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조그만 도움2]
"크으으으악-!"
앙펠이 막 5번째의 심장을 검으로 갈라버렸을 때였다. 우피르가 처음으로 고통 가득한 신음을 지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에게 계속해서 피를 공급하는 굵은 힘줄들이 경련하듯 꿀럭거렸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네놈... 결국 우리를 배신했구나... 미개한 유인원 같은 새끼."
우피르가 그의 날카로운 턱에서 피와 심장 쪼가리들을 튀기며 욕설을 지껄였다. 앙펠은 그런 우피르를 비웃고는, 그의 검으로 벽에 있는 어느 심장을 푹 찌르며 말했다.
"배신? 나는 단 한번도 네놈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는데. 연방의 군인은 언제나 연방에게만 충성한다."
앙펠이 우피르를 차갑게 조롱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제스의 지시를 받은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벽에 박힌 심장들을 빠르게 제거하고 있었다. 어느 불쌍한 희생자들의 가슴팍에서 뽑힌 심장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주인 잃은 심장들은 하나하나 파열되어가며 움직임을 멈추는 중이었다.
마침내, 모든 심장들이 파열되고 터져가며 피를 흩뿌렸을 땐 단 하나의 쿵쾅대는 심장만이 벽에서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이 악마 자식아. 오늘 이 순간만을 위해 네놈들에게 빌빌댄 과거가 아려오는군!!"
글라디오를 역수로 쥔 앙펠이 심장을 향해 그대로 내리찍었다. 두근대는 심장 사이로 글라디오의 날카로운 날이 파고들며 갈라버렸고, 피가 앙펠의 얼굴에 튀었다.
"카아아아악-! 감히이이! 어떻게 모은 인간들의 심장인데! 이 빚은 네놈의 피를 빠는것으로 갚겠다!"
우피르가 분노에 가득찬 얼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척수에 연결되어 있는 굵은 힘줄을 쑤욱 뽑아 땅바닥에 내던진 뒤 날카로운 날이 달린 채찍을 휘둘러댔다.
[쐐애애액-]
"!"
앙펠은 자신에게 날아드는 채찍의 칼날을 최대한 피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그것이 무색하게 그의 가슴팍에 칼날이 깊숙히 박혔다. 우피르는 자신의 공격이 적중하였음에 비열한 미소를 지었고, 채찍을 자신쪽으로 잡아당겼다.
앙펠의 가슴팍으로 파고든 칼날은, 연결된 채찍이 팽팽해지자 점점 앙펠의 심장 부근으로 이동했다. 이대로 가다간 우피르에 의해 앙펠의 심장이 산채로 뽑혀나갈 대위기였다.
"이, 이 자식이....."
"네놈의 심장을 뽑아먹어주마! 앙--펠!!"
우피르가 증오가 담긴 말과 함께 그의 채찍을 잡아당기는 그 순간, 엄폐물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제스가 움직였다.
그녀는 우피르가 쥐고 있는 채찍에 시선을 고정한 뒤 검집에서 쉬고 있는 그녀의 글라디오 손잡이를 쥐었다. 저 빠르게 움직이며, 여러 대원들의 목숨을 앗아간 저주받을 채찍은 지금 끊어내기 딱 좋게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이 앙펠의 가슴팍이기는 했지만.
제스는 지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써걱-.]
제스가 휘두른 글라디오에 의해, 우피르의 채찍이 일격에 잘려나갔다. 강력한 악마들의 갑주나 피부마저 베에버릴 수 있는 글라디오의 칼날이 고작 인간의 힘줄들과 질긴 끈으로 엮어 만든 채찍을 잘라내지 못할리는 없었다.
"마, 말도 안돼. 내 채찍이-"
"중화기 분대!!"
제스는 채찍을 잘라낸 뒤 앙펠을 데리고 물러나며 크게 외쳤다. 그녀의 지시를 받은 중화기 분대의 대원들이 우피르에게 고화력 무기를 겨누기 시작했다.
"안돼! 난 지지 않는다. 피를, 피를 더 많이 마셔야.."
[드르르르르륵-!]
.
.
.
.
"...그래서 여기가 거기라고?"
"응."
지하 터널의 평평한 벽을 매만지던 하겐이 이블린을 살짝 째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장난치지 말라고 했잖아."
"그건 네가 인간이라서 그런거고. 나한텐 다 보이지."
이블린이 하겐의 손목을 잡고 다른손으로는 평평한 벽을 툭툭 두들겼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는 듯이 벽을 향해 손을 내밀었고, 그녀의 손이 두꺼운 합성 콘크리트 벽 너머로 쑤욱 들어갔다.
"여기쯤이거든. 내 손 놓치면 안된다?"
"...내 손은 니가 잡고 있는데."
"꼬치꼬치 캐물으면 재미없어."
이블린이 먼저 콘크리트 벽 너머로 몸을 옮겼다. 그녀는 그대로 하겐의 팔을 잡아당겨 내부로 끌어들였다. 하겐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통과할 때 몸이 부르르 떨리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겐이 끌려들어간 콘크리트 내부는 상당히 어둡고, 축축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피터가 마리에게 잡혀 고문받고 있던 그곳처럼.
"자, 이제 다 왔어."
"뭐라고? 주위엔 아무것도 없는데."
"쉬잇, 잠깐 조용히 있어. 내가 살펴보고 올테니까."
"...알았어."
이블린이 그에게 주의를 주며 멀어졌다.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듯이 두리번거리며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녀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즈음, 누군가 하겐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
하겐은 곧바로 그의 조그만 권총에 손을 가져다대며 재빨리 뒤돌았다. 그의 뒤에는 10명이 넘는 텐타시온들이 그를 일제히 쳐다보고 잇었다. 그들 전부 눈가가 붕대로 가려져 있었으나, 하겐은 그들의 불길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너, 그 인간이지?"
"뭐라고?"
하겐의 어깨를 건든 어느 텐타시온이 하겐을 흥미롭다는듯이 살폈다. 그녀 뒤의 다른 텐타시온들도 하겐에게 슬쩍 다가오며 하겐을 만져보기도 하고, 쿡쿡 찌르기도 했다. 하겐은 그런 그녀들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며 자신의 팔뚝을 건들어보는 악마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만지지마라."
"어머, 소문대로 참 날카롭네."
"맞아 맞아. 확, 망가트려버리고 싶어."
"나도."
텐타시온들이 흥분하며 하겐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겐은 그녀들의 위압적인 모습에 살짝 눌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눈이 없었지만, 하겐은 왜인지 그들의 광기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지말라고... 미친년들.)"
"잠깐~! 다들 그만해!"
하겐과 텐타시온들 사이로 이블린이 갑자기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인 텐타시온들쪽을 바라보며 하겐을 가리켰다.
"이, 이 인간은..."
"그 인간은?"
텐타시온들이 일제히 질문했다.
"어... 그러니까.."
"(이블린, 뭐라고 하려고?)"
"(쉬잇!)"
"그러니까, 음.. 내 친구야! 그러니까 건들지 말아주라. 나중에 내가 알아서 너희들에게 소개해줄테니까?"
"..."
텐타시온들이 이번엔 일제히 이블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대로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휴우-."
"방금 그년들은 대체 뭐야? 날 어떻게 하려고 한거지?"
"...말도 마. 내가 없었으면 넌 아마 쟤네들한테.. 어으으! 무슨 일을 당할지는 내 입으로 말하긴 싫어. 아무튼, 네가 찾던 그 남자를 찾았으니 이제 가볼래?"
"그러지."
이블린이 총총거리며 하겐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하겐에게 빨리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하겐이 그녀와 함께 1분정도 어둠속을 걸었을즈음, 익숙한 방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이곳에서 피터를 처음 만났을때, 어두컴컴했던 그 방의 모습이. 곧 있으면 피터를 만날 수 있을것 같았다.
"...역시나."
하겐의 예상대로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에는 피터가 사슬에 사지가 묶인 채 결박되어 있었다. 그의 상체는 벗겨지고 찢어져 땅바닥에 쓰레기들처럼 버려졌고, 가슴팍과 복부에는 여성의 손톱으로 긁은 듯한 상처들이 잔뜩 나 있었다.
그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고, 양손을 비롯한 사지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런 비참한 상황속에서도 희망과 빛을 잃지 않는 그의 눈동자가 없었다면, 누구나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운이 좋았어. 퍼플 윙님이 지금 잠시 아드라말렉을 만나러 올라가셨거든. 그래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끝내고 빨리 떠나야한다? 알겠-"
"이블린, 넌 좀 빠져있어줘. 이 남자에게 할 말이 있거든."
"...그랭."
이블린이 뒤로 살짝 물러났다. 하겐은 그런 이블린과 반대로 피터에게로 몇발자국 다가가 몸을 숙였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이는데."
"..."
"피터, 난 널 도우러 왔어."
"꺼져라. 난 너한테 할말 없어. 이번에도 아까처럼 감성팔이나 해볼셈이냐?"
피터의 굳은 의지가 담긴 눈동자가 하겐에게로 쏠렸다. 그는 마리에게 온갖 추악한 일들을 겪고도 굽히지 않은, 강철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내 새로운 친구 녀석들과 이야기하다보니, 네가 생각나서 말이야."
"흥."
피터가 하겐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비웃음과 왠지 모를 씁쓸함도 섞여있었다.
"나와 내 친구들을 배신한것도 모자라,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셨구만. 그 새끼들도 똑같이 배신할거지?"
"그러지는...않을거야. 지금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피터, 내가 여기서 널 탈출시킬 수는 없지만, '조그만 도움'을 줄 수는 있지."
"...장난질을 치겠다는거냐?"
"그건 봐야 알겠지."
하겐이 숙였던 몸을 일으켜 피터의 사지에 묶인 쇠사슬을 바라보았다. 땅바닥에 널부러졌던 피터의 장비들도 하겐의 시야에 충분히 들어온지 오래였다. 하겐은 질척한 타체액으로 더럽혀진 피터의 글라디오를 스윽 들어보았다.
"(...케일 중위님이... 남겨주신거군.)"
"...글라디오에서 손 떼라. 너같은 배신자 새끼가 감히 만질 검이 아니니까."
피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겐을 올려다보았다. 하겐은 말없이 피터와 그의 손목에 연결된 사슬들을 훑어보곤 그대로 오른팔의 사슬을 향해 글라디오를 올려쳤다.
[챙-!]
사슬이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피터의 오른손이 자유로워졌다. 피터는 오랜만에 풀려난 오른손의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이젠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도움만 준다고 했으니까."
하겐이 글라디오를 피터의 앞으로 툭 던져주었다. 피터의 눈이 글라디오와 하겐에게 번갈아서 움직였다. 하겐은 피터를 안쓰럽다는 눈길로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주위를 살피던 이블린이 하겐의 옆에 딱 달라붙으며 같이 걸었다.
"...왜 돕는거냐? 장난이라도 치는거지?"
"몰라. 나도."
피터의 질문에 잠시 걸음을 멈춘 하겐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냥,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
말을 마친 하겐이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피터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악이 담긴 외침을 던졌다.
"이럴거면.. 이럴거면 대체 왜 배신한거야! 이렇게.. 이렇게 모두한테 미안해할거면서?! 이 우둔한 새끼야!!! 네가 이런다고, 우리가 널 용서할 것 같냐? 넌 배신자야! 우리를 속인 배신자라고.."
"..."
"멍청한...자식아... 대체 왜 그런거야.."
피터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져 결국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바뀌어갔다. 그는 다시는 오지 않을 동료들과의 즐거운 나날을 그리워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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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라, 울어?"
"...닥쳐. 좀."
콘크리트 벽을 통해 다시 지하 터널로 나온 이블린이 하겐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헤-. 아무튼 별로 좋지 않았던 만남이었던것 같네~."
"..."
"그래서, 이제 우리는 친구인거다?"
"...맘대로 해.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있어. 넌, 음. 아무데나 가버려. 귀찮게 따라오지는 않을거지?"
하겐이 지겹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닌데? 따라갈건데?"
"하.."
"우린 친구잖아?"
이블린이 베시시 웃었다.
"(참나, 이젠 악마같지도 않아.)"
하겐은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이블린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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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하리알. 실렌티온은 어때?"
타하리알의 아지트를 청소하던 마르시가 슬쩍 물었다. 거기에 실렌티온에게 이불을 덮어주던 타하리알이 괜찮은 것 같다며 턱을 긁적였다.
"괜찮은 것 같은데,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겠다?"
"응. 솔직히 걱정돼. 실렌티온의 몸속에 있는 생명 회수자가 깨어난다면 단기적으로도 거대한 위험이 될 수 있거든."
"방법은 역시 없는건가?"
"그럴거야. 더 큰 문제는 이걸 하겐에게 어떻게 전하냐는건데~..."
[뚜벅. 뚜벅.]
"타하리알, 누가 온다. 쉿해. 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