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동화된 자]
"쉿, 다들 조용히해."
대열을 이끌고 조심스레 이동하던 케일이 몸을 낮추며 나지막히 경고를 읊었다. 결사대원들은 재빨리 몸을 낮추며 그의 말을 경청하고 주위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앞에 꾸물럭 거리는 소리 들리나?"
케일은 동굴 끝에서 들려오는 꾸물거리는 소리가 들리냐고 물어보았다. 피터는 집중하며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말랑말랑하고 거대한 것이 몸을 질질끌며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감염 군주가 움직이고 있다. 아마 여기서 도망치려는 속셈이겠지. 놈이 여기를 빠져나가 지하굴로 도망가기 전에, 우리는 그 개자식을 처치한다. 놈을 처치하고나면, 탑 바깥에서 기다리는 수송차량에 일제히 탑승하면 되는거야. 다들 알아들었지?"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케일의 말이 갑자기 날아든 장검의 칼날에 끊겼다. 대원들은 모두 놀라 뒤로 자빠지거나 자신들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다행히 케일은 순식간에 꺼낸 글라디오로 칼날을 막았기에 목이 잘리진 않았지만, 힘이 달리는지 점점 밀리고 있었다. 글라디오의 칼날과는 다르게, 장검의 칼날은 인간의 뼈처럼 새하얀 칼날이었다. 금속의 재질은 아닌 듯 했다.
"이런, 벌써 들킨 것 같군..."
케일에게 칼날을 휘두른 상대는 인간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2m의 장신을 가진 인간. 이상하게도 몸은 새하얬고 성기나 유두가 있어야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체모도 존재하지 않았다. 손톱은 없고, 손가락이 매우 날카로운 팔 4개를 갖고 있는 녀석은 오직 계란처럼 맨들맨들한 얼굴 아랫부분에 길게 입이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
피터가 잽싸게 글라디오를 꺼내 그에게 칼날 끝을 내질렀다. 그는 잠시 놀란듯이 피터쪽을 쳐다보고는 케일의 목을 겨눴던 장검을 거둬 피터의 글라디오를 쳐 막아냈다. 케일은 자신의 목에 가까이 왔던 장검이 없어지자, 몸을 굴러 박차 빠져나왔다. 자신의 글라디오가 칼날이 다치진 않았는지 잠시 살핀 케일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놈이 동화된 자다. 인간의 DNA를 이리저리 섞어 만들어낸 괴물이지.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아니야. 놈은 한 마리의 티스다. 저 놈이 들고 있는 검 보이지? 저 생체검에 베이면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닐거다."
동화된 자는 피터를 노려보았다. 눈이 없어 맨들맨들한 면상이었지만,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피터는 글라디오를 놈에게 겨누고 도발하는 듯이 흔들었다.
"이놈은 제가 쓰러트릴테니, 먼저 전진하십쇼."
"..."
동화된 자는 피터의 말에 커다란 입을 살짝 벌려 혀를 낼름거렸다. 도전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젠장, 괜찮겠냐?! 피터? 그냥 총으로 쏴 재껴버리면 되잖아!"
코리가 흥분하며 동화된 자의 머리를 노려 2발을 쏘았다. 하지만 동화된 자는 검을 들지 않은 팔로 머리를 막아 헤드샷을 피했다. 총알은 동화된 자의 팔뚝에 박혔으나, 곧 살이 붙고 재생되는 소리와 함께 땡그랑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니미럴."
6m는 되는 거리에서의 사격은 그리 효과가 없었다. 코리는 자신의 총을 치워버리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놈도 피터가 마음에 들었나보군. 피터, 너만 믿겠다."
"걱정 마세요."
케일이 피터를 향해 믿음이 담긴 눈길을 보내고, 피터와 동화된 자를 지나 동굴 끝으로 달려갔다. 그의 뒤를 따라 나머지 결사대원들도 머뭇머뭇거리며 달려갔다. 동화된 자는 그들의 진격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겨라. 피터."
"믿고있을게!"
"죽지마."
하겐, 팔런, 마리도 그를 응원하며 떠나갔다. 그들은 피터를 굳게 믿고 있었다.
"꼭 이겨야 해. 여기서 죽으면 나도 죽어버릴거야."
마지막으로 떠나는 에리가 피터를 뒤에서 한번 안고 달려가며 말했다. 피터는 그녀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비록 헬멧의 파란 바이져 때문에 그녀의 표정을 보기는 힘들었지만, 자신을 믿는 표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모든 결사대원들이 그들의 곁을 떠나자, 동화된 자는 자신의 검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피터도 양손으로 글라디오를 꽉 붙잡았다.
"이얏-!"
"크워어-!"
둘은 제각기 함성을 내지르며 맞붙었다. 첫 공격은 생체검보다 칼의 길이가 짧고 덩치도 작았지만, 그렇기에 깊숙이 파고들 수 있었던 피터의 것이었다. 피터의 글라디오가 동화된 자의 배를 빠르게 지나가며, 상처를 내었다.
"(제길, 얕다..!)"
공격을 성공한 피터는 왼발로 땅을 박차고 빠져나오며 동화된 자의 생체검을 피했다. 하지만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기에, 동화된 자에게 그다지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자신의 상처를 한번 바라본 동화된 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상처 부분의 피를 닦아 벽으로 휙 던졌다. 자주색의 체액들이 동굴 벽 주위에 날아가며 철퍽 소리를 냈다. 상처는 언제그랬냐는 듯 조그만 연기들이 피어오르며 재생되고 있었다.
"치사하군. 너만 재생하기 있냐?"
"..."
동화된 자는 턱짓으로 피터의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차폐복 가슴팍에는 위급할 때 재생제가 자동으로 투여되거나 사용자가 재생제를 투여할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장치가 있었다.
"...재생제가 뭔지도 아는 것 같네. 인간과 다를 바가 없구만."
피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화된 자는 생체검의 날을 그에게 향하며 달려왔다. 놈의 생체검은 공기를 가르며 쉬익하는 소리를 냈다. 피터는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기에 생체검을 어찌저찌 막아낼 수는 있었다.
챙-!
검과 검이 맞부닺히는 소리가나며,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동화된 자의 힘이 더욱 강력해서 피터의 글라디오는 쇳소리를 내며 점점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생체검이 피터의 가슴팍을 그어버리고 피를 마시게 될 것이 틀림 없으리라.
"(!)"
피터는 생체검을 막던 글라디오를 순간적으로 꺾으며 비스듬히 만들고는 온 힘을 다해 짓눌렀다. 날이 옆으로 더 넓었던 글라디오였기에 동화된 자의 힘이 더 세더라도 날의 면적이 큰 글라디오로 눌러버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동화된 자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자신의 생체검이 미끄러지며 빗나가는 상황에도 그는 짐승의 본능을 발휘해 칼을 잡고 있던 자신의 한 손을 놓고, 그 손으로 피터의 가슴팍을 올려 긁어버렸다. 날카로운 손가락들은 티스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으으윽!"
피터는 가슴팍이 찢어지는 고통에 뒤로 물러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도 자신의 공격을 잊지않고 검을 휘둘렀다. 동화된 자의 오른팔 중 하나가 잘려 높이 솟구쳤다.
"크워어!"
동화된 자도 날아간 자신의 팔이 있던 부분을 보고 고통의 신음을 냈다. 일반적인 티스였다면 그다지 큰 대미지가 아니었겠지만, 인간을 모체로 만든 동화된 자에게 팔이 잘린다는 것은 큰 대미지였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팔이 잘린 것은 중상에 속하니까.
자주색 체액들이 잘린 부분에서 파도처럼 쏟아져 나왔다. 동화된 자는 재생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상처 부분을 겨우겨우 막았을 뿐 잘려나간 팔이 재생되지는 않았다.
동화된 자가 자신의 상처를 재생시키려고 하고 있을 때, 피터도 자신의 상처를 재생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투여된 재생제는 느릿느릿 그의 복부에 난 상처를 재생시켰고 차폐복 재질의 유기물들을 활성화시켜 차폐복의 손상된 부분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피터는 자신의 복부를 만져보며 더이상 피와 쇳조각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앞을 쳐다보자, 동화된 자도 팔의 상처를 틀어막고 이를 갈고 있었다.
"...네놈은 깊은 상처를 순식간에 재생시킬 수는 없나보구나. 그럼 나는 네놈을 쓰러트릴 방법이 있지."
혼잣말을 내뱉은 피터는 아직도 복부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일어섰다. 그는 양손으로 글라디오의 손잡이가 부서지도록 잡았다.
"덤벼. 개새끼야. 다른 팔도 날려줄테니까."
피터의 도발을 알아들은 동화된 자가 맨들맨들한 얼굴을 구겼다. 인간의 DNA를 사용한 이 괴물은 피터의 말을 알아듣고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의 팔을 날린 것도 모자라, 욕지거리를 내뱉다니. 동화된 자는 분노에 몸을 움직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쿠아아아아아아-!"
"...역시. 너는 인간을 따라한 괴물일 뿐이야."
글라디오를 꽉 붙잡고 동화된 자의 생체검을 내리친 피터는 다시금 글라디오를 비틀어 글라디오의 옆면이 자신을 향하게 했다. 날카로운 면이 아닌 평평한 면이 자신을 바라보자, 피터는 글라디오의 옆면을 발로 밟아 생체검을 깔아뭉겠다. 생체검은 기긱 소리를 내며 땅에 박혔다.
"!!!"
동화된 자는 깜짝 놀라며 검을 잡아빼려고 했다. 하지만 차폐복을 입고 있는 피터의 발을 밀쳐버리고 뽑아낼 수는 없었다. 검이 뽑히지 않자, 동화된 자는 자신의 볼까지 연결된 커다란 입을 쩌억 벌리고 괴성을 질렀다. 입안 가득 빼곡히 들어선 날카로운 이빨들에서 침이 튀었다.
동화된 자는 그대로 피터의 머리를 삼켜버리려 했지만, 피터의 왼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피터의 왼손에 들린 권총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동화된 자는 자신의 입을 빨리 닫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지 오래였다. 피터는 씨익 웃으며 그를 비웃고는 방아쇠를 당겼다.
"걸렸다."
자동권총의 총구에서 총탄들이 쏟아져 나왔다. 총탄들은 동화된 자의 목구멍부터, 뇌와 척추를 완전히 박살내며 뚫어버렸다. 동화된 자는 즉사하며 뒤로 넘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진 그의 입에서 자주색 핏덩이들이 꿀럭거리며 솟아올랐다.
"인간 흉내를 내실거면 어설프게 내시면 안돼지. 생각도 없고, 도발에 넘어가기만 하는 머저리 자식."
피터는 쓰러진 동화된 자의 머리를 발바닥으로 짓밟으며 으깨버렸다. 그는 차갑게 식어가는 동화된 자의 시체를 한번 걷어차고는, 동굴 끝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