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모두와 떨어지고 싶지 않은 남자, 그 남자를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
"으, 음.."
피터는 굳게 감겼던 그의 눈을 조금씩 움직이며, 뜨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옆에서 그를 보살피던 3명의 검은 안개 연대 의무병이 동시에 소리쳤다.
"소위님이 눈을 뜨신다! 정신이 돌아오신다-."
"진짜야?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제스가 누워있는 피터에게 다가와 손을 흔들어보였다.
"소위님, 정신이 듭니까?"
"...어?"
"살아계시군요."
"내,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거지..? 난 분명히 정신을 잃기전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맞아요. 거기에 블랙 콘솔리다시온의 부작용으로 심장도 잠시 멈춰버렸었죠. 손가락 끝과 발가락에서는 일시적인 괴사도 일어났구요. 쉽게 말해, 죽을뻔 했네요."
"...밖은? 내가 성공한거 맞아?"
"그럼요. 소위님덕에 지원군들이 강하할 수 있었습니다. 오, 소위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지금 들어오네요. 인사드리시죠."
"?"
피터의 뒤에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리에서 상체만 느릿하게 일으킨 뒤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멈췄는데, 용케도 살아남았군. 병사."
아즈레엘이 그의 후드를 벗으며 피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주위에는 검은색의 안개들이 조금씩 뿜어져 나와, 계속해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나는 아즈레엘 키세스. 인류 보안부 행동팀의 대원이다."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피터의 귀를 두들겼다. 그에게서는 피터조차도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벨라토르들조차 뛰어넘는, 위험성의..
"그리고 난 네 목숨을 구했지."
"아.. 감사합니다."
"아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너도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의 목숨을 구한거나 다름 없으니. 그 거리에서 *AD 폭탄을 터트릴 줄이야."
(AD(Anti-Deemon)폭탄: 불경하고 추악한 자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폭탄.)
"예?"
"하하.. 아즈레엘님. 밖은 괜찮은 겁니까?"
제스가 피터의 의아한 말을 끊으며 아즈레엘에게 바깥 상황을 물었다. 아즈레엘은 그녀의 질문에 망토 속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왼손을 꺼내들었다. 그의 왼손에는 네르갈의 헬멧이 들려있었다.
"판을 처리했다. 아마도 현세로 다시 기어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불완전한 강림이라... 다행이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내일 아침이 되면 연방 육군 기갑대와 수많은 병사들이 충원될거다. 이곳 메헤테크 공항으로 말이지. 그때까지 나는 이 주위를 돌며 경계를 강화하겠다. 제스."
"알겠습니다. 수호."
제스와의 대화를 끝마친 아즈레엘이 몸을 안개처럼 변이시켰다. 검은 안개들은 조용히 공항 건물 내부로 퍼져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인간이 자신의 몸을 안개로 바꾸었다는 사실에 연방 보병들이 깜짝 놀라며 웅성거렸다.
"와, 방금 봤어?!"
"대, 대박이구만.."
병사들의 웅성거림을 무시하며 피터가 제스에게 안티 디몬 폭탄이 뭐냐고 물었다. 제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그의 말에 적당히 대답해주었다.
"AD 폭탄이라니? 난 그런거.."
"그.. 아직 아즈레엘님은 당신이-"
제스가 피터의 귀 가까이로 입을 대었다.
"이능력 무효화 능력자라는 걸 몰라요. 일단은 아즈레엘님께 AD 폭탄을 터트렸다고만 전했습니다."
"...?"
"인류 보안부에서 운용하는 장빈데요, 그냥 악마와 불경한 자들에게 일반적인 폭탄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물건입죠."
"그런거였군. 그런데, 난 네게 내 능력을 완전히 알려준 적이 없는데."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둘 다 똑같구만..)"
제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코리를 겹쳐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피터가 뭔가를 더 물어보려는데, 제스의 뒷편에서 코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터?!"
"?"
피터가 깨어난 것을 발견한 코리가 빠르게 달려왔다. 그의 뒤에는 하겐, 칼리브레, 팔런 등 그의 소중한 동료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얌마!! 죽은 줄 알았잖냐?! 그렇게 기절하고 정신을 못차려서.."
"하하.. 내가 죽긴 왜 죽어."
"혼자서 어디 있던거야? 진짜 죽은 줄 알았다."
칼리브레도 팔짱을 끼며 피터를 바라보았다. 하겐도 그의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설명하기는 긴데."
"괜찮아. 내가 대충 설명했으니까."
코리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얕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옥상으로 한참을 올라가야하는 계단을 가리키며 어서 올라가보라고 피터를 다그쳤다.
"됐고, 빨리 옥상으로 올라가 봐. 어서. 에리가 기다린다고?"
"응? 아니, 잠깐, 아직 제스와 할 말이 남았는데-"
"올라가서 에리와 이야기해보면 다 알게 될거야. 올라가 보라고!"
코리가 그를 계단으로 밀어올렸다. 그는 피터를 계단으로 올려보낸 뒤 제스에게 걸어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스."
"흠, 아마 제가 당신보다 계급이 훨씬 높을텐데요?"
"...제스 준위님."
코리가 마지못해 제스에게 존대했다. 그러나 제스는 하하 웃으며 괜찮다는 제스쳐를 보였다.
"하하- 그냥 제스라고 불러요. 당신 성격엔 그게 맞잖아요?"
"좋아. 잘 들어. 제스. 네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네가 말한 약속을 지켜야만 할거야. 알지?"
"..."
"제발. 부탁한다고?"
코리의 말에 제스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뜬 짧은 순간에, 그녀의 수백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뛰어난 마인드 에너지 능력이 있어 연방의 병기가 된 자들. 모든 능력자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병기가 된 강력한 능력자들은 연방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인류 보안부의 대원으로서 그런 삶을 버티지 못하고 탈주한 능력자들을 잡아들여본 그녀는, 그들의 눈에 여려있던 고독함과 슬픔을 보아왔다. 아마 피터의 최후도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동료를 사랑하는 자가, 동료와 생이별 시킨 연방의 말을 듣기나 할까.
"야?"
"...아. 약속하죠."
"좋아."
코리와 그의 동료들이 제스에게서 떨어져, 그들의 휴식처로 돌아갔다. 코리는 마지막으로 제스를 돌아볼때, 왜인지 마리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
.
.
"허어. 허억-."
공항의 옥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던 피터가 잠시 계단에 주저 앉았다.
"씨팔- 무슨 옥상 가는데만 20층을 오르래?!"
평소 받은 훈련이었다면 20층 정도는 어렵지 않았겠지만, 그는 지금 블랙 콘솔리다시온의 부작용을 겪은 사람이었다. 걷는 것 조차도 대단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그래도. 에리를 만나야 하는데-.."
그는 에리의 당돌한 얼굴을 떠올렸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수려한 외모. 언제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정말로 피터가 감사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피터는 계단에 누인 자신의 몸을 일으키며, 힘들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정수리에, 누군가가 닿기 전까지는.
"하아-."
피터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비키시죠~. 지금은 바쁘니..어?"
피터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에리가 싱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는 슬픔이 서려있었다.
"에리?!"
"안녕. 피터. 드디어 일어났네."
"안 그래도 널 찾고 있었는데! 네가 지금 상황을 잘 이해시켜줄거라면서, 코리가 날 올려보냈다고."
"..맞아. 잠깐 계단에 앉아볼래? 옥상 위에는 다른 병사들이 있어서.."
"..?"
피터와 에리가 계단 한켠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피터는 에리에게서 느껴지는 슬픈 기운을 이제 완전히 감지하고 있었다.
"...피터. 네가 더 좋은 곳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갑자기 그런걸 물어?"
"대답해줘."
"으음--."
에리의 말에 피터가 고민하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좋을 것 같아. 지금 내가 돌아온 고향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잖아? 내 가족들이 죽은지도, 살아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렇구나."
"근데 왜?"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연방의 안전한 곳으로 가게 돼. 거기서 네 능력을 더 뽐내고, 살아갈 수 있겠지."
"그거 잘됐네. 우리 모두 다 같이 안전한 곳으로 가게 되는-"
"아니."
에리가 피터의 말을 딱 잘랐다.
"너만 가는거야. 우리는 이런 전장에 계속해서 남게 되겠지."
"뭐...?"
"내 말을 잘 들어줘. 피터."
에리가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떨어질듯 말듯, 흔들거리고 있었다.
"제스와 인류 보안부 녀석들이 네 능력을 전부 알아차렸어. 그리고 그들은 너의 능력을 상부에 보고할거라고 했어.. 그렇게되면, 네 필요성을 느낀 연방은 널 데려가고 말겠지."
"..."
"그렇게되면, 넌 우리와 영원히.. 헤어지고 말거야. 연방에게 중요한 것은 '피터와 동료'가 아닌 '피터', 너니까."
"말도 안돼는 소리하지마."
에리의 말을 가만히 듣던 피터가 인상을 구겼다.
"..."
"난 너희들을 두고 가지 않을거야. 죽어서든, 살아서든."
"아니야.. 우리는 너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 혼자 안전한 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면, 내가 기뻐할 것 같아? 기뻐할 것 같냐고."
"..."
"난 가족을 잃은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너희까지 잃고, 잊어버리고..! 살아가라고? 차라리 죽으라고 말해."
"피터.."
"난 너희들을 포기하지 않을거야. 함께 있을거라고."
피터가 손을 뻗어 에리의 손을 잡았다. 에리는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 너를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네가 그랬지?"
"..."
"나는 네 보물이라고."
"...맞아."
"너도 나의 보물이란 말이야."
피터가 에리에게 입을 맞추었다. 에리도 그의 입술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녀의 볼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오랜 시간 후, 포개어졌던 입술이 떼어졌다.
"내가 말하겠어. 내가 상부에 말할거라고. 내 동료들을 데려갈 수 없다면, 난 내 이마에 방아쇠를 당기겠다고..!"
"...피터."
"고생 많았지? 미안해.."
"고마워.."
피터가 에리를 가슴속 깊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
"안돼.."
계단 아래에서 몰래 듣고 있던 마리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가 정말로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피터의 입에서 나온, 다른 여자에 대한 사랑. 마리의 손이 슬픔에 흐느끼다, 점점 분노와 증오로 바뀌어가며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허벅지에 달려있는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마리. 나의 작은 마리야."
마리의 상태를 알아챈 하후케크가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지금까지 와서 마리가 폭발해, 계획을 망친다면 그에겐 똥을 밟은거나 마찬가지였다.
하후케크는 그녀를 자신들만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순식간에 데리고 들어갔다.
"마리야, 진정하렴. 아직 때가 아니란다."
"하지만.. 하지만... 저 년을 찢어죽이고 싶어.."
"기다리렴. 에리같은 여자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언제?! 언제까지?!"
"곧. 나를 믿어주렴. 네 미래는 내가 보장할테니-"
"이야아아아악!!"
마리가 마침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글라디오를 뽑아 마구 휘둘렀다. 한참을 그러던 그녀가 씩씩거리며 검을 떨구자, 하후케크가 그녀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그는.. 그는 내건데.. 소위님은 내꺼라고..."
"그래. 네 것이란다. 아직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될거야. 약속하마. 네가 맹약의 승천자가 되는 그날, 피터는 네게 무릎을 꿇게 되겠지."
"...따르겠어. 네 말을 따르겠어. 그를 굴복시키든지, 죽여서라도 내것으로 만들고 말겠어."
마리의 실소가 조금씩 하후케크의 공간을 채웠다. 그녀의 실소는 점점 더 커지더니 커다란 광소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