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7화 〉[퍼플 윙] (97/131)



〈 97화 〉[퍼플 윙]

"소...위..피..터..씨.."

마리의 육신이 죽어가며 흐느적 거렸다. 그녀는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가득하지만, 비단결 같이 고운 피부를 지닌 손을 피터에게로 내밀었다. 피터는 그녀가 가진 초월적인 매혹 능력에 순간 현혹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사내가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리자, 마리의 가슴은 수천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남은 손은, 피터 옆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는 에리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총소리를 듣고 몰려든 병사들이 입을 떡 벌린채 마리와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제스. 부탁할게요."


에리는 비틀거리는 피터를 부축한 채, 공손한 어투로 제스에게 말을 건넨  참호 안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제스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뒤, 중화기 분대에게 끝내버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제스의 명령을 받은 중화기 분대원들이 마리의 죽어가는 육신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런 그들을 분노에 가득찬 눈으로 올려다보았고, 중화기 분대의 총구에서 불이 다시금 뿜어져 나올때도 증오의 눈길은 사그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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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무슨 일이야?!"

칼리브레와 코리가 피터를 부축하는 에리에게 달려오며 물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밖에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병사들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에리는 벽에 피터를 기대어 앉힌 뒤, 한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검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쳐들었다.


"글라디오에 묻은 이 자주색 피. 보이지?"


"뭔갈 베었군."

칼리브레가 재빨리 그녀의 검에 묻은 체액을 보며 간파했다.

"그래. 마리가 우리를 배신하고, 악마들에게 투신했어."


"뭐?!"

에리의 충격적인 발언에, 코리가 믿을 수 없다는듯이 언성을 높였다.

"내,  탓이야.. 내가.. 마리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버렸어."

피터는 마리에게 딱 잘라 말한 자신을 자책하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마리를 생각해주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피터. 마리는 너를 빼앗고, 타락시키려고 들었어. 네가 한 행동은 잘한 행동이야. 아쉬운 점은.. 그년의 머리를 못 베어버렸다는 거지."

에리가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를 다독였다. 피터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나지막히 신음했다. 코리는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가지 않는지, 에리에게 정확한 대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야,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녀석이 왜?! 그리고 악마에게 투신했다니, 제대로 이해가게 말해달라고?!"


"그 년이 어떻게 악마놈들과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의 적이었던 건 확실해. 이제는 죽어버려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됐긴 해도."

"...죽었다고?"


하겐이 에리에게 조심히 물었다. 에리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 년은 악마처럼 몸이 뒤틀리더니, 피터를 어디론가 납치해가려고 했어. 제스와 내가 빨리 움직여서 망정이지.  따라갔으면 큰일 났었을거야. 다행히 제스쪽에서 마리를 처리해버리긴 했-"

"아뇨."


"??"


제스가 참호의 문을 열고 걸어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총구에서 김을 모락모락 뿜어대는 중화기 분대가 서 있었다.

"무슨 뜻이지."

아까보다 보는 눈이 적어지자, 에리가 제스에게 반말을 하며 캐물었다.

"말 그대롭니다. 마리, 그 악마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


제스의 말에 피터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제스는 그런 피터를 흘긋 쳐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마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포데스타급의 악마가 그녀를 죽기 직전 빼낸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고 물었잖아. 제스. 포데스타는  뭐고?"


에리가 답답하다는 제스쳐와 함께 제스를 돌아보았다. 제스는 그런 그녀에게 눈썹 하나를 치켜올리며 대답해주었다.


"포데스타는 지옥의 대악마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보다 상관입니다. 조금은 예의를 갖추세요."

"...알겠습니다. 제스 준위."

"아무튼. 저희 중화기 분대가 마리를 끝장내기 위해 죽어가는 그녀의 머리에 대고 집중사격을 가했지만, 한바탕 화력을 쏟고나니 그녀의 시신이 점점 땅속으로 사라지고 있더군요. 보통 악마들은 현실 세계에서 죽으면 재가 되어 사라지는데 말이죠."

"그, 그렇다는건 뭐야?"


코리가 긴장하며, 제스에게 다음 답을 요구했다.


"아마도 그녀를 '승천' 시켜  포데스타가 있었겠죠. 그리고  놈은 마리가 지금 당장 죽는걸 원하지 않았을거고요."

"...거 참 좆같이 일이 꼬였군."

기계 의수를 까딱거리던 칼리브레가 시니컬하게 한마디 뱉었다.

"그리고 마리가 땅으로 사라지던 그 마지막에는, 자주색 피로  악마들의 글자가 남더군요. 제 대원들에게 해석을 시켰습니다만.. 아마 이 해석된 글귀가 마리의 새로운 이름일겁니다."

"정말이야? 마리가 살아있다는 것도, 악마가 되어서도 죽지 않았다는 것도?"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 마리의 새로운 이름은, 이제 '퍼플 윙'입니다."


"어느 놈이 지어준 이름인지는 몰라도, 존나게 센스없고 멋 안나는 이름이네."


"퍼플...윙.."


피터는 마리의 새로운 이름을 되새기며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기를 빌었다.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그녀를 죽여야만 할 수도 있었으니까. 마리가 비록 추악하고 불경스러운 악마로 전락해버렸다고 해도 피터는 한때 동료였던 그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침묵을 유지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참호 내부의 문이 하나 열렸다. 그 문은 지하로 통하는 문이었는데, 내부는 수백명이 휴식을 취하거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다이아몬드 전선을 이루고 있는 참호들에는 그런 휴식처가 수백 곳이 존재하고 있었다.

[쿵. 쿵.]


묵직한 발걸음과 함께, 노란색 갑주를 걸친 벨라토르 3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헬멧을 벗고 있었기에, 누가 누군지 파악하기 매우 쉬웠다.  명은 이전에 중상을 입었던 라미엘이요, 두명은 그를 간호하고 있던 키아나와 테리우스였다.

라미엘은 참호 내부를 둘러보다 피터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제스가 그에게 경례를 건넸고, 피터와 다른 동료들도 라미엘에게 경례를 건네었다. 벨라토르들은 그런 그들에게 똑같이 연방의 경례로 화답했으나, 이상하게도 피터의 마음속 깊이 담긴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봅니다."


테리우스가 조용히 라미엘에게 귓속말했다.

"...그런가보군. 아까 총성이 엄청 들리긴 했지."

"...물어볼까요? 중대장님?"

키아나도 조심스럽게 라미엘에게 귀띔했다. 그러나 라미엘은 괜찮다는 듯이 손을 흔들고는 제스에게로 다가갔다.

"제스."

"라미엘씨. 치료가 끝났나보군요. 테리우스씨도 괜찮나요?"

"나야 뭐... 어느정도 치료를  진행해야하긴 한다네. 판이  배와 가슴에 상처를 많이 입혔거든. 테리우스는 워낙 튼튼하고, 활기바른 녀석이라 지금은 괜찮다네."

"그렇군요."


"흐음. 이런 말을 하려고 자네에게 온 것은 아니네만. 준위. 무슨 일이 있었지?"

"...피터 소위님의 소대원 중 하나가 타락자였습니다."

"타락자?"


라미엘을 비롯한 벨라토르들이 타락자라는 말에 동시에 반응했다.


"네."


"하지만 단순히 타락자라면.. 이렇게까지 총성이 크게 들릴리가 없잖은가."

"그렇죠.  타락자는 어느 포데스타에게 사주를 받은지 몰라도, 악마로 승천했습니다. *성탄으로 무장하고 있는 중화기 분대를 데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성스러운 탄환. 연방의 영웅이나 위대한 성인의 뼛조각을 조금씩 갈아넣어 만든다.)

"인간이 악마로 승천했다라. 완전히 악마가 되어버렸는가?"

"예. 퍼플 윙이라는 악마가 되어버렸는데,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숨통을 끊기 직전에 퍼플 윙을 누군가가 강제로 송환시켜버렸습니다."

"...또 다른 놈이 개입했나보구먼."

라미엘이 주먹을 꽈득 쥐었다.


"아무튼 알겠네. 그런 상황이니, 조금 더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겠군. 살아남은 내 중대원은 현재 64명밖에 되지 않지만, 소위를 위해 나를 비롯해 30명을 배치하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어떻게  생각이시죠?"


"나머지는, 이쪽의 테리우스와 키아나가 지휘할걸세. 이 다이아몬드 전선에는 다른 벨라토르 중대도 있다고 하지만, 그들도 많이 힘이 빠졌을테니 그들을 도와야지."

"그렇군요. 맞다, 아즈레엘님이 단독 행동에 들어가셨습니다."


"음?"

"...아직까지도 이곳에 도착하지 못한 2만 5천명의 행방을 찾으러 가셨습니다. 곧 돌아온다고는 했는데, 불안하군요."

"걱정하지말게. 그는 지금 이 행성에서 가장 강한 자일테니까."

라미엘이 참호 바깥의 전장을 바라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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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만든 공예품들과, 잘려나간 해골, 시신과 장기로 만든 조형물이 가득한 바위산.  바위산에서는 아드라말레크가 어느 거대한 소환진 앞에서 무언갈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소환진이 보라색으로 타오르며, 형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소환진이 밝게 타오르고 나자 육감적이고 가녀린, 매혹적인 흑발을 가진 나체의 여자가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커--헉!"


소환진 가운데에서 숨을 뱉으며 피를 토한 마리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 앞에는 강대한 지옥 군세의 돌격 대장, 아드라말렉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수천명을 학살할  있는 나이트 크롤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쥐고 그녀를 하찮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 여기는.. 어디지? 나는.. 죽지 않은거야..?"

"그렇다. 악마여."


"..."

"너는 이제 지옥 군세의 일원이며, 강대한 악의 전사가 되었다. 너는 이제 우리와 함께, 다이아몬드 전선을 돌파해야하는 미래를 지녔다. 알겠나?"

"...아니."


"....뭐라."

"내 목적은 누군가를 죽이고, 학살하는게 아니야."

마리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흑발이 찰랑거리며 그녀의 피부를 매만졌다.

"내 목적은 단 하나.... 피터를 내것으로 만드는 것. 그렇게하기 위해 나는 너희들에게 내 모든걸 주었어."

마리의 눈이 자주색으로 빛나며, 아드라말렉을 쏘아보았다. 아드라말렉은 마리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욕망과 끝이 없는 질투를 보며,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하후케크가 재밌는년을 데려왔군."

"난 더이상 하후케크의 말을 따르지 않아. 이젠 피터를 갖기 위해 모든 짓을 하겠어. 너가 내 앞을 막을거면..."


"흥."


아드라말렉이 그녀를 비웃으며 그녀의 나체를 가리켰다.

"아무거나 걸치고 말하라. 그리고 네가 비록 우리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도,  주제를 망각하는건 허락치 않겠다."


"...난 그런 대답을 원치 않았는데. 내 앞을 막을거냐고."


마리가 그녀의 몸에서 보라색 비늘들을 솟아오르게 만들며, 아름다운 곡선의 매력을 지닌 갑주를 만들어냈다. 갑주가 보라색으로 반짝하며 빛나자 악마들이 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흐하하하하하하하-!"


"...?"

"하하하하.... 좋다. 좋아. 우리 중 그 누구도 네년의 앞을 막지 않는다. 네년이  일은, 피터를 이리로 데려와 네것으로 만들어 타락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너와 그에게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피터를 네것으로 만들게 된다면 말야."


"...흐. 흐흐흐.. 흐흐흐흐흐-."

"즐겁나? 응? 네년은 이제 인간 시절의 이름을 버리게 될 것이다. 네년의 새로운 이름은 하후케크가 속삭여주었겠지. 뭔지 알겠나?"


아드라말렉이 그의 도끼를 붕붕 돌리며 마리에게 물었다. 마리는 자신이 이곳으로 소환되기 직전, 하후케크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빠져나가며 속삭이던 이름을 떠올렸다. 그녀의 등에서 솟아난 보라색의 날개들을 의미하는 이름. 영원한 보라색의 날개 아래 모든 것들을 타락시키라는 이름.

"...퍼플.. 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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