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인간과 친해지고 싶은 악마]
"헉, 헉, 젠장, 실렌티온!"
실렌티온을 안아든 채 브로취른 전선 내부를 달리고 있는 하겐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댔다. 실렌티온은 그런 그의 부름에 힘겹게 손가락 하나를 올려 하겐의 볼에 스윽 문질러줄 뿐이었다. 실렌티온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딱봐도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이러는거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괴로운듯이 숨을 고르는 실렌티온을 내려다보며 하겐이 걱정스레 혼잣말을 했다. 그의 앞에 어느 악마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봐, 인간. 잠깐 멈추시지."
"뭐?"
다른 나이트 크롤러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나이트 크롤러가 하겐의 바쁜 발을 멈춰세웠다. 얼마나 덩치가 작았는지, 일반적인 나이트 크롤러들은 하겐같은 일반인이 올려다봐야 했지만 이 녀석은 하겐과 거의 키가 비슷했다. 심지어는 그보다 살짝 작아보이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난 지금 바쁘단 말이다. 어서 아드라말렉을 만나야-"
"음, 음, 아니. 네가 안고 있는 년, 뭐하는 년이지? 꽤나 이쁜걸."
"...뭐?"
"아~ 별거 아니면 좀 보게 해줄래? 어디 아픈가보지? 그럼 내가 좀 도와줄 수 있겠는데~"
"손 대지마."
"?"
"손. 대지말라고."
하겐이 나이트 크롤러를 향해 경계를 곤두세웠다. 하겐의 경계를 받은 나이트 크롤러는 악마답지 않게 상당히 당황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자만스럽고, 폭력적이며, 추악한 악마들과는 색다른 모습이었다.
"이, 이봐. 진정하라고. 네가 들고 있는 년을 해치려는건 아니었어. 잠깐 봐주려고..."
"이 녀석은 '년'이 아니야. 실렌티온이지. 네놈이 내게 뭘 원하는건지는 몰라도, 지금 나는 아주. 아~주 바쁘다고. 비켜라."
"잠깐, 아드라말렉님을 만나러가는거야?"
"...그래. 놈이 실렌티온의 상태를 알려줄 수 있을거야. 그놈들이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정도는 나도 알려줄 수 있는데?"
"...?"
"이봐. 내가 봐준다고 했잖아. 이상하게 오해하지 말라고. 악마들이라고 전부 폭력, 살인, 섹스, 뭐.. 이딴걸 좋아하는줄 아나본데."
"전부 그렇지 않나?"
"..그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아무튼, 그년, 아니... 실렌티온을 이리 줘봐."
나이트 크롤러가 하겐을 향해 양손을 벌렸다. 하겐은 악마를 매우 의심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으나, 실렌티온의 상태를 봐준다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빨리 줘봐. 진짜 이상한짓 안 한다고! 내 이름, 타하리알을 걸고 맹세하지."
"후우.."
하겐이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실렌티온을 타하리알에게 건넸다. 놈은 실렌티온을 받아들자마자 이리저리 살피더니, 우악스러운 손을 그대로 움직여 가슴팍의 가운을 뜯어냈다. 하겐은 그 모습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으며, 분노가 가득 담긴 외침을 뿜어냈다.
"뭐하는 짓이야!"
"음, 음, 음~."
그러나 타하리알은 한 손은 턱에, 한 손은 실렌티온을 뒤적거리며 음음 거리는 소리만을 낼뿐이었다. 격분한 하겐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그는 잠시 멈추라는듯 손바닥을 그에게 펼쳐보이며 말했다.
"뭔지 알겠다."
"알겠다고?!"
"이리 가까이 와 봐."
타하리알이 하겐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하겐이 그의 손짓을 따라 눕혀진 실렌티온 가까이 오자, 타하리알이 손가락으로 실렌티온의 가슴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보이지? 지옥 군세의 문양. 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아무튼. 이게 심장을 옥죄고 있어. 이 문양은 그저 문신으로 새겨진게 아니라 이 여자의 무언가를 옥죄는 역할을 해놓은 거지. 하지만 이 여자의 몸속에 있는 무언가가 이 문양을 뚫고 나오려 하고 있어. 문양은 그걸 막고 있는거지. 그래서 실렌티온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거야."
"...사실이야?"
"어... 반쯤은 사실이지. 대체 뭐가 이 여자의 몸속에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서 반쯤 사실이라고 한거야. 봐, 심장 부근에서 붉은 빛이 나오면..."
실렌티온의 심장 부근에서 붉은 빛이 솟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문양이 내뿜는 보라색 빛에 잠식되며 옅어져 버렸다.
"문양이 막아버리지?"
"그렇군. 제거할 방법은.. 없는거냐?"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음.."
"없는거군. 그럼 난 아드라말렉을 만나러 가야겠다. 무슨 일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말야."
"아니! 방법은 있어. 내가 제거할 수 있지."
"...그럼 왜 그리 안된다는것처럼 굴은거지?"
"어, 그야 이렇게 말하면 뭔가 비장해보이지 않아? '마지막 방법을 써야겠다..' 이러는 인간 영웅처럼 말야."
"..."
"왜?"
하겐이 타하리알을 한심하게 내려다 보았다. 코리가 평소에 한심한 짓을 해오면, 그가 그런 눈으로 쳐다 보았었다.
"너 악마 맞냐..?"
"맞긴한데. 인간이 좋아서... 요한 태석 전설도 읽어봤다고!"
"...."
"뭐해? 내 아지트로 가자고. 실렌티온을 치료해줄테니까."
"...알겠어."
.
.
.
.
"자. 여기가 내 아지트야. 꽤나 깨끗하지?"
"..오."
지하에 있는 타하리알의 아지트로 들어온 하겐은 상당히 놀랐다. 악마들의 불경한 문양들도, 인간으로 만든 예술품이나 해골로 장식된 장식품들도, 심지어 혈흔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아름다운 연방의 도자기 예술품이나 신화속 인물들이 그려진 명화가 존재할 뿐이었다.
"헤헤. 내 아지트를 다른 녀석들에게 보여주면, 놈들이 막 어지럽히고 깨부수고 그래서 말이야... 사실상 제대로 보여준건 너희가 두번째네."
"...두번째?"
"뭐, 그렇고 그런게 있어. 서론은 여기까지 하고 실렌티온을 치료해 보자구. 어, 네 이름은.."
타하리알이 하겐의 방탄복 가슴팍에 있는 이름표를 슬쩍 보았다. 금속으로 된 이름표가가 반짝이며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하겐? 거기 있는 침대좀 이리로 가져와 줄래?"
"...그래."
바닥에 바퀴가 달린 커다란 침대를 하겐이 질질 끌고 왔다. 타하리알은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실렌티온을 살포시 그 침대 위에 내려놓았고, 커다란 고글을 테이블에서 집어들어 턱하니 눌러썼다. 그가 개조한 것인지 참으로 커다란 고글이었다.
"하겐, 너도 이리 와서 날 좀 도와줘. 그 테이블에 널린 기기들 있지?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하나 건네주면 돼. 쉽지?"
"알았어."
타하리알이 천장에서 테이블을 내리쬐고 있는 전등을 향해 손을 뻗어, 실렌티온이 놓인 침대쪽으로 돌렸다. 그는 하겐에게 젓가락처럼 생겨 끝에 구멍이 뚫린 기기와 무언가를 긁어낼때 쓰는 긁개를 달라고 말했다.
"좋아. 이제 하는거 잘봐."
타하리알은 젓가락처럼 생긴 도구를 먼저 실렌티온의 가슴팍에 그려진 지옥의 군세 문양으로 가져갔다. 기다란 젓가락처럼 생긴 도구 끝에서 약한 불이 퐁 하고 뿜어져 나오더니, 그대로 실렌티온의 문양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이, 이봐. 타하리알. 그렇게 불을 몸에 가져다 대도 괜찮은거냐?"
"아, 말을 안 했나."
타하리알이 잠시 그의 고글을 벗어 올리고는 하겐을 쳐다보았다.
"이런 문양들은 피부에 새긴 문신인 경우도 많지만, 그저 피부에 강력하게 달라붙어있는 것인 경우도 많거든. 실렌티온의 경우도 지금 그런 경우이고. 그래서 이걸 슬슬 불태워버려서 긁어내려는거야. 조~금 아프겠지만.. 그래도 살갗을 뒤집어 떼어내 버리는것보다야 낫겠지."
"흐음.."
하겐이 아직도 미심쩍다는 눈길로 타하리알을 바라보았다. 타하리알은 실렌티온의 문양을 떼어내는데 열중하며, 그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겐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타하리알의 방을 주욱 훑어보았다.
엄지를 척 세운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 고대 인류중 모두를 위해 기꺼이 움직였다는 자인 요한 태석의 그림들, 심지어는 연방군 홍보 포스터마저 방에 걸려 있었다. 하겐은 이 악마가 참으로 인간이란 생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봐. 타하리알?"
"응? 왜?"
타하리알이 계속해서 실렌티온의 문양에서 눈을 고정한 채 하겐에게 대답했다.
"넌 왜 나와 실렌티온을 돕는거지? 넌 인간을 죽이고, 정복하려는 악마들이잖아."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니 좀 당황스러운걸."
"대답하기 어렵다면 넘겨버려도 돼. 미안하군."
"아냐. 뭐 궁금하다면 대답해줘야지. 그전에 네 옆에 있는 새로운 긁개 좀 줄래? 이건 완전 못써먹겠네."
하겐에게 새로운 긁개를 받아든 타하리알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황량한 붉은 지옥에서 막 눈을 떴을때부터 인간이라는게 궁금했어. 처음에는 궁금하기만 했기에, 말하면 조금 그렇겠지만 사람을 죽여서 해부해보기도.. 했지."
"...끔찍한데."
"지금은 전혀 안 그러니 걱정마. 내가 죽인 이들에게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고. 아무튼, 내가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니까,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좋아지더라구. 가끔 정복 전쟁에 나가면 내 동료들이 인간들을 흽쓸고 전부 죽여버리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몰래몰래 인간들을 도망가게 놔주기도 했지."
"그랬다고?"
"엉. 가끔은 내가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쨌을까 싶기도 해."
"...그렇군. 너같이 특이한 녀석들은 또 없는거야?"
"어... 아니라고 확답은 못하겠네. 너도 잘 몰랐겠지만 악마들 사이에선 인간들에게 동화되어 인간들을 돕는 녀석들도 많아. 그런 녀석들은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거나, 심지어 공격당하기도 하지만."
"그럼 넌 이미 죽었어야하는거 아닌가?"
"아니. 꼭 그렇진 않아. 내 동료들은 오히려 내가 인간들을 돕게 두더라고."
타하리알이 잠시 그가 들고 있던 기기들을 테이블에 내려 놓으며 하겐을 바라보았다.
"내가 다른 인간들을 도와서 행복하게 만들어두면, 내 다른 동료들이 그걸 짓밟고 즐겨. 이러면 더 즐겁다나.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지.."
"좆같은 녀석들이군."
"하하...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그래도 넌 좋은 녀석 같다. 고마워. 타하리알."
"뭘. 난 이렇게 사람들을 돕고 싶어. 솔직히, 요한 태석이라는 사람의 전설을 읽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 사람의 전설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돕고 싶더라고. 뭔가, 뭔가 갑자기 느낌이 오더라니까."
"...그랬나."
"또! 그렇게 사람들을 돕다보니 완전 기분도 좋아지고 하루종일 정신이 맑아지고 충만해지는거 있지?! 대박이었다니까. 아,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너."
"응?"
"말 엄청 많구나."
"...에헤헤."
"무안해할 필요 없어. 내 친구 중에서도 너와 비슷한 녀석이 하나 있었거든."
"그래? 되게 재밌는 녀석이겠네? 한번 만나고 싶어라~."
"...이젠 만나지 못할거야."
고개를 푹 숙인 하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타하리알은 그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읽어 말을 무마하고는 다시 실렌티온의 수술로 눈을 돌렸다.
"아, 음. 어. 그래... 알겠어. 나는 실렌티온에게 집중할게."
"그래.."
조용히 한숨쉬는 하겐의 두 어깨는, 악마인 타하리알이 보기에도 참으로 무거워보였다. 타하리알은 그에게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실렌티온의 수술에 집중하기로 했다. 인간의 아픔을 끄집어내는 것은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닐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