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훈련병]
"아... 어느 내무반을 골라야 되는 거야? 잘 모르겠는데."
피터 일행은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훈련병들도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터 일행처럼 서성거렸다. 복도 양 옆의 끝에는 소총을 짊어진 병사들이 한심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4 내무반이 가장 나을 것 같은데. 대충 둘러보니까 안에 티비도 있더라. 벌써 몇 명 자리 잡았던데?"
"으음..."
에리의 제안에 피터가 고민했다. 에리와 피터가 고민할 때, 코리는 헤벌레한 얼굴로 행여나 이쁜 사람은 없는지 다른 내무반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근데, 너도 우리랑 같이 생활하려고?음?"
피터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 질문했다. 어차피 그녀와 10시간이 넘도록 수송선에 타서같이 왔다고 하더라도, 설마 같이 생활까지 하겠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터의 말에 에리는 약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으, 엄. 그냥 뭐 같이 지내도 나쁠 건 없잖아?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그니까! 대충 뭐 그런 뜻이라는 소리지."
"그래. 그래라. 코리! 들어가자! 곧 내무반의 자리가 동날 거야. 원하는 곳을 고르게해 줬으니, 그렇게 해야지."
피터는 벌써 다른 여성 훈련병에게 찝적대고 있는 코리를 불렀다. 하지만 코리는 잠시 그들에게 손사래를 치고 다시 여성 훈련병과 낄낄대기 시작했다. 피터가 한숨을 쉬면서 에리를 보자, 에리 또한 한숨을 쉬고 코리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코리는 에리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면서도 자신과 낄낄대던 훈련병에게 손을 흔들었다. 코리와 말을 나누던 그녀도 그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안녕!"
"이 멍청이가. 지금 들어가야 된다니까."
에리가 코리를 끌고 오자, 피터는 4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내무반의 문은 열려 있었고, 무언가 카드 같은 것을 긁을 수 있는 리더기가 열린 문 옆에 딱 붙어있었다. 아마 자동화 시설로 보였다.
내무반 안에는 몇몇 훈련병들이 짐을 풀고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옆에 기다란 침대와 책상들이 나열되어 있는 내무반은 좌측은 남성, 우측은 여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흠. 아무리 그래도 남녀가 한 곳에서 등을 맞대고 자기는 그렇지. 음음. 그렇고 말고."
"이게 뭐야... 난생 처음으로 여자랑 손이라도 잡고 자는 줄 알았는데, 결국 내 옆엔 또 다시 피터놈이잖아..."
피터는 아무래도 좋았다. 코리만이 울상을 짓고 그의 옆에서 짐을 풀고 있었다. 에리는 피터와 코리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우측의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피터의 것 처럼 커다란 더플백을 내려놓아 침대 옆의 관물대에 물건을 정리했다.
이윽고, 대부분의 훈련병이 내무반을 선택하고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자신의 짐을 풀어 놓고 내무반 침대나 의자에 걸터 앉았다. 모두의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직 4 내무반의 코리만 싱글벙글하며 우측의 여성 훈련병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피터는 코리의 호색한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할 게 없는 피터는 괜스레 자신이 신고 온 신발의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내무반의 열린 문으로 톱니바퀴가 박힌 모자를 쓴 병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사람의 머리통만한, 원통형의 기계 4대가 각각 커다란 수레를 들고 떠 있었다.
"지금부터 간단한 보급품을 배부하겠다. 좌측의 남성 훈련병들은 나와 일렬로 서라. 우측의 여성 훈련병들은 잠시 대기하고. 워크 비. 보급품을 배부해."
병사의 뒤에 떠 있던 기계들은 워크 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듯 했다. 워크 비들은 수레를 들고 훈련병들 사이를 날더니, 맨 앞의 훈련병 앞에 섰다. 그리곤 한 명 한 명, 한 대의 워크 비가 들고 있는 수레에서 다른 워크 비가 보급품을 꺼내 나눠주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받은 것은 튼튼한 군화였다. 조금의 허세를 담아보자면, 날카로운 칼도 박히지 않을 듯한 재질의 군화였다. 군화 끝에는 날카로운 스파이크도 박혀 있었다. 이
런 걸 신고 사람을 걷어차면 죽을 수도 있겠는데. 피터는 생각했다.
다음은 군복이었다. 검은색과 카키색이 적절히 섞여 어두운 색깔을 뽐내는 군복은 마치 밧줄처럼 질겼다. 군복 가슴팍에는 부대 마크와 어디 소속인지 정확히 쓰인 9cm 가량의 금속이 박혀있었다. 부대 마크는 훈련병을 뜻하는 듯 조그만 총알이 새겨져 있었다.
"연방 트루퍼, 로스토크 연대 소속, 제 1대대 1중대 4소대원? 이 내무반의 32명이 1개 소대인건가? 아하, 4 내무반은 4 소대라는 뜻이었군. 중대나 대대, 연대의 인원은 얼마나 되는거지?"
"좋아. 이쪽 훈련병들은 배급이 끝났나. 워크 비. 우측의 훈련병들에게 보급품을 배부해."
워크 비들은 뽈뽈뽈 날아가 여성 훈련병들에게 보급품을 배부하기 시작했다. 여자라고 별 다를 것은 없었다. 다 똑같은 보급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워크 비 한 대가 더 날아 와 뭔가를 여성 훈련병들에게만 나눠주기 시작했다. 무슨 휴지처럼 생긴 것을 팩에 담아 나눠주었던 것이다. 피터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반면에 코리는 뭔지 잘 몰라 피터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야, 저거 뭐야? 왜 여자들한테만 뭘 더 주는거지? 먹을 건가?"
"이런 멍청한 놈. 바보야. 그거잖아. 그거. 한 달에 한 번 오는."
"아~"
"여자를 그리 좋아하면서 여자한테는 관심이 별로 없구만."
"헤헤..."
4 소대의 훈련병 전원에게 보급품 배급이 완료 되자, 워크 비들은 다시 뽈뽈 날아가 병사 뒤에 가지런히 떠 명령을 기다렸다. 병사는 톱니바퀴가 박힌 모자를 푹 눌러쓰고 태블릿을 꺼내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훈련병들은 다들 올곧은 자세로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코리는 계속해서워크 비들이란 기계가 신경쓰였다. 너무 궁금했다. 사람이 조종하는건지, 아니면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AI인지.
그는 귀찮은 얼굴로 태블릿을 두들기던 병사가 볼 수 있게 손을 번쩍 들었다. 훈련병 중 하나가 손을 들자 옆을 돌아본 병사는 모자를 올려쓰며 무슨 일이고 물어왔다.
"무슨 일이지?"
"4 소대 훈련병 코리 맥코이! 질문 있습니다!"
"뭔데."
"워크 비라고 부르신 저 기계들, 처음 보는 것인데 어떻게 움직이고, 뭘 하는 기계들입니까?"
"얘네들? 아, 이거 설명하기 좀 귀찮은데. 뭐라고 해줘야 되나?"
그녀는 잠시 태블릿을 접고 옆구리에 끼더니, 펜으로 턱을 톡톡 두들겼다. 몇 초후 그녀는 떠 있는 워크 비들 중 맨 앞에 있는 녀석을 쿡쿡 찔렀다.
"이 녀석들은 사람이 조종하는 게 아니야. 덩치는 작은 녀석들이지만 적당한 인공지능이 심어져 있는 녀석들이지. 프로그래밍 할 때 주인을 설정해놓으면 잘 따라. 이렇게 작지만 수송 능력은 꽤나 준수해서, 혼자서 200kg 가량의 물건을 들 수 있어. 궁금증은 해결 됐나?"
"예. 감사합니다."
"그럼."
병사는 워크 비들을 이끌고 내무반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지 5분도 안 되어서 군복을 입은 장교 한 명이 들어왔다. 그의 모자에는 아까 전의 병사완 다르게 톱니 바퀴 대신 파란 행성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반갑다. 나는 너희들과 훈련을 함께하고 같이 전장에 나갈 사람이다. 이 4소대의 소대장이지. 그럼다들 1분 내에 보급받은 군복으로 환복 해. 환복이 끝나면 내무반 복도에 두 줄로 선다."
장교의 말에 훈련병들은 주섬 주섬 군복을 챙겼다. 장교는 훈련병들을 한번 쓱 훑어본 뒤 내무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누군가 그에게 질문을 하기전 까진. 질문을 해 온 것은 여리게 생긴 한 여성 훈련병이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그냥 이대로 환복 해야 합니까..?"
소위는 훈련병들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리곤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왜. 이대로 환복하는게 틀린가?"
"그, 그건..."
"!분 내로 해."
소대장은 그렇게 나가버렸다. 훈련병들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다 같이 한숨을 쉬었다. 뭐 어쩌겠는가. 이제부터는 이렇게 8년을 살아야 하는 것을. 까라면 까는 곳이 군대라는 것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꼈다.
1분이 조금 지나고, 훈련병들은 환복을 마친 채 내무반 복도에 섰다. 방금 나갔던 소대장은 내무반으로 들어와 환복을 마친 훈련병들을 이끌어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는 뭐가 있겠는가? 인조 태양은 이미 져서 날은어둑어둑 했지만 또 다시 구보가 시작 되었다. 4개의 소대, 즉 128명 씩 모여 차가운 저녁에 입김을 뿜어대면서 구보를 하는 모습은 꽤나 봐줄만 했다.
2시간의 구보가 끝나고, 땀이 범벅이 된 채 막사 내 지하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 훈련병들은 10시부터 11시 30분까지, 1시간 30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오늘 진짜 개좆같네."
"얌마, 뭔 욕을 그렇게 해."
샤워실에서 몸을 씻으며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은 코리에게 피터가 혼을 냈다. 코리는 뜨거운 물을 대야에 가득 담아 자신의 머리부터 쏟아버리곤 입을 삐죽댔다.
"와서 존나게 힘든 구보만 시키잖냐. 오늘 5시간은 족히 뛰었을 걸. 게다가 해는 왜이리 빨리 지는지. 야, 무슨 5시 즈음에 해가 지는 거냐고. 구보할 때 추워서 얼어 죽을 뻔 했네."
"그건 그랬지. 허."
샤워를 끝마치고 돌아온 피터와 코리는 침대와 관물대의 짐을 정리하며 11시 30분에 있을 점호를 준비했다. 다른 훈련병들도 재깍재깍 준비하는 듯 보였다. 피터가 정리를 하던 중간에 에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에리는 이상하게도 그를 보며 미소만 날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들어서 그런거 겠지. 지금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니..."
혼자 다른 생각을 하던 피터를 뒤로하고, 점호까지의 시간이 아직은 넉넉하여 처음엔 서먹서먹 했던 훈련병들은 점차 말을 트기 시작했다. 사실 말을 트게 된 데에는 코리 녀석의 도움이 크긴 했지만. 피터는 열심히 다른 훈련병과 이야기하는 코리를 보며 그래도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