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맹약의 승천자] (96/131)



〈 96화 〉[맹약의 승천자]

기다란 다이아몬드 전선의 병사들은, 참호 내부에서 연어빵을 씹거나 자신들끼리 대화를 나누며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지옥 군세들과의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들은 조용히 어두운 전장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막 충원을  로스토크 연대원들은 대부분 안전한 곳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수천대의 연방군 기갑 병기와 수십만명의 병사들이 있는 전장을 "무조건적으로" 안전하지 않다 여기는 것도 힘든 일이었겠지만.


"피터, 이곳에 있으니까 정말 포근하고 안락한데."

"...?"


"왜, 그렇지 않아? 비록 참호 안에 쳐박혀 있으니까 티스놈들을 상대했던 기억이 떠오르긴 하는데.. 그래도 그때보다는 상대도 안되는 수준의 병사들, 거기에 기갑단의 지원도 있잖아?"

코리가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에너지 음료로 입술을 적시며 껄껄거렸다. 그러나 피터는 그의 말을 차분히 듣고 전장을 한번 응시한 뒤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너무 안심하고 있지마. 이곳은 전쟁터라고? 게다가... 폭풍이 불기전에는 원래 항상 고요한 법이야."


"흐음. 피터 말도 맞지."


"그렇죠."

칼리브레가 팔짱을 끼고 피터의 말에 동의하며 끄덕거렸다. 그의 옆에는 하겐이 무언가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그의 소총을 매만지고 있었다. 제스도 칼리브레의 말을 거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주위에는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무기를 쥔 채 언제나 움직일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분위기가 갑자기 추욱 늘어지자, 코리가 헛기침을 하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험, 험. 우리 소대는 얼마나 충원됐어? 메헤테크 공항에서의 전투로 20명 넘게 전사했는데..."

"일단은 13명 정도 충원됐더군. 예전에 충원된 녀석들처럼, 경험이 별로 없는 친구들이야."

피터는 참호 한켠에 있는 충원병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충원된 병사들은 제각기 총을 붙잡고 몸을 떨거나,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듯 몇분에 한번씩 몸을 과장되게 흔들고 있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피터가 훈련병 시절 내무반의 인원들은 절반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죽은 동료들만 해도 이름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순, 루크, 루이, 플레겔, 드웬.. 그들은 이런 전장에서 죽을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행복한 길만이 있었어야 했었다.


"후--."

그가 한숨을 쉬며 참호의 벽에 기대었다. 그의 옆에서는 에리가 살짝 다가오며 피터에게 가그랑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막 배치될때의 우리 같다. 그렇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참호 한켠에서 긴장하고 있는 대원들 뒤로, 저 멀리서 전투 물자를 보급하는 공병단 병사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근데 마리는 어디있지?"

주위를 둘러보던 칼리브레가 의아한 표정으로 동료들에게 물었다. 피터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주위를 살피며,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마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

"어디갔지."

"참호 밖에 있나?"

"내가 한번 찾아볼게. 다들 쉬고 있으라고."


걱정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터가 마리를 찾기 위해 참호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오를 때, 제스는 무언가 불안함을 느낀듯 에리에게 다가왔다.

"따라가 보시죠?"


"?"

"혹시 모르잖아요. 무언가 불안합니다. 그냥... 촉이 와요."

"제스, 네가 무슨 능력자야? 그런 소리를.."


에리는 제스에게 둘러대며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도 마음 어딘가 한켠이 불안했다. 무슨 거대한 일이 터질 것 같은 기분. 당장에 움직여야  것 같은 기분. 에리의 표정을 확인한 레나가 그녀에게 조용히 걸어오며 속삭였다.

"몰래 따라가 보죠. 애초에 저희는 소위님이 가는 곳 어디든 따라가야 합니다. 거기에 에리씨, 당신이 끼어도  상관은 없겠죠."

"...알았다고."

제스의 설득에 에리가 조용히 피터를 따라 참호 밖으로 나섰다. 제스는 그녀가 참호 밖으로 나가기전, 테니를 불러 조용히 중화기 분대를 준비해두라고 일렀다.

.
.
.
.

"씨발."

참호 밖, 수송 차량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곳에서 몰래 욕설을 내뱉으며 괜한 수송 차량에 주먹질을 해대는 마리가 있었다. 그녀는 매우 분노한 상태로 몸을 부르르 떨며, 수송 차량을 연신 주먹으로 두들겨댔다.

"마리야."

[쾅-. 쾅-.]


"나의 작은 마리-"

"왜?!"


하후케크가 그녀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마음속에 속삭였다. 마리는 하후케크의 말에 괜스레 발끈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지나다니는 다른 병사들이 갸웃거리며 그녀를 쳐다보기도 했다.

"진정하렴. 지금으로부터 몇시간밖에 남지 않았단다. 네가 '맹약의 승천자'가 되고,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을 시간이."

"대체 언제까지 그런 이야기만 할거지? 내게 소위님과 이뤄지는 미래를 주겠다며? 자꾸 이런다면, 나는 그만둘-"

"쉿! 누군가 온다. 알아서 잘 대꾸하렴."


하후케그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며, 목소리가 끊겼다. 마리는 저벅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듣고는 그쪽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

"소, 소위님."

"여기 있었어? 다들 널 찾아서..."

"아, 음. 잠시 속이 좀  좋아서... 바깥 공기를 마시려.."

"그랬구나. 우린 또 무슨 일이라도 생긴줄 알고.. 걱정했거든. 그래도 밖은 위험하니 조심해."


피터는 마리의 상태를 간단히 파악한 후 참호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마리는 피터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다시 확인해야한다는 욕구가 떠올랐다. 그녀가 메헤테크 공항의 계단에서 본, 그 일은 그저 한 철의 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는 확답을 듣기 위해서.

"소위님."

피터의 손목을 붙잡은 마리가 그를 불렀다.


"으, 응?"

"있잖아요??"


"왜, 왜 그래. 그리고 존댓말 조금 부담스럽거든. 어차피 동기면서 그런-"


"아니요. 그런건 상관 없어요. 한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


마리의 입이 옴짝달싹하며, 다음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뭔데?"


"저, 저를.."

마침내 마리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녀는 잡고 있던 피터의 손목을 강하게 쥐며 한 자  자 힘겹게 떼가기 시작했다.

"저를... 사랑하나요?"

"뭐...?"

"저를 사랑하냐고 물었어요."


"저 년 뭐라는거야?!"


"쉿, 조용히 해요."

피터의 뒤를 몰래 밟아 어느 차량 뒤에 숨어있던 에리가 순간적으로 짜증을 냈다. 제스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손가락 하나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쉬잇 소리를 냈다. 다행히도 마리가 그들의 소리를 듣진 못한  같았다.

"...으음,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피터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런 질문에는 어찌 대답해야한단 말인가? 에리의 사랑 고백을 받은 것과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피터는 지금 상황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말해주세요.... 제발.."

마리는 이제 그에게 애원하듯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리의 몸이 기대와 흥분으로 떨리며, 피터의 사랑만을 응당 받아야할 것으로 요구하는 중이었다. 피터의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가기 시작했다.


"훈련병 시절, 제게 검술에 대해 알려줬던건 뭐였죠? 티스와의 전쟁 때, 감염자들에게 둘러싸인 저를 구하러 온 이유는 뭐였죠? 궤도 기지에서 주둔할 때, 저와 같이 광장에 가줬던 이유는 뭐였어요...?"

이제 마리는 피터의 단 한가지 대답만을 원하고 있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라는 답변을 그렇게도 원하는 것이었다. 마리의 맑은 눈이 부르르 떨리며, 피터를 그윽히 보았다.


피터는 그의 머리를 최대한 굴려, 마리가 만족하고, 에리도 배신하지 않을 만한 답을 생각해냈다.

"나, 나는. 음. 너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아마 자신의 말에 상처입을 가련한 여성을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에리의 존재를 떠올리고 강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동료로서 사랑하는거지. 절대 애인이 되거나, 이런 류는 아니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

피터의 진심 어린 말에,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양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 마리?"


"...그렇군요. 그런거였어요."


"??"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를 사랑하게 만들면 돼."


"마리?"


그의 손목을 쥐고 있는 마리의 손아귀에서, 여자라곤 믿기지 않을 수준의 악력이 뿜어져나왔다. 피터는 그것에 고통스러워하며 마리의 손목을 붙잡아 떼내어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마리. 그만두려무나."

마리를 진정시키고 있는 것은 하후케크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계획을 세워놓은 하후케크라는 악마는, 지금 마리가 저지르려는 일을 단단히 뜯어말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하후케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그 소리를 무시하며 약속한 것을 내놓으라고 외쳤다.


"하후케크-! 약속한 미래를 내놔. 어서!!!!  '맹약의 승천자'로 만들어줘! 당장!!"

"...마리."


"어서-!!"

마리의 간곡하고도 광기 넘치는 외침에, *포데스타는 마침내 그녀에게 굴복했다. 원래 그의 계획대로라면 몇시간 후에 아드라말레크의 습격과 함께 마리의 승천이 이루어져야 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포데스타: 대악마.)

하후케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불경한 주문을 외우며, 마리에게 자신이 약속한 '승천'을 내리기 시작했다.


"Маленькая птица, примите обещание великих перемен. Если это получится, у вас будет всё..."
(작은새야, 위대한 변화를 받아들이거라. 그렇게되면 모든 것을 얻을지니...)


하후케크의 불경한 중얼거림이 끝난 그 순간, 마리가 고통스러운 듯이 상체를 하늘로 쳐들고 몸을 떨었다. 그녀의 찰랑거리는  흑발들이 휘날리며 불길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마리의 등과 그녀의 전투복이 조금씩 찢어지며, 자주색의 날개 두쌍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날개들에서 핏방울들이 떨어지며 피터의 볼을 가볍게 적셨다. 마리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던 흑발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더욱 육감적으로 변하며 보는 이가 모두 매혹에 빠져 사랑을 속삭이고 싶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그녀의 전투복이 주인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찰랑거리는 긴 흑발들은 변화가 가속되며 산발처럼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그녀의 흑발이 변화를 완료했을 때는, 빛 날 정도로 아름답지만 만지면 베일 정도로 날카로운 머리카락들이 되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이마에서도 뿔 두쌍이 자라났다. 자주색의 두 뿔은 상당히 부드럽고도, 날카로워 보였다. 마리의 혀조차도 요사스럽게 변이되며 평소보다 몇배는 가늘고, 몇배는 기다란 혀로 변이되었다. 자주색의 불경한 혀가 날름거리며, 피터를 향해 추파를 던졌다.

마지막으로, 마리의 볼에 지옥 군세들의 문양이 새겨졌다. 이것은 마리가 다시는, 찬란했던 인간의 시절로 되돌아올 수 없음을 못박는 표식이었다. 그에 맞춰, 피터를 여기서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알려주는 표식이기도 했다.

"이제... 당신은 내거야."


마리가 그녀의 인간 시절의 얼굴을 한 채 피터를 향해 다가가는 그 순간에도, 그는 변해버린 마리의 모습을 보며 굳어있었다. 그가 그렇게 소중히 여겨왔던 동료가 자신을 향한 욕망으로 변이한 모습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었다.

"움직여!"

그러나 에리, 제스와 그녀의 분대원들은 즉각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 에리는 자신의 몸을 던지듯 달리며 그녀의 글라디오를 뽑아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피터의 손목을 단단히 옥죄고 있는 마리의 손목을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이제는 인간의 색이 아닌, 자주색의 피분수가 마리의 손목에서 튀어올랐다.

"갸아아아-!"

이제는 악마가 되어버린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잘린 팔을 흔들었다. 에리는 아직도 멍해 있는 피터를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밀치며, 검을 제대로 잡았다.


상처를 재생시키며, 마리는 자신 앞에 있는 자가 누군지 똑똑히 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년. 자신의 모든 것이자, 자신의 진실된 사랑을 빼앗아간 년. 마리는 증오로 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에--리!!!!!"

"...너. 악마 주제에 인간인 척, 이쪽으로 숨어들었던거냐?"

"내가? 내가 인간인 척을?! 흐하하.."


마리가 에리를 비웃듯 웃어댔다. 그녀는 이윽고 에리를 똑바로 노려보며 에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년 때문에, 나는 계약을 했어. 네년이.. 네년이 내 모든 걸 가져갔어! 알기나 해?!"


"뭐?"


"네년이... 피터 소위를 가져갔어. 내게서!!"


"참나."


이번엔 에리가 마리를 비웃듯이 웃었다.


"내가 언제 피터를 가져갔지?"

"..?"


"피터는 나를 선택한거야. 그리고, 내가 피터를 쟁취해낸거고."

"닥쳐.."


"너같이 열등감있는 년에게 피터를 넘길수야 없지. 피터는 '내 거' 니까.


"닥치라고--!!!"

마리가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제스가 에리를 밀치며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뭐야?!"


"중화기 분대! 사격!!"


제스는 에리와 함께 흙바닥을 구른  마리를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그녀의 지시에 맞춰 숨어있던 테니와 그의 중화기 분대가 화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악마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성탄이 마리의 몸에 파고들며 관통했다. 마리는 자신의 육신이 점점 나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죽음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돼! 이렇게, 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이렇게, 이렇게.."


마리가 죽어가며, 피터를 쳐다보았다. 피터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리는 울고 있었다. 피터는 그녀의 맑은 눈이, 빛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피...터...소..위..님."

마지막 단말마를 힘겹게 내뱉는 마리에게, 중화기 분대의 대원  하나가 유탄 발사기를 겨누었다. 곧이어 유탄 발사기에서 유탄이 불꽃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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