중앙의 원탁을 비추고 있었다.

원탁은시커먼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

하지만 석재 특유의 거친 질감 따위는 일절 확인할 수 없었다.

겉면에 코팅이라도 한 것 같은 그 모습은 흡사 대리석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또한 원탁을 에워싸듯이 열세개의 의자가 있었다.

이것도 원탁과 비슷한 재질로 보였으나, 대신 군데군데 군청색의 융단이 덮여있었다.

특히 등받이와 엉덩이 부분에는 무언가 푹신한 걸 채웠는지 살짝 볼록한 것이 충분히 쿠션 역할을 해줄  같았다.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옥좌'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고급진 의자였다.

콜린은 그 의자들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다른 의자들에 비해 특히나 붙어있는 두 개의 의자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이내 콜린은 헤라클레스 가문과 테세우스 가문이 공동으로 제후직을 맡고 있다는정보를 떠올릴  있었다.

기억하지 못할  없었다. 무엇보다도  중 한쪽은 레니의 가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곁에 서있던 레니도 그 의자들을 알아차렸는지 꿀꺽 침을 삼켰다.

또한 유달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그 이유는 금세 알아차릴  있었는데 그 빈 공간에 누군가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바로 태양왕의 대리인일 것이다.

선이 조금 갸름했고 머리칼은 길었지만 명백히 남자임을 알 있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그는 서구적인 얼굴형에 비해 동양풍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도 공자가 입고 다녔을 것만 같은, 이상하리만치 소매가 넓은 옛 복식이었다.

그는 손을 모은  방금 회의실에 들어온 마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마치 헤어 님. 행차에 감사드립니다. 전능하신 태양왕 전하의 명에 따라 회의를 이끌게 된 약망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번에 제후직을 이어받은 마치 헤어입니다."

마치 역시 가슴에 손을 얹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보병궁의 문양이 새겨진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설마 보병관의 주인이 바뀔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렇습니까? 저는 모자 장수를 보면서 언젠가 판이 뒤집어지겠다 싶었습니다만."
"……."


그녀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미리 와있던 인물들이 하나둘 말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콜린이 10분 먼저 와있는 것도 많이 이르다 생각하게 된 이유도 이래서였다.

마치를 제외하고 미리 와있던 제후라곤 고작 셋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의 이건 일반적인 약속과 조금 상황이 달랐다.

초대장을 찢기만 하면 바로 회의장에 도착할 수 있으니 '조금 일찍 가있는다'라는 기준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오히려 세 명이나 먼저 와있었던 건 많은 편이라고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콜린이 이 시간에 회의장에 도착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제후쯤 되는 인물이 갈아치워지면 당연히 정치적 구도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마치 헤어라는 여자에 대해 흥미를 갖는 사람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제후들과 회의 전에 미리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누고 더 나아가 약간의 호의라도 살 수 있으면 이만큼 좋은 일도 없으리라.

"반가워, 마치 양. 제후 회의는 처음이겠지?"
"네. 그렇게 되겠네요."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활기찬 표정을 짓고 있던 인물이 중성적인 목소리로 마치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다만 '인물'이라고 표현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에 콜린은 조금 머뭇거렸다.

"이야… 진짜 모자 장수 녀석은 영 재미가 없어서 아쉬웠단 말이지."

불평하듯이 중얼거리는 그는 비율 좋은 원숭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얼굴의 털이 북실북실했는데 그 형태가 아름다워서 흡사 사람의 머리털과 수염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차려입은 중국풍의 갑주와 머리에 둘러진 금빛의 고리였다.

"마치 양. 너는 네가 생각하기에재미있는 사람인 것 같아?"
"음,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마치는 그의 물음에 씨익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원숭이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다.

굳이 그가 누구인지 제후 목록들을 하나하나 비교해보며 추론해볼 필요도 없었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심지어는 아마물구나무를 서서 봐도 그가제천대성일 것이라는 건 분명했으니 말이다.

"반갑습니다. 바다마녀 님의 대리인으로 나온 압둘 알하자드라고 합니다."

이어서 콜린이 시선을 향한 것은 바로 옆자리에 앉은아랍인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미형의 사내였지만 얼굴 반쪽이 녹아내린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축 처져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예의와 친절이 넘쳐흘렀다.

그리고서 알하자드는 아주 짧은 순간 콜린과 눈을 맞추었다.

콜린은침을삼켰다.

그는 콜린을 이 세계에 있게  장본인에 가까운 존재였다.

알하자드는 콜린에게 제후 회의에서 콜린과 엮인 일들을 설명해주겠다고 전했다.

아마도 회의가 끝난  조심스럽게 접촉해올 것이다.

그의 의자 뒤쪽에는 한 사람의 여성이 서있었다.

고동색의 머리칼은  보기에도 윤기가 흘렀고, 등에서 자라난 하얀 날개는 천사를 떠올리게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루살카. 이전에 비공식 사절로 왔던 여자였다.

루살카는 콜린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반가운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

하지만 그저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할 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무언가 깨달은  다시 입을 다무는  보면, 딱히 조용히 무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닌 듯 했다.

뒤이어 알하자드가 그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계약으로 말을 하지 못하게 묶어둔 건가.'

이내 콜린은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권능이든 계약이든 간에 루살카의 목소리를 봉인해둔 것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반갑게 콜린에게 인사를 하려 들지 않았는가.

하지만 루살카가 마치를 찾아왔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방금 그것은 이런 상황에 본인들의 행적을 까발리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저쪽에서도 루살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예상했기에 미리 묶어둔 것이겠지.

…그 정도로 신뢰도가 없는 건가 싶어 루살카가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콜린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거의 완전히 희게 세고 얼굴에는 주름이 잡혀 중년과 노년의 중간 정도의 연령으로 보였다.

특히나 지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탓에 더욱 나이가 들어보이는  같기도 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눈도 마찬가지로, 마치가 들어왔을 때 잠시흘깃 바라본 것을 제외하면 줄곧 감긴 상태였다.

앉아있는 위치를 보면 아마 그가 바로 백양관의 제후인 여디디아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통 실눈캐가 제일 세다던데.'

워낙 아무 행동도 하고 있지 않으니 뭐라 얻어낼 정보가 없었다.

그나마 그런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는 게 콜린이 할  있는 전부였다.

"인마관의 주인이자 고대의 검은 거인이며, 눈을 지키는 자인 주르투르의 대리인 빈드칼드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러다가 문득 가만히 서있던 약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성량 자체가 뛰어나지는 않았음에도 이 넓은  전체에 울려퍼지는 것만 같았다.

이내 끼긱 소리를 내며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너머에서 이윽고 미늘 갑옷을 차려입은 미형의 여성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여기저기 가죽을 덧댄 갑옷 아래로는 기장이 짧은 어두운 색상의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어쩐지 바이킹의 복장을 떠올리게도 했다.

특히나 약간 넓은 어깨와 한쪽 눈을 가린 안대는 그녀에게서 더욱 무(武)를 느끼게 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칼드 양! 잘 지냈어?"
"…저번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빈드가 이름이고 칼드가 성인 게 아닙니다."

제천대성은 씨익 웃으며 손을 붕붕 휘둘렀다.

여성, 빈스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그렇게 부르곤 하던 모양이다.

들어와서 곧바로 '오랜만'이라고 말했던 걸 보면 아무래도 이전 회의 때도 그녀가 대리로 왔던 것일까.

'설마 저기도 모자 장수처럼 권력 상태가 맛이 가있는  아니겠지.'

콜린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그쪽이 마치 헤어입니까?"
"그래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빈드칼드입니다. 좋은 관계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지요."
"동감이에요. 아무렴 다퉈서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빈드칼드는 마치와 한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살짝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와 주고받는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참석한 인물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콜린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말해서 제후쯤 되면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존재들일 테고,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성향의 인물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개개인의 성격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꽤나 상식적인 범주의 사람들이었다.

하긴, 사람 사는 게 본래 거기서 거기지 않겠는가.

"천칭관의 주인이자 사티로스의 벗, 매듭지은 자의 아들이요, 황금의 아버지인 프리기아의 미다스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조금 전부터 인삿말이 어째 길었다.

마치를 소개하는 칭호는 제후라는  제외하면 '공의의 수호자' 하나뿐이었는데 말이다.

'뭐, 이건 사실 마치 누나 쪽이 적은 거지만.'

모자 장수를 쫓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악평만 잔뜩이던 그녀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 '음탕한 토끼'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콜린은 그 사실에 적당히 납득하고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물에게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린다.

"……."

진중하게 입을 다문  걸어들어오는 사내의 키는 척 보기에도 2미터를 넘을 것만 같았다.

단순히 키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큼지막한 덩치였다.

살짝 각진 얼굴에는 탁한 황금빛의 투구를 썼으며,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갑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한 걸음 뻗을 때마다 금속 부츠의 절그럭 소리가 들려오고, 덩치에 걸맞게 위협적인 크기의 주먹에는 건틀릿까지 끼고 있었다.

콜린은 그 모습에 옛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타노스 형이 왜 여기서 나와?'

…피부만 빼면 그가 알고 있는 무언가를 너무 닮아있던 탓이다.

콜린은 입에서 무심코 농담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그대가 하얀 여왕의 후임인가."
"네, 맞아요. 마치 헤어입니다."
"미다스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잠시 마치와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침묵에 잠겼다.

"금우관의 주인, 진흙의 창기, 황소와 산신을 참수한 자, 엔키두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어서 또다시 약망이 소리쳤다.

슬슬 정말로 하나둘 회의장에 모이기 시작할 때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올까 싶어 콜린은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조금 전에는 당황하고 말았지만,오히려 이런 것까지 보고 나면 더 심한  어디 있겠는가.

'…그게 여기 있네?'

그리고 또다시 콜린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덜컥덜컥 소리를 내며 스켈레톤이 걸어들어온 것이다.

그─혹은 그녀─는 오로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제외하면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사람을 외형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정도는 콜린도 알고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걸어다니는 해골을보면 조금 정신이 아득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패션은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거 아니었을까…?'

저쪽은 알몸이라고 해야 할까, 피부까지 벗어버렸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그냥집에서 입는 파자마를 입고 왔어도 괜찮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버린다.

"사자관의 주인이자, 최후의 마법사이자 최초의 마술사, 또한 환란의 저자이신 빨간 망토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다음 번 방문객의 모습을 보며 더욱 확고해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원탁으로 다가오는여자는 아동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색에 가까운 진분홍색 상의와짧은 반바지는 어린이 특유의 활기와 생기를 뽐내었다.

흑갈색의 머리칼은 빨간 리본으로 양갈래로 묶어 앳된 느낌을 더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차림새를 하고 있는 장본인의 연령이 이와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외견은  보기에도 20대 중반 즈음은 되어보였다.

하지만 더욱 심각했던 것은 얼굴이라기보다  아래쪽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나 한나에 비해서도 훨씬 커다란, 콜린이 여태껏 봐왔던 것 중에서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이에 맞지 않는 작은 아동복이었는데, 거기에압도적인 가슴이 더해지며 복부가 그대로 드러나고야 만다.

심지어는 속옷조차 입지 않은 것인지  끼는 옷 너머로 젖꼭지가 볼록 튀어나와 있다.

바지 쪽이라고 멀쩡하지는 않았다.

가슴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은 엉덩이로 향하며 다시 부풀었다.

아이가 입었더라면 짧은 반바지 정도로 그쳤겠지만 그녀의 풍만한 둔부 탓에 핫팬츠 중에서도 아찔한 종류를 연상시킬 정도로 기장이 올라왔다.

허벅지를 가리기는커녕 엉덩이마저 절반 가까이 드러나있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옷을 학대하고 있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었던 그녀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원탁에 다가와서는 자리에 앉는다.

"언니오빠들, 오랜만이야──!"

그리고는 양손을 흔들며 해맑게 인사한다.

"…약망 선생. 저 미친 여자는 추방하면 안 되나?"
"…전능하신태양왕 전하께서 내려주신 제후관의 적합한 주인이라면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있습니다."
"선생 눈에는 저게 적합한 제후의 꼴로 보이나?"
"……."

이내 타노스… 아니, 미다스의 불평에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약망이었다.

'…제후 회의란 대체 뭐였던 걸까?'

이쯤 되니 슬슬 회의감이 들고야 마는 콜린이었다.

시선을 돌려 확인해보자 곁에 서있던 레니도 비슷한 감상인 듯 했다.

'그냥 다 때려치고 돌아가고 싶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아직 참가자의 절반 정도밖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냥 잠깐 생각을 포기하기로 결심하는 콜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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