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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화 〉[고요함] (98/131)



〈 98화 〉[고요함]

"그럼, 저희는 계속해서 피터 소위님을 호위하고 있겠습니다. 당신들도 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피터를 제외한 그의 동료들이 참호 한켠에서 제스와 이야기를 끝냈다. 에리가 코리와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대화를 시작하려는데, 뒷편에서 제스와 어느 병사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위님, 아즈레엘님의 전언입니다."


"뭔데?"

"...이쪽으로 도착하기로 했던 2만 5천명분의 연방 보병단과 기갑단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뭐..?"

제스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그리고,  중요한 것도 있다는데요."


"오, 제발."


이마에 손을 짚은 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으로 들을 내용은 듣지 않아도 이미 예상이 가고 있었다.


"지옥 군세놈들에게 당했다는건 아니겠지."

"...맞는 것 같습니다."

"후."

"거기에, 아즈레엘님께선 몇몇 장비와 시체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절반 정도가 타락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남겼습니다."


"...씨발."


마침내 부드러운 제스의 입에서 욕설이 툭 튀어나왔다. 2만 5천명 중에서 절반만 하더라도 1만명이 넘는다. 그 인원에서 3분의 1이 기갑단이라고 쳐도, 3000명분의 기갑 화력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이 전선이 큰 타격을 입을  있는 위력이었으니까.

"그래서 아즈레엘님은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셨지?"


"곧 돌아오실겁니다. 조사를 조금 더 해봐야겠다고 하셨거든요."

"...알겠어. 가서 라미엘씨에게 알리고, 다이아몬드 전선의 사령관에게도 알려줘. 인류 보안부 소속이라고 밝히면 수긍할거다."

"알겠습니다. 수호."

제스에게 보고를 마친 검은 안개 연대원이 급히 달려나갔다. 에리는 그가 자신 옆을 지나가자마자 재빨리 뒤돌아 제스에게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지금 하신 말씀, 진짭니까? 진짜예요?"

"마,맞아. 제스. 무슨 일이냐고! 후속 부대가 전부-"


에리를 거들며, 코리도 다급한 얼굴로 그녀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제스는 코리의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쉬잇 소리르 내었다.


"쉬잇. 모두 듣겠습니다."

"...칫."


"아, 알았어요. 제스. 그럼 진짜 우리가 들은게 맞는 겁니까?"

"그래요. 아즈레엘님은 허투른 판단을  사람이 아닙니다. 육체도 벨라토르들을 뛰어넘었지만, 지능이나 판단력도 연방의 최고급 인공지능과 맞먹는다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하죠?"

"일단  대원들이 이 다이아몬드 전선 상부에 알리겠지만, 여러분들도 몸 조심해야할겁니다. 놈들이 기갑 화력으로 여길 두들겨대면, 힘들어질겁니다."

"..하지만 이곳은 악마들의 공격을 수십번도 견뎌낸 곳이라고 했잖아. 그전에도 충분히 놈들의 기갑 공격을 견뎌냈을 거라고?"

코리가 제스의 손가락을 입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제스는 안타깝다는듯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견디기야 했겠죠. 하지만  전선이 오늘 엄청난 타격을 입을지, 심지어 무너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에게 왔어야할 후속 연대중 기갑단이 가지고 있는 병기가 있단 말입니다. *포미더블급 돌격 전차 4대를 후속 연대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전차들의 행방을 아직 모르고 있으니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구요."
(*포미더블급: 돌격 전차 종류중 가장 위협적이고 거대한 전차. 일반적인 돌격 전차 스무대와 교전해도 거뜬히 이겨낸다.)

"...좋지 않은데."

에리가 침을 삼키며 참호 한켠에서 아직도 절망하고 있는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힘없이 에리를 올려다 보았다. 에리도 그런 그에게 힘겹게 미소지어주며 그를 살짝 달랬다.


"어떻게 해야하지? 제스. 그럼 어떻게 해야해?!"


"코리씨, 진정하세요. 라미엘씨의 중대와 저희가 소위님을 최우선으로 보호할거니까요. 저희들에게 소위님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미래 예지 능력자를 허투로 잃을 수는 없죠."

"..."

제스의 말을 들은 코리가 한숨을 내쉬며 뒤돌았다. 그는 어둑어둑한 전장을 한번 쳐다보고는 저멀리 보급품을 배급받는 자신의 동료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선의 공병단 병사들이 커다란 박스를 든 워크 비들과 함께하며 보병들에게 물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여기 탄약과 레이져팩."


"...?"


칼리브레와 하겐은 자신에게 물자를 건네는 여성의 얼굴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1년 전 티스놈들의 감염 군주 사살 작전 도중 전사한 루이와 매우 비슷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받으라니까?"

"어, 어."

공병단 병사에게서 SK-2 소총의 탄환과 소총 하단부에 달리는 레이져 응축기의 탄환인 레이져팩을 건네받은 칼리브레가 자신의 매니셉 방탄복 주머니에 그것들을 말을 절었다.


"...나는 h-23 유탄."


하겐도 루이와 닮은 그녀를 보고 루이의 생각이 났는지, 약간 침울해진 얼굴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유탄병이야?"

"응."


공병단 병사에게 손을 뻗은 하겐이 자신의 방탄복 주머니를 열어보이며, 그 안에 들어있는 유탄을 보여주었다.

"잠깐 기다려봐."


병사는 워크 비가 들고 있는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짧은 권총 한 정과 탄창 3개를 내밀었다. 그것은 연방 지휘관들이 사용하는 권총들 보다 훨씬 짧고 휴대성이 있는 권총이었다.


"이건 뭐지?"

"응, 유탄병들에게는 산탄총이 지급되긴 하지만, 적이 근접한 상태에서는 산탄총으로 손쉽게 교체하기 어렵다는 병사들의 불만이 있어서 상부가 장비를 하나 더 추가했어."


그 병사는 상자를 다시 뒤적거리더니 하겐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 권총을 꺼냈다.


"그래서 손쉽게 꺼낼 수 있고, 빠르게 대처 가능한 p-70 권총을 지급하라고 하더라고. 탄환이 작아서 그런지 저지력은 낮아도, 관통에만 치중되어 있다던데. 뭐, 그래도 없는것 보다야 낫겠지."


"...그런가. 어쨌든 고마워. 나중에 엄청 쓸일이 있겠네."


하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권총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다른 병사들에게도 물자 배급을 해줘야하거든. 가보도록 하지."


병사는 짧게 인사하고 다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5마리의 워크 비가 커다란 물자 상자를 들고 뒤따랐다.

"정말 똑같이 생겼잖아..."

칼리브레가 멍하니 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겐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루이 생각이 떠올라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후우. 그러게. 갑자기 머리가 더럽게 아파오네."

"미안.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나."


"아냐. 괜찮아. 잠시 지하 의무실에 가서 두통약이라도 받아올테니, 다른 녀석들한텐 그렇게 전해줘."


"응."

칼리브레에게 간단히 인사한 하겐이 참호의 두꺼운 벽에 달린 자동문에 가까이 다가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칼리브레는 하겐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실수를 했나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지하의 의무실로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지며 들리지 않게된 순간, 칼리브레의 뒷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
.
.
.


"...흐음."

아즈레엘이 장갑이 찢겨져나간 돌격 전차의 표면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그의 앞에 놓여져 있는 전차는 엄청난 힘에 쥐어뜯긴 듯, 내부 승무원들의 시신을 주위에 쏟아놓은 포미더블급의 돌격 전차였다.


다른 포미더블급 전차는 완전히 뒤집어진 채, 전차의 무한 궤도 부분이 고장나 탈탈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상하군."

분명히 포미더블급의 돌격 전차 4대가 출발했을 것이었다. 그것은 메헤테크 공항에서 출발하기전 아즈레엘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던 것이었다.

"나머지 2대는... 대체 어디로 간거지."


아즈레엘은 마찬가지로 장갑이 찢겨져나간 수송 차량들 주위에 널부러진 연방 보병들의 시신을 보았다. 그가 엎어져 죽어있는 한 병사의 시신을 뒤집자, 죽은 병사의 얼굴이 무엇을 봤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강한 공포로 일그러진 그 눈가와 표정은, 지옥 군세의 것이 틀림 없었다. '고작' 외계종 따위의 공격으로는 이런 원초적인 공포에서 나오는 얼굴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으니까.


죽은 병사의 눈꺼풀을 감겨준 아즈레엘은 조용히 일어서며 자신의 오른손을 옆으로 느릿하게 뻗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검은 안개가 모여들며, 기다란 낫을 만들어냈다.

"숨어있지 말고 나와라."

아즈레엘이 느릿하게 뒤돌며 파괴된 수송 차량들과 돌격 전차들의 잔해를 노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뒤에 숨어있던 불경한 자들이 모습을 서서히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시 연방의 보안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행동팀답군..."

팔이 4개인 나이트 크로울러가 혀를 낼름거리며 아즈레엘을 쳐다보았다. 아즈레엘은 아무  없이 그의 낫을 놈에게로 겨눈  낫을 고쳐잡았다. 그러자 나이트 크로울러 주위에 있던 수십명의 타락자와 하위 악마들이 으르렁 거리며 자신의 주인을 향한 도발에 분노했다.


"흥. 네놈들은 시간 끌어주기밖에 안될 것 같군."


"...인간 주제. 전사들이여-! 저 미천한 자식을 지옥 끝까지 끄집어내려버려라!"

"크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자신의 주인이 내린 명령에, 한때 연방의 충직한 병사들이었던 타락자들과 지옥의 하급 악마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아즈레엘의 목을 베는 영광을 취하기 위해 그에게로 앞다투어 달려들고 있었다.

"..."


아즈레엘은 그저 조용하고 차분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움직였을 때, 수십의 지옥 군세가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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