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내무반의 밤] (14/131)



〈 14화 〉[내무반의 밤]

훈련소로 온 지 3주가 지났다. 피터 일행을 포함한 훈련병들은 처음 왔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변해 있었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간에. 오늘은 아침부터 25km를 완전군장으로 돌파하는 거친 체력 훈련을 했던 날이었다. 훈련병들은 체력 훈련을 마치고 식사와 목욕 후 내무반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피터와 코리는 자신들의 내무반으로 들어와 취침 준비를 마치곤 몇 마디 잡담을 나눴다.

"오늘도 좆같은 하루였어."

"그러게. 편히 자자고. 난 아까 샤워할 때도 온몸이 뻐근했다니까."

"근데 코리, 너  속옷 못 봤냐. 분명히 더플백에 넣어 놨는데, 샤워하고 나오니까 벗어놓은게 사라졌다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에리의 헛기침이 들려왔다.


"엥? 니 속옷을 왜 나한테 물어보냐?! 게다가 난 남자야. 네 속옷을 왜 만지냐?! 더러운 소리말라고."

"그것 말고도, 내 더플백 안에 있던 양말도 하나 없어졌는데... 이건 훈련소  날에도 없어졌단 말야."


"네 발냄새나는 양말을 내가 왜 갖고 가냐. 웃긴 놈이네, 이거."

코리는 피터의 질문을 단박에 때려부숴 버리고는 어서 자자며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피터는 알쏭달쏭한 얼굴로 뭔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대충 인사치레를 했다. 코리도 손을 다시 흔들어주고는 침대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소등한다. 애들아. 잘 자."

"엉."


"응."


칼리브레는 완전 군장을 한 채 내무반의 전등 스위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다른 소대의 훈련병과 함께 불침번 담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훈련병들의 대답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그가 소등한 후 자동문을 닫고 나가자, 훈련병들은 금방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피터는 달랐다. 불이 꺼진 암흑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던 그에게는 처음은 어두웠으나 점차 내무반의 실루엣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곤하긴 한데. 왜 잠이  오는 거지.)"


속으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뇌이며, 피터는 몸을 뒤척였다. 그는 자신 바로 옆 침대에 누워서 꿈나라로 빠진 코리를 보았다. 그는 코를 나지막히 골며 잠을 자고 있었는데, 피곤하지만 왜인지 잠이 오지않는 피터에게는 부러운 녀석이었다. 잠을 자는 코리를 뒤로 하고 그는 다시 몸을 뒤척이며 천장을 쳐다보려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피터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실루엣을 판별하기 위해 실눈을 뜨고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쉿."

이윽고 친숙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피터의 입은 가로막혔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당황해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ㅡㅡ!"

"아니, 조용히 하라니깐. 나야 나."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이 누군지를 밝히며 피터의 입을 가로막은 손을 치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에리였다.

"뭐야!"

"조용히 해! 애들  깨겠다."


"뭐야... 왜 왔어? 난 오늘 야간 불침번도 아니라고. 오늘은 칼리브레랑 2소대 애들이야."

에리는 어둠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움직이는 것은 피터도 짐짓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웃는데."


"불침번 얘기는  하나 해서. 그냥 심심해서 놀러 온 건데."


에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피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심심하다니.  피곤하다고. 가서 자. 장난  시간이냐, 지금이."


피터의 말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피터의 볼을 쿡 찔렀다.

"그러기엔 엄청 뒤척거리던데. 솔직히 아직  생각 없잖아."


"...그건 그렇지."


인정하는 피터에게 에리가 저번처럼 몸을 밀착시켰다. 그녀는 슬그머니 피터의 이불 속으로 미끄러지며 들어왔다. 생존 훈련의 밤에, 해먹으로 들어온 것처럼.


"어, 어딜 들어오냐고...!"

"아니, 추워서. 여기에  있다가 가려했는데. 이불 없으니  추운 거 있지?"


"..."


이불 속에서, 에리는 슬쩍 피터의 하반신에 다리  짝을 올렸다. 에리나 피터나 생활복을 입고 있었지만, 살갗이 약간 닿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피터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에리에게 자신의 심장이 두근두근 대는 소리가 행여나 들렸을까, 그녀의 눈을 피했다. 에리는 자신의 눈을 피하는 피터의 어깨에 볼을 가까이 대고는 그의 가슴팍에 손가락을 올려 빙빙 돌렸다.

"그래도 피터는 몸이 따듯하네. 이불에 들어오자마자 따듯해졌어."


"응... 다행이네. 난  더운데.  많이."

피터가 덥다고 하자, 에리는  웃었다. 그의 말에 숨겨진 의도를 알아 챈 듯 했다. 피터는 그녀의 웃는 모습에 왜인지 불안함을 느꼈다.

"많이 더운가 봐? 심장도 쿵쿵대고."

"아니야. 그냥 속이 안 좋아서."

"웃기네. 솔직히 말 해봐. 그냥 내가 좋아서 그런  아냐?"

"무,뭣. 그런 생각 안 했거든?"

뜨끔한 얼굴로 피터가 에리를 돌아 보았다. 이 때문에 피터의 어깨에 얼굴을 올려놓고 있던 그녀의 입술에 피터의 입술이 스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던 피터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에리 또한 볼이 분홍색 홍조로 물들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에리가 끝내 입을 열었다.


"뭔가   없어?"


"....음."

"진짜로?"


"부드럽네요..."

"푸흐흡."


"왜!?"

피터의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한 에리가 웃었다. 그녀에게는 피터가 너무 귀여웠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와 있어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여자의 경험이 없다! 이 남자는 조그만 경험도 해  적이 없다! 이 남자의 모든 첫 경험은 '나의 것'이다. 이 남자의 경험과 모든 것을 갖겠다! 라고. 그것이 점점 더 에리의 호기심과 집착을 강화시켰다. 이번엔 이런 행동은 어떨까? 이런 행동을 하면 피터는 어떤 반응을 취할까? 그녀는 더욱 더 피터를 원했다. 격투 훈련  그를 지명한 것도, 생존 훈련 때 그의 해먹에 들어간 것도, 전부 에리의 계산 범위 내 였다. 에리는 자신이라는 독으로 그를 점점 중독시키고 있었다.


피터 또한 그녀의 마음과 근본적으로 다를  없는 마음이었다. 피터에게는 이렇게 가까이 다가 온 여자가 없었다. 애초에, 밭에서 일이나 하던 남자에게 그 어느 여자와 만남이 있을  있었을까? 피터는 지금 뱀에 물려 독에 중독된 개구리 같았다. 몸에 독이 퍼지자 알딸딸한 기분으로 점점 삼켜져 가는, 불쌍한 개구리. 그는 에리라는 맹독에 점점 중독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부드럽다니, 무슨 뜻이야? 내 입술이? 아니면 아까 다리가 서로 닿았을 때? 네 입으로 말 해."


"그, 그건."

"빨리."

에리는 그렇게 말하며 피터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쓱, 그었다. 피터는 에리의 행동과 질문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미칠  같았다. 대체 왜? 에리는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러는 것일까? 끊임 없이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에리에게 질문 다운 질문을 했다. 계속해서 질문 공세를 받아오던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질문한 것이었다.


"그럼, 너는 나한테 대체 왜 이래?"


간신히  밖으로 튀어나온 피터의 질문에 에리는 잠시 표정이 굳었다. 그러더니 에리는 피터의 귀에 가까이 다가갔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라고 배웠니?"

에리는 피터의 귀를 깨물었다. 시작은 그저 약하게 깨물었던 것이었지만 점점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피터는 그녀의 행동에 기겁해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에리의 힘이 더 셌다.


"가만히 있어..."

에리의 명령에 피터는 머뭇머뭇 손에서 힘을 뺐다. 피터는 그냥 그녀의 행동에 숨죽이고 있게 되었다. 처음에 귀가 깨물렸을 때는, 피터에게 약간의 고통과 함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경험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에리의 강도가 세지자, 피터는 곧 자신의 귀를 잘근잘근 씹히는 고통을 느꼈다. 너무나 비참했다. 자신이 친구라고 믿었던 여자에게 저항도 못 하고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런 피터를 더 비참한 느낌으로 만든 것은 귀가 깨물리는 고통 사이에 있었던 알 수 없는 쾌락이었다. 쾌락은 마치 장미 가시에 찔려 배어나오는 핏방울이 손가락을 적시듯, 피터의 몸을 차근차근 적셔댔다. 그는 쾌락에 다시 한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에리는 그의 귀를 때로는 잘근잘근 강하게, 때로는 젤리를 이빨로 사악 베어먹을 때처럼 약하게 깨물었다. 마침내 그녀가 만족하며 씹는 것을 중단했을 때는, 또 다른 쾌락이 피터를 덮쳐오기 시작했다.

에리는 그저 붉게 물든 피터의 귀를 차분히 핥았던 것이었다. 자신이 물어뜯은 그의 귀를 위로하듯, 살짝 빨간 분홍색의 혀는 피터의 귀를 쉽게 유린했다. 피터, 그는 이번에 고통 없는 쾌락이 자신을 덮치자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참고 참도록 노력했지만 새어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피터는 자신의 근성이 점차 꺾이고 휘어감을 느꼈다. 에리는 지금의 피터가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들릴 듯 말 듯 나오는 신음이었다.


"으으..."

피터의 신음에 역시 흥분한 에리는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그녀의 혀는 피터의  구석구석을 쓸어가며 자신의 채취와 타액을 남겨댔다. 마치 이것은 자신의 것이라며 놓지 않으려는 모습 같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묻혀대려는 모습 같았다. 그녀는 피터의 신음이 곧 피터가 그녀에게 패배했다는 증거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피터를 괴롭혔다.


몇 분이 지나고, 이미 침 범벅이 되어 축축한 피터의 귀에 한  입맞춤한 에리는 수치심에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떠는 그를 사랑스레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있나. 싶었다. 그녀는 피터의 볼에 짧게 키스하곤, 조심스레 침대 밖으로 나와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나는...나는.. 왜 저항하지 않은 거지? 너무 수치스러워. 대체 왜 나는 싫다고 말을 하지 못한거야...)"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무심코 귀를 닦아낸 그의 손에 에리의 침이 묻었다. 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묻은 타액의 냄새를 맡았다. 뭔가... 뭔가... 알 수 없는 달콤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순간적으로 이렇게 생각한 자신을 욕하며, 침을 침대의 시트에 닦아냈다. 그렇게 뒤척이면서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는 피터의 머릿속에는, 왜인지 계속해서 에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거지."

그는 조용하게 혼잣말했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할 만한 외모였다. 고작 농부의 아들인 자신이 주제넘게 좋아하거나 사랑을 받을 처지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에리가 가득참과 동시에 의문점도 속속들이 솟아 올랐다. 그중에는 설마 에리가 자신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의문점도 존재하고 있었다. 피터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저런 녀석이 나를 좋아할리가 없잖아. 그냥  망상이겠지.)"


피터에게 에리는 그냥 친근한 친구였다. 코리처럼 정말 오랜 세월 같이 함께한 사람은 아니였지만, 애초에 피터는 자신의 지인을 전부 똑같이 대했다. 오래 만났든, 적게 만났든, 코리나 에리나 그에게는 똑같이 소중한 친구였다. 코리가 도움을 요청하든, 하겐이 도움을 요청하든, 하겐의 친구인 루이, 칼리브레, 로크가 도움을 요청하든간에 그는 목숨을 걸어 그들을 도울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피터에게 에리는 점차 친구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에리를 '여자'로 대한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여자처럼 대우해줬다고는 하지만, 친구가 되고 나서 서로를 알았을 때도 전혀 이성으로 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에리는 피터와 달랐다. 에리는 계속해서 피터에게 알 수 없는 행동들을 해 왔다. 생존 훈련 때는 자신의 해먹에 들어오질 않나, 격투 훈련 때는 왜인지 온갖 관절기와 기술을 걸어가며 자신을 깔아 뭉개고 속삭이지 않나, 지금처럼 이불 속으로 몰래 들어와 귀를 물어뜯고 핥아대는, 비정상적인 행동들을 해 왔던 것이다.

한 가지 웃긴 것은 피터도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점점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 순진한, 여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는 에리에게 점차 중독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빠져들고 중독되는 것을 에리는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껏 피터는 에리와 함께하며 자신이 점점 그녀에게로 물드는 것을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좋았다. 행복했다. 거부하기 힘든 쾌락이 자신을 감싸는 느낌이란,  떼기 힘든 마약 같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그녀에게 물들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씨발... 나도 모르겠다."

그가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봤을 때, 에리의 침대에서 검은 실루엣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실루엣을 집중해서 노려보았고, 내무반의 창문으로 달빛이 흘러들어오며 실루엣의 정체를 비추기 시작했다.

"...뭐야.."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그의 눈에는 꽤나 충격젹인 모습이 들어오고 있었다.  십분 전만 해도, 피터는 코리에게 자신이 벗어논 속옷이 없어진 것을 물었었다.  속옷은 아까도 찾지 못해 피터가 포기한 것이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아니, 없어진 속옷은 고양된 얼굴로 흥분하고있는 에리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피터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 자는 척을 하며 그녀를 몰래 엿보았다. 그녀는 피터의 속옷을 들고 이리저리 만져대고 있었다. 그리곤 잠시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뭐하는 거야..!")

다음으로 피터가 목격한 것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에리는 그가 오늘 하루종일 훈련하며 입고 있던 속옷을, 자신에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아대고 있었다. 비정상적이고, 역겨운 모습이었다. 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토를 참았다. 이런 피터의 마음도 모른 채, 그녀는 새빨간 홍조를 띠우며 흥분에 몸을 떨고 있었다. 확실한 변태가 분명했다. 그녀는 변태같은 행동을 충분히 마쳤는지, 캐비닛을 열고 그 안에 조심스레 피터의 속옷을 넣었다. 그리고는 문득 무언가 생각 난 것처럼 피터의 침대를 쳐다 보았다.

"(앗..)"


다행히 피터는 그녀가 보기 전 눈을 감고 자연스레 이불로 얼굴을 덮은 지라, 지켜보고 있던 것을 들키지는 않았다. 에리의 시선을 계속해서 느끼던 피터는 이내 잠을 자는 척을 했다.


에리의 뒤척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조용해지자, 피터는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내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즐거운 꿈나라로 빠져있었다. 피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에리 쪽을 보았다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에리는 계속해서 피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피터를 보며 얕은 미소를 짓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빨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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