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비장의 카드]
"커허억-..."
망치를 들고 있던 라미엘이 고통의 신음을 흘렸다. 그의 손에 들린 황금색 망치가 잠시 흔들리더니 그대로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땅으로 떨어졌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으오오오오-!"
라미엘은 초월적인 반신의 육신으로 고통을 간신히 이겨내고는 자신에게 박힌 촉수들을 뽑아내었다. 판을 떨쳐낸 그는 떨어진 자신의 망치를 줍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판의 촉수가 먼저 그의 망치를 붙잡았다.
"!"
촉수는 그대로 라미엘을 올려쳐 뒤로 몇m를 날려보냈다. 라미엘은 다시금 일어서 판에게 맞섰으나, 그는 점점 공항 건물 가까이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가 넘어지면 공항 건물의 입구에 닿을 수준으로 밀려나자, 판은 자신의 촉수들을 그에게로 날카롭게 날려 그의 육신을 뚫었다.
커다랗고 두꺼운 검은 촉수들이, 라미엘의 양 어깨와 가슴팍들을 뚫고 반신의 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판은 라미엘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마인드 에너지적인 번개를 생성하는 것을 보고는 그를 촉수로 후려쳐 멀리 날려보냈다. 라미엘은 거대한 공항 건물 가까이 날아가더니, 어느 기둥에 그대로 박혀 정신을 잃었다.
"역시나 너희들은 이런면에서 약해."
판은 느릿하게 일어서며 고개를 뚜둑거렸다. 완전히 강림한 판이었다면 라미엘 같은 벨라토르는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겠지만, 불완전한 강림이었기에 자신의 힘을 있는 그대로 분출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가 빼앗은 네르갈의 육신은 심한 상처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의 촉수들에도 상당한 상처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있는 조그만 인간적인 면을.. 살짝 건드려주면 아주 미치지. 방금 네가 날 쓰러트리지 못했던것처럼 말이다."
판은 네르갈의 목소리로 라미엘을 조롱했다.
"중대장님!"
어느 벨라토르 군단원 두명이 그들의 검을 뽑아들고 판에게 맞섰다. 판은 그런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성인 남성만한 두께의 촉수로 그들을 붙잡아 으깨버렸다. 죽어가는 벨라토르들이 촉수에 상처를 입혔으나, 판은 그들을 걸쭉한 주스가 될때까지 쥐어짜고 또 쥐어짜버렸다.
"아억.. 중..대장님-"
벨라토르들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중대장을 걱정했다. 라미엘은 자신의 부하가 엄청난 압력에 쥐어짜이며 죽어가는 신음을 듣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라미엘이여, 방금도 보았겠지? 죽어가는 널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전사들을. 넌 그들도 지키지 못해. 네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모두를 이곳에서 후퇴시키는 것이었다. 네가 그들의 앞으로 나서 그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
"난 네놈들 같은 병신들을 이해할 수 없어. 남을 위해 죽고, 남을 위해 싸운다? 그런 멍청하고 정의의 사도같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네 자신들에게 솔직해지란 말이다."
"..."
"네놈도 여기서 죽는 것이 개죽음이라는 걸 깨달았나보지? 앙? 결국 너는 줄을 잘못 선거다. 네놈이 죽고 나면, 네 뒤에 있는 저 멍청한 필멸자들은 도살장의 어린양마냥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겠지. 그들을 지원하러올 자들은 이미 우리의 흑구름이 막아주고 있으니까."
판이 말이 없어진 라미엘을 비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랗고 웅장한 흑구름들이 서로 모여서 방패같이 단단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자, 죽기 전에 할말은 없나?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말해보면 생각은 해보겠지만."
"..."
"없나보군."
승리를 확신하는 판이 자신의 뒤틀린 왼팔을 높게 들어올렸다. 그의 주위에 있는 악마들이 그 모습을 보며 함성을 지르거나, 비열한 웃음을 뿜어댔다. 쓰러진 반신은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도 저항하지 못한 채 숙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넌 졌다. 포데스타."
"...뭐?"
"판, 네가 우릴 공격해온 군세가 가진 비장의 카드라면.. 우리 연방도 비장의 카드가 하나 있지."
"뭐라?!"
판이 빙의한 네르갈의 얼굴이 심히 뒤틀렸다.
"너는 우리의 능력을 너무 얕봤어."
라미엘의 짧은 한마디와 함께, 공항 옥상에서 준비하고 있던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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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엘이 시간을 끌기 위해 나간 직후의 공항 내부.>
"라미엘 씨가 진짜 나갔군."
팔짱을 낀 어느 대원이 라미엘이 나간 입구를 보며 서글픈 듯 말했다.
"...그래. 저분은 강력한 사람이니까.. 죽지 않을거야. 우리가 이제 할 일은, 피터 소위님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거겠지."
"활용한다고?"
피터가 제스의 말에 물음표를 띄웠다.
"네. 제가 당신에게 준 블랙 콘솔리다시온. 그걸 잘 써야될 겁니다."
"...하지만 내가 저기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라미엘님이 하늘에 낀 흑구름을 내 능력으로 제거해야한다고 말했긴했는데."
"방법이 있긴 있어요. 조금, 아니.. 엄청 위험하긴 하지만."
"그 방법이란게 뭐지?"
"저희에게는 없지만, 레나씨에게는 있지요. MTMA 기동병들의 택티컬 슈트 발바닥에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움직임이나, 잠시 비행을 할 수 있는 제트풋이 달려있습니다."
"아... 대충 알 것 같은데?"
피터가 자신 옆에 서 있는 레나를 쳐다보았다. 레나는 자신의 발바닥을 들어 제트풋의 분사구를 보았다.
"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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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를 끌어안은 레나는 자신의 헬멧 바이져를 올렸다. 레나의 택티컬 슈트의 양 발바닥에서, 뜨거운 화염들이 분출되며 그녀에게 비행 능력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택티컬 슈트가 비행을 할 수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그대로 피터를 끌어안고 하늘 높이 솟았다. 그녀에게 안겨있던 피터도 인류 보안부 대원들이 입는 검은 차폐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소위님! 꽉 잡으세요! 놓치면 안됩니다!"
"알고 있어!"
피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자신에게 느껴지는 중력 가속도에 혀랠 깨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는 몇분 전 제스가 말했던 계획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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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씨...발. 지금 나보고 저 흑구름 가까이 가서, 내 이능력 무효화로 흑구름을 몰아내란 말이지?"
"그래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레나씨의 도움이 매우 절실하겠죠."
"...만약 실패하면?"
"...이곳에 지원군은 오지 못할거고, 결국 이 공항의 생존자들은 궤멸되겠죠. 저나, 소위님의 동료들도 말예요."
"후--."
피터가 그의 동료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잃고 싶지 않은 녀석들. 가족 같은 녀석들이었다.
"그래서 레나가 나를 끌어 안고, 저 흑구름들 가까이 가. 그래서 내가 내 능력으로 흑구름을 몰아내. 그런 다음엔?"
"...그 후에는 레나씨의 판단에 맡겨야죠. 하지만 소위님도 거기까지 맨몸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몸이 버티지 못하거나, 순간적인 가속도에 기절할지도 모르니까요."
"흠."
제스의 말에 피터가 레나를 쳐다보았다. 레나도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표정을 띤채, 피터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차폐복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죽은 제 대원이 쓰던 겁니다만.. 상태는 새것과 다를 바 없을겁니다. 차폐복을 입고 있으면 어느정도 높이에서 떨어져도 안전할 겁니다. 육체 능력도 강화되어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겠죠."
"..."
"하실 겁니까?"
"...해야지. 씨팔. 내가 안하면 누가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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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빌어먹게 미친 작전이야!!)"
레나에게 안겨진 피터는 속으로 몇천만번을 넘게 후회하고 후회했다. 벌써 레나는 공항의 옥상을 벗어나, 흑구름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피터는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높이에 잠시 식겁했지만 생각보다 높지 않음을 깨달았다.
"레나!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것 같은데?! 근데 흑구름에 거의 다 왔잖아!"
"맞아요! 제 헬멧으로 분석해본 결과.. 앞으로 100m만 상승하면 도달할 수 있을거라는데요!"
"제길, 역시 자연적인 흑구름이 아니었잖아? 이렇게 낮은 고도에 구름이 낄리가 없지!"
"소위님,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약물을 투여하셔도 괜찮겠는데요?!"
피터가 레나에게 안긴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뭉게뭉게 뭉쳐진 흑구름들이 피터가 점점 다가가자, 물에 솜사탕을 풀어헤친 듯 형태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피터의 이능력 무효화가 들어먹히고 있었다.
"레나! 방금 봤어?! 흑구름이.."
"봤어요! 소위님, 이제 어서 해야 될 것 같은데요!"
"..."
피터는 흔들리는 그 상황에도 차폐복 주머니에 있는 블랙 콘솔리다시온을 꺼내들었다. 그는 주사기 속에서 흔들리는 새카만 액체를 보며 잠시 머뭇했지만, 이윽고 자신의 차폐복 어꺠에 있는 약물 투여 부분을 열고 그곳에 두꺼운 주사기를 박아넣었다.
"으으우우-!"
피터의 몸이 살짝 진동하며 그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레나는 자신이 어떻게든 끌어안고 버티고 있는 사내가, 기이한 신음을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소위님?!"
레나는 발작을 일으키는 듯이 움직이는 피터에게 무슨 일이냐고 외치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포탄을 간신히 피했다. 지상에서 준비하고 있던 악마들과 데모니오들이, 불경한 탄환들과 포탄을 쏘아대고 있었다.
"아아악-!"
어느 타락자의 혐오스러운 저격총에서 발사된 탄환이, 레나의 왼쪽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레나는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참아내었다.
"레, 레나!"
"저는 괜찮아요! 소위님, 이제 어떡할 거죠?"
"내게도 생각이 있어. 레나, 너 나를 잡아서 하늘 높이 던져볼 수 있어?"
"...네?"
"어서! 할 수 있지?"
"이익.. 해볼게요!"
레나는 자신의 가슴팍에 끌어안았던 피터를 양손으로 겨드랑이를 붙잡아 자신의 아래로 내렸다. 그 후 그녀는 무거운 공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듯, 피터를 양손으로 강하게 들어올려 날렸다.
"레나! 넌 그대로 공항으로 돌아가! 어서--!"
피터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레나의 귓가로 울렸다. 레나가 공항을 향해 추락하면서 피터를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노란 섬광으로 조금씩 생겨나 흑구름을 몰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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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두 병사의 행동을 보고,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저격총에 맞은 어느 병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며 의아함은 곧 만족으로 뒤바뀌었다.
"저게 네가 준비한 '비장의 카드'냐? 고작 제트풋을 타고 날아가 하늘에서 장렬히 떨어지는게?"
"..."
"별것도 아닌걸로 시간을 끌었군. 네놈의 목을 베어주마. 번개의 천사야."
판이 다시금 자신의 왼팔을 들어올렸다. 혐오스러운 그의 왼팔이 마침내 라미엘의 육신에 닿기 직전, 노란색의 섬광이 그들에게 내리쬐어졌다.
"뭐, 뭐야?"
노란색 섬광은 1초도 안되는 사이에 강렬히 반짝이며 사라졌지만, 그것이 남긴 여파는 거대한 것이었다. 판이 강림하며 몰고온 흑구름들은 그 섬광에 형체를 잃으며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판은 자신의 흑구름들이 사라지는 모습에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뭐야! 무슨 짓을 한거야?! 무슨 짓을 한거지?"
판은 쓰러진 라미엘을 들어올려 위협하고, 을러댔다. 그러나 라미엘은 파괴된 헬멧 사이로 비웃는 듯한 웃음을 낼 뿐이었다.
"이이익.. 좋아. 꺼져버려!"
그는 들어올린 라미엘을 공항 안으로 던져넣어버렸다. 그러자 연방의 병사들이 라미엘의 육신 주위로 모여들며 그를 보호하는 방진을 펼쳤다.
"웃기지도 않은 짓을.."
판은 그런 그들에게 콧김을 뀌고 자신의 위를 올려다 보았다. 확실히 그가 몰고온 흑구름들이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심지어 흑구름들이 물러난 곳에는 연방군의 문양이 새겨진 수백대의 수송선들과 제트풋, 차폐복을 착용한 수천명의 연방 공군 기동대들도 쏜살같이 강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검은 안개같은 것들도 도사리고 있었다.
"씨바아알! 무슨 짓을 한거냐고!! 저 새끼들은.. 이곳에 오지 못할거였는데!"
분노하는 그의 눈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어느 병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병사는 정신을 잃었는지, 힘을 잃고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하고 있는 병력들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정신을 잃고 떨어지는 병사를 감싸기 시작했다.
"!"
판의 앞으로 검은색의 안개가 사뿐히 착륙했다. 그 안개들 사이로 연방 기동대들도 각자 장비를 쥔채 땅으로 착륙했다. 곧이어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검은 안개들이 사라지며, 병사를 안전하게 지상으로 데리고 내려온 형체가 드러났다.
"이 병사는 우리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즈레엘은 자신이 안고 있던 피터를 자신의 옆에 서있는 연방 공군 기동대에게 넘겼다. 그 기동대원은 제트풋을 작동해 공항 건물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저 병사의 도움으로... 네 목을 벨 수 있겠구나. 불경한 악마야."
"...날 곤경에 빠트리다니..!"
"라미엘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
아즈레엘이 기동대원들에게 라미엘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8명의 기동대원들이 라미엘을 질질 끌며 공항으로 이동했다.
아즈레엘이 자신의 낫을 휙휙 돌려 낫의 날을 판에게로 겨누었다. 그의 검은 망토가 휘날리며 인류 보안부의 문양을 드러냈다. 판은 그런 아즈레엘을 향해 괴성을 질러보인 뒤 자신의 왼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뒤에 있는 악마들이 제각기 함성을 질렀다.
"붉은 지옥에게 영광을! 사악한 자들에게 영광을!"
"전 병력, 교전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