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피터에게도 봄은 오는가]
"잘잤어?"
친근한 목소리에 피터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다른 훈련병들도 제각기 기지개를 펴거나 하품을 하며 아직 가시지 않은 잠을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의 침대 옆에서 컵을 스푼으로 저어대던 에리는 컵을 한 번 후 불고는 피터에게 건네주었다.
"으으, 아침부터 뭐야?"
"먹고 정신차리라구."
에리에게서 건네받은 것은 따듯한 코코아였다. 초코와 물이 잘 어우러져 참으로 맛있고 달짝지근한 코코아였다. 코코아를 홀짝이던 피터는 문득 어젯밤의 수치스러웠던 일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윽."
어젯밤의 기억에 피터의 손이 부르르 떨리자 에리는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피터는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태평한 그녀에게 순간 욕지거리를 뱉을 뻔 했지만, 꾹 참았다.
"아, 아무것도 아냐. 코코아가 뜨거워서. 흐흠."
"그으래? 어쨌든 빨리 마시고 준비하자. 오늘은 훈련이 없는 대신에 무슨 수업을 한다고 하더라."
"엥. 훈련이 없다고라?"
방금 전까지 기지개릎 피며 길게 하품을 하던 코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는 훈련이 없다는 말에 눈이 초롱초롱해져 기대하고 있었다. 에리는 불쑥 끼어든 그의 얼굴을 밀어 치워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정보 수업을 한댔어. 식사하고, 9시 30분까지 이론 수업실로 모이래."
"근데, 지금 몇 시냐."
"8시 21분."
"뭐?! 시간도 별로 없잖아? 빨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자고!"
코리가 서둘러 생활복을 단정히 하고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피터와 에리의 손을 잡아끌어 내무반에서 뛰쳐 나왔다. 아직까지 손에 코코아를 들고 있던 피터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다. 뜨거운 코코아가 조금 넘쳐 흘러 그의 손을 데웠다.
"아뜨뜨! 야 임마! 잡아 당기지 말라고."
"으헤헤! 오늘 조식은 뭐일지 기대되는 걸! 둘 다 얼른 따라오라고!"
"아, 정말..."
지하 식당에 서둘러 내려온 피터 일행은, 아니, 코리의 손에 이끌려 내려온 피터와 에리는 짧은 대기줄을 거쳐 배식을 받기 시작했다. 조식은 *체쉬 구이와 콩 볶음, 따듯한 버섯 수프 한 그릇과 부드러운 빵 두 개였다. (*체쉬: 7000년대의 닭)
"으, 오늘은 면이 안 나왔잖아."
코리가 배식을 받고 식탁에 앉아 불평을 뱉었다. 피터는 빵을 한 입 베어물고는 그의 투정에 대충 대답해주었다.
"너는 저번에 나온 면 음식을 먹고 나선 계속 그것만 찾더라."
에리도 체쉬를 포크로 찍어 먹으며 피터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 국수 같은 거 말하는거지? 라옌이었나. 난 짜고 매워서 별로였는데, 저 녀석은 좋은갑지. 뭐."
간단한 식사 시간이 끝나고, 정보 교육까지는 남은 시간이 넉넉했던 피터는 잠시 연병장을 코리와 함께 걸었다. 에리는 잠깐 내무반에 들리겠다며 일행과는 이탈해 있었다. 이때를 틈타, 피터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걸으며 어젯밤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낼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끄으응."
피터가 고민하며 앓는 소리를 내자, 당연히 그와 마음이 통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코리는 무슨 일이냐고 즉각 물어왔다. 역시 피터의 반쪽이었다.
"뭔 일 있냐?"
"끄으으응...."
"뭔 일인데. 대체. 그렇게 앓기만 하면 알 수가 없어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던 피터는 마침내 코리의 입장에선 뜬금없는 말들을 해오기 시작했다.
"코리, 있잖냐. 에리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푸흡~!"
"아니, 진짜라고. 스발.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
"아~ 그래. 그래. 대체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들어는 줄게. 크크."
피터는 코리에게 생존 훈련 날 밤의 일과 전날 밤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코리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일그러지곤 했다.
"그, 그게 진짜냐...."
"진짜라고. 나도 어째야 될 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너한테 털어놓는 거잖냐?"
"그렇게 말해도... 나도 여자와의 경험은 얼마 없단 말이다. 고등학생 때 꽤 친했던 녀석과 홧김에 키스까지는 가 본 적이 있지만..."
"웩. 너 첫 키스를 벌써 했던 거였냐."
"뭐가 웩인데?! 아무튼. 여자 경험이 없는 나조차도 네 말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꽤 안 좋다고 느낄 정도인데. 정말 사실이지?"
"응. 거짓말이면 나는 3대가 대머리다."
"으음...네가 결혼을 해서 3대까지 만들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내 눈에도 에리가 정상은 아닌 것 같네. 네 말이 정말 진실이라면 에리는 너를 갖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그러냐... 갖고 싶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잡히네."
코리는 피터의 말에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도 뭔가를 떠올리려 하고 있었다. 그는 이윽고 뭔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있잖냐? 상대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서 집착해버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든 사랑하는 상대를 소유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잖아. 심지어는 자신에 매달리지 않으면 못 버티게 만들어서 말이야. 내가 보기엔 그런 것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코리도 미처 설명하지 못 하며 간단히 덧붙이는 걸로 얼버무리려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에리가 그런 사람이라고 쳐도 말이야... 대체 왜 네 속옷을 훔쳐서 냄새를 맡아대는 괴상하고도 기이한 짓거리를 한 지는 모르겠다는 말이지. 그냥 녀석이 변태인 것 아닐까. 이런 부분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가지 너한테 충고해 주자면, 거리를 좀 둬보라고. 네 말이 진실이라면 에리는 정상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 그런가... 이상한 여자라는 소린가. 내 눈으로 직접 보아도 이해하기 힘들었으니. 맞다. 근데 내가 내 양말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 했었냐?"
"엉. 양쪽 복숭아뼈 부분에 주먹이 그려져 있는 거 아니냐."
"오? 알고 있네. 그 양말, 잠깐 도시에 나갔을 때 샀던 건데 한정판이라서 되게 구하기 어렵다고 하더라고. 내 엄마가 사다 주셨었는데."
"양말도 한정판이 있나보네; 엇, 저기 에리 온다."
"?"
코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자, 에리가 막사에서 느릿느릿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피터와 코리를 보고는 발걸음을 빨리하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터는 코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찍으면서 입조심하라고 조심히 일렀다.
"얌마, 알지?"
코리는 그런 피터를 보고는 픽 웃었다.
"아이고. 걱정하지 마쇼."
"소화시키려고 걸어 다니고 있었던거야?"
곧 그들과 마주친 에리는 살갑게 피터에게 질문했다. 코리는 딱히 그녀의 안중에 없었다. 피터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엉."
대답이 시원찮자 에리는 갸웃거렸다. 평소의 강단있고 기가 드센 피터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는 왠지 피터가 자신을 멀리하려는 것 같아보였다.
"어디 아프니?"
"음..."
"어디 아프니."
"아, 아니."
"그으래...?"
에리는 피터와 코리를 번갈아 보더니 코리를 쫙 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뭔지 모를 기운이 감돌았다.
"코리, 피터한테 또 뭐라고 했어?"
에리의 말에 당황한 코리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코리의 눈에는 지금 에리가 평소보다 약간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그녀를 건들면 좋을게 없다는 걸 알아챈 것이었다.
"아,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연애상담.."
피터가 코리의 옆구리를 다시금 찔렀다. 코리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리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연애상담? 누구랑."
"누, 누구냐니. 나랑 상담한 거지 그냥."
"피터는 가만히 있어. 코리에게 물어보는 거잖아?"
"나나나나나나, 나한테?"
그녀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리는 그녀의 강압적인 눈에 완전히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에리는 코리에게 찬찬히 다시 질문했다.
"내 말은. 피터와 네가 상담했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라, '누구' 이길래 피터가 상담을 너한테 했냐고 질문하는 거야. 이해하니?"
"이해했어."
"자, 그럼 다시 물어볼게. 상담의 주인공은 대체 '누구'니?"
"그건, 그건, 그건..."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던 코리는 이윽고 잘 모르겠다며 줄행랑을 쳐 버렸다. 쏜살같이 막사로 달려가는 코리를 보며 피터는 애절하게 그를 불렀다.
"나는 몰라~! 이름을 못 들었다구~! 피, 피터에게 물어 봐!"
"얌마! 코리이! 어디 가?!"
망연자실하게 코리의 뒷모습을 바라 보는 피터에게 에리가 더욱 가까이 걸어왔다. 그녀의 눈은 초점이 피터에게로 정확히 맞춰져 있었다. 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그녀에게 삐질삐질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하하.. 나는 딱히 연애상담 같은 거 안 했어. 에리, 진짜라니까. 너도 알잖나? 난 아직 좋아하는 사람 같은 거 없다고??"
에리는 피터의 말을 조용히 듣다가 나지막히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고...?"
"응! 응! 진짜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라.."
"(설마 나 말실수 한 거냐? 제발, 누구라도 좀 도와줘! 이런 상황은 어색해서 싫다고!)"
속으로 절규하던 피터에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피터와 에리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옮겨졌다.
"피터 메이슨이었니?"
"어어. 너는..."
"반가워. 나는 너랑 같은 중대의 훈련병이야! 이름은 마리 앵겔로이! 검술 훈련 때 몇 번 만난 적 있지?"
"어..응. 그랬지. 아마?"
피터, 그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은 같은 중대의 훈련병인 마리 앵겔로이였다. 1소대의 훈련병이자 검술 훈련의 상위 5명에 속하는 그녀는 마침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그에게 먼저 다가왔던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검술의 강자야말로 친우가 될 만한 사람. 자신이 믿고 따라도 될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피터는 딱 알맞는 사람이었다.
"헤헤, 실례가 안 된다면 네 검술 훈련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 응? 부탁이야."
"그, 그래! 가면서 이야기하자?!"
피터는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에리에게서 안전히 벗어날 수 있다! 라는 마음이었다. 그는 마리와 왁자지껄 떠드는 분위기를 만들고는 쫄래쫄래 에리에게서 벗어나 막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리는 어떻게든 에리에게서 벗어나려는 피터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의 옆에서 같이 걸을 뿐이었다.
"나, 나는 글라디오를 휘두를 때 빠르게 베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휘둘러!"
"오~! 오~! 정말? 그러면 더 빠르게 베버릴 수 있는거야? 좀 더 알려줘!"
"그, 그런거는 좀 더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여, 여기는 다른 사람들이 있잖아?"
"역시! 자신의 검술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기 싫은, 고수의 모습이야!"
이런저런 소리를 하며 멀어지는 두 남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에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도드라진 혈관이 잠시 솟았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피터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그의 행동을 비웃었다. 피터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해도, 어차피 도망칠 수는 없을테니까. 피터는 곧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점점 불안감이 들게하는 존재가 있었다. 마리 앵겔로이. 갑자기 끼어든 년. 자신과 피터 사이에 있던 다리를 치워버리는 존재인 마리에게서는 에리는 조금의 불안감을 느꼈다.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에리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근처의 벽을 주먹으로 때린 뒤 손을 털었다. 벽에는 그녀의 주먹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녀는 주먹 사이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것을 닦아내며 절대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저렇게 속내를 들어내지 않는 년이지만, 언젠가는 피터를 빼앗을 수도 있는 '연적'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
"짜증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