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지옥의 군단장 2]
"어, 어서.. 가야만-"
"안돼요!"
제스가 패닉룸에서 벗어나 계단으로 오르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아귀는 힘이 얼마나 셌던지, 피터가 떼어낼수 없었다.
"가야 한다고! 미래를 봤단 말이야! 내가 그 미래에서, 놈을 봤으니.. 좋든 싫든 가야만해."
"...하지만. 너무 위험하단 말입니다."
"뭐가?!"
"당신도 지금 느꼈잖아요. 고작 미래의 파편으로 본 놈의 모습이었지만... 드러누워 발작을 할 정도로 말예요. 그런 놈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살아남을 생각은 있는겁니까?"
"그.. 그건."
피터는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본 미래를 무시해버릴 수는 없었다. 미래 예지는 어떻게든 이루어지기도 하나, 이루어지지 않으면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야만해. 내가 본건 예언이 아니라 예지였단 말이야! 이걸 무시하게 된다면... 다음에 벌어질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망..망할. 당신이 본 악마가 뭔지나 알고 말하는거에요? 그냥 지옥의 군단장! 이렇게 한마디 들으면 무슨 놈인지도 잘 모르겠죠!? 잘 들어요. 당신이 만나려는건 지금 저희 인류 보안부에서 3순위로 쫓고 있는 놈이란 말예요. 놈이 멸망시킨 행성만해도 몇천개가 넘어가겠죠!"
"..."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놈이 이곳에 왔다는건, 정말로 당신을 빼앗으려는 겁니다. 알겠어요?"
"날 빼앗으려는 게 아니었어. 놈은.. 날뛰고 싶어 했어."
"네?"
"놈이 어느 벨라토르의 육신으로 촉수를 뻗쳐대더군. 그 불쌍한 벨라토르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노리고 온 건 아닐거야."
"..."
"그러니 난 가야겠어. 난 죽지 않을거야. 아드라말레크를 만나는 미래를 보았으니.. 적어도 그때까지는 죽지 않겠지. 죽는게 무섭긴 하지만... 이뤄지지 않을거라고 생각해."
"무슨 근거죠? 당신이 죽지 않을거라는 근거는요!?"
"...아드라말렉은 나와 같이 온 은하계를 불태운다고 했어. 놈도 나를 만나는 미래정도야 파악하고 말한거겠지."
"..."
"난 가볼테니, 세일을 잘 보살펴줘. 레나! 가자!"
"예!"
피터의 말에 레나가 무기를 챙기고 달려왔다. 세일은 다른 검은 안개 연대원들에게 업혀져 패닉룸의 치료 시설로 업혀갔다.
"소위님은 제가 꼭 지키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레나가 제스와 피터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의지가 말에서 묻어나와, 믿음을 주었다.
"그럼, 그래야겠지. 가자고!"
피터는 그녀의 의지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윗층으로 올라가는 두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 제스가 뒤에서 피터를 향해 외쳤다.
"잠깐만요!"
"?"
레나와 피터는 제스의 말에 의아해하며 뒤돌았다. 그곳에는 제스와 그녀의 소대원들이 결심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저희도 같이 갑니다."
"뭐?"
"저희의 임무는 애초부터 연방의 미래 예지 능력자, 즉. 피터 소위님을 호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드라말렉을 보기 전에 죽어버린다면... 저희는 저희의 유용성을 증명하지 못하게 되겠죠. 임무도 실패한 패배자들이 될 거구요.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이 30명 채 남지 않았지만, 제 소대원들이 함께 해줄 겁니다."
"...고맙다."
제스는 그런 피터에게 미소를지어보이고는 자신의 소대원들에게 움직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녀의 지시에 테니를 비롯한 그의 분대도 움직였으나, 제스는 테니에게 잠시 멈추라 말했다.
"으음."
"왜?"
"너랑 네 분대는 여기 남아서 세일씨를 지켜야지. 그리고 비상시를 대비해 패닉룸도 준비해두어야 하고 말이야. 내 말 알겠지?"
"....하아. 알겠어."
테니와 그의 분대가 거대한 패닉룸의 입구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굉음과 함께 닫히기 시작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테니는 제스에게 연방의 경례를 했다.
"이제 가자구요. 라미엘씨도 곧 이쪽으로 와줄겁니다."
제스와 그녀의 분대원 두명이 앞서 걸어갔다.
.
.
.
.
[휘잉-]
생명력 강탈자가 공기를 가르며 테리우스의 어깨 갑옷에 명중했다. 생명력 강탈자는 테리우스의 코사트 포자르 갑주를 베어가며, 탐욕스러운 기쁨의 울음 소리를 외쳐댔다. 마침내 생명력 강탈자가 테리우스의 살갗 표면에 닿았을 때, 생명력 강탈자는 불경한 칼날로 테리우스의 피와 살결을 탐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명력 강탈자가 테리우스를 괴롭히는 것을 알아챈 케세우스는 그저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조롱했다.
"하하하--!"
"..."
"이제는 좀 생각이 바뀌나? 내가 너를 압도할만한 힘을 어떻게 가졌는지, 궁금해?"
"..."
"우리와 계약해라! 너의 육신을 지옥 군세의 것으로 만들어라! 대가 없는 강함을 손에 넣으라고! 나와 내 형제 자매들처럼-!!"
"...웃긴소리."
테리우스가 가공할만한 힘을 내뿜으며, 생명력 강탈자와 케세우스를 강하게 쳐내었다. 생명력 강탈자는 자신이 탐욕스럽게 마셔대던 반신의 피와 살결이 멀어짐을 깨닫고는 울분이 담긴 비명을 질렀다.
"네 강함이 정말 대가 하나 없을 것 같냐? 이 전쟁이 끝나면, 만에 하나 네놈들의 불경한 검과 총탄에 연방이 불타 쓰러진다면... 그때는 악마들이 너희들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할걸? 그런 수치스럽고, 수금이 기다리는 미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멍청한 놈."
테리우스의 롱 소드가 바람처럼 케세우스의 갑주로 날아들었다. 롱 소드는 손쉽게 케세우스의 가슴팍을 베어버리며, 이제는 타락한 반신의 피를 울컥울컥 쏟아내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케세우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붙들고는 무릎을 꿇었다.
"크으으으악.."
"붙어보니 별것도 아니군. 고작 그런 실력과 열망으로... 연방을 부순다니, 자유를 되찾는다니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졌나? 네놈의 그 저주받은 검이 내게 닿았던건 꽤나 불쾌한 경험이었다. 뒤틀린 자야."
"으으.. 이 새끼가.. 이 몸에게.."
"흥, 너희란 놈들은 하나같이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지. 자유니, 연방을 불태워버리겠다느니, 나약한 자들을 지배하자느니.. 이제는 그런 생각을 떠올린 네놈의 머리를 내가 자유롭게 해주마."
테리우스가 그의 기다랗고 두꺼운 롱 소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활주로 곳곳에서 불타오르는 불길에서 나온 불빛들이, 그의 롱 소드에 비쳐지며 반짝거렸다.
[투콰아아아아아앙-!!!!!]
"?!"
굉음과 함께 번개가 내리쳤다. 그 광경에 활주로와 들판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 적 아군 할 것 없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먹구름들이 급속도로 하늘에서 모여들더니 우르릉하는 소음을 냈다. 먹구름들은 잠시 두껍게 뭉쳐지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구멍이 뚫린듯 비를 내려대기 시작했다.
"...비?"
테리우스는 손바닥을 펼쳐 떨어지는 비를 확인했다. 시뻘겋고, 끈적거리는... 피.
"이, 이게 무슨. 설마!"
당황한 그가 번개가 떨어졌던 곳으로 눈을 돌렸다. 섬광과 함께 번개가 내려앉았던 곳은 커더란 구멍이 뚫린 채 불길한 연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들은 그곳을 향해 벌레처럼 모여들더니, 어느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형제 자매들이여! 비상 상황이다! 전부 저 형체를 향해 화력을 집중하라! 어서--!!"
곧이어 반신들의 소총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포탄과도 같은 총탄들은 만들어지고 있는 형체를 타격하며, 사방팔방에 조그만 폭발을 흩뿌렸다. 그럼에도 형체는 멈칫하는 기색 하나 없이 어느 거대한 촉수를 만들어냈다.
어둡고, 안개처럼 뭉실거리는 촉수는 희생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놈은 그리고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네르갈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촉수는 네르갈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순식간에 알아차려, 그의 욕망을 행복하게 만끽했다.
"!!"
테리우스는 촉수가 다음 할 일을 1초도 안되어서 간파했다. '놈'은 육신을 원하고 있었다.
"네르갈!!"
검은 안개같은 촉수가, 네르갈의 몸을 꿰뚫었다. 촉수의 공격을 받은 네르갈은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넘어졌다.
.
.
.
.
"우, 우와앗-"
공항 건물 내에 울려퍼진 충격에 피터가 몸을 기우뚱했다. 그리고 그는 그만 계단을 헛디뎌 뒤로 나자빠지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조심해요."
레나는 번개같이 피터의 손목을 붙잡았다. 피터는 그런 그녀에게 고맙다는 눈길을 보내었다.
"근데 방금은 대체 뭐였던거야? 말도 안되는.. 충격이.."
횡설수설하는 피터를 뒤로하고, 제스와 레나는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지금 일어난 충격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놈이 왔나봐."
"그런 것 같아요. 다들 마음 단단히 먹죠."
"뭐라고하는거야? 설마, 판이 왔단 거야?"
"...이제서야 알아채는겁니까?"
레나가 피터를 바라보며 얼척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놈이 왔다는거면, 밖에 있는 벨라토르들도 어느정도 준비하고 있을거야. 아님 이미 시작되었을수도 있지."
상황을 예측하던 제스의 무전기가 울렸다. 제스는 그것이 평소와 같은 무전기가 아닌, 라미엘과 연락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라미엘씨."
"제스, 피터 소위는 괜찮나?"
"네. 하지만 이쪽도 피해가 큽니다. 마이스씨와 자드씨가 전사했고, 세일씨는 목숨만 붙어있는 상황이에요. 제 소대도 27명이 죽고,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도 20명 내외입니다."
"...많이 고생했군. 나는 지금 전방의 타락한 형제들과 악마놈들을 몰아내고, 지금 후방에 있는 활주로로 이동중이네. 자네들은?"
"저희도 후방으로 이동중입니다만.. 후방에 '판'이 나타났습니다. 소위님이 본 미래였어요. 그리고 소위님도 후방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동행하고 있습니다."
"사실이야?! 판이..?!"
"네. 무슨 방법 없을까요..?"
"...내일 아침에 아즈레엘과 보안부 지원군이 온다고 하긴 했다네. 그때까지 버틸 수 있냐는게 의문이지만."
"아즈레엘님이 온다는거면, 아침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내면 되겠는데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후방에서 만나세. 피터 소위를 무조건적으로 호위하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무전이 끊겼다. 무전을 끊은 제스의 얼굴은 무언가 기대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피터는 그런 그녀에게 라미엘과 무슨 이야길 나누었냐고 물어보았다.
"제스, 라미엘님이 뭐래? 아즈레엘은 또 누구고?"
"소위님. 그렇게 모든걸 알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확실한건,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자는 겁니다."
"...쳇. 알겠어. 알았으니.. 빨리 이동하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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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마치 어둠이 몰아내져, 쥐구멍으로 숨어버리는 것처럼. 번개가 만들어낸 자욱한 연기가 물러가고 하늘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지는게 멈췄을 즈음, 전장 한복판에 누워있는 네르갈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르갈!"
테리우스와 그의 형제 자매들이 네르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엎어진 채 꿈쩍하지도 않았다. 네르갈의 모습을 본 케세우스는 그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미소 짓는 케세우스처럼, 다른 악마들과 데모니오들도 벨라토르와 연방군에게서 살짝 물러나며 웃었다.
"흐흐.. 흐흐흐.. 흐하하하하하!!"
"이새끼!"
테리우스가 케세우스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올렸다.
"무슨 짓을 한거냐?!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고!!"
"흐흐.."
"말해!"
"네 형제는.. 돌아오지 못한다. 이제.. 그분의 육신이 되었나니. 너희들에게 해줄 말은 이것 뿐이야."
"그래...?"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롱 소드가 케세우스의 목덜미에 내리쳐졌다. 케세우스의 목은 손쉽게 잘려 땅바닥을 굴렀다.
"네르갈!"
헤이네르 자매가 네르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와 그를 살폈다. 그의 몸에는 딱히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네르갈, 정신차려. 괜찮아?"
"아...으.."
"좋아, 내 손가락 보이지? 정신이 들어오고 있군. 재생제가 투입되고 있어. 곧 정신을 차릴거야."
손가락 두어개를 흔들어보이던 헤이네르가 테리우스를 보고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네르갈, 서서히 일어나봐. 이제 괜찮지?"
헤이네르가 네르갈의 손에 검을 쥐어주며 그를 일으켰고, 네르갈은 헤이네르의 도움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 힘든듯 눈을 감고 이리저리 굴려대고 있었다. 그 순간 헤이네르는 불현듯 불길함을 느꼈다. 반신의 초감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헤이네르가 불길함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는 것보다 빠르게, 네르갈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그는 헤이네르 자매의 헬멧, 즉. 머리를 쥐고는 강하게 붙들었다.
"으윽?! 네, 네르갈!"
당황하는 헤이네르에게 네르갈이 그녀를 비웃듯 내려다보았다. 헤이네르는 네르갈의 눈이 자신이 알고 있던 형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네르갈은 헤이네르의 머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욱 주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붉은 지옥에게 영광을! 사악한 자들에게 영광을!"
네르갈은 그대로 헤이네르의 목을 참수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