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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믿을만한 구석] (124/131)



〈 124화 〉[믿을만한 구석]

"하하하하-."

퍼플 윙이 넓고 어두운 방에서 그녀의 창을 휘리릭 돌렸다. 창의 칼날에 묻은 대원들의 피가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한쪽 무릎을 꿇은 제스의 얼굴에도 튀었다.

피터를 탈출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퍼플 윙과 맞선 12명의 대원들과 제스는, 제스를 제외한 모두가 퍼플윙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제스 또한 퍼플 윙의 날카로운 창에 복부가 뚫려 상당한 중상을 입고 만데다가 갈비뼈가 부서지도록 얻어맞아 숨조차 편히 쉴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얕은 미소가 남아있었다. 마치 자신의 승리가 예정되어있음을 깨달은 사람처럼.

마리, 이제는 퍼플 윙이 되어버린  악마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제스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네년도 여기서 끝이야.  피터님을... 감히 데려가다니."

"...."

"네년은 특별히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죽여줄게. 어때? 고맙지?"

"큭-."

퍼플 윙이 제스의 멱살을 쥐며 들어올렸다. 그녀의 복부에서 피떡과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퍼플 윙은 그 모습에 비웃듯 미소지으며 손가락을 꺼내들어 제스의 상처를 후벼팠다.

"윽."

그러나 제스는 단 한번의 신음을 끝으로 전혀 고통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퍼플 윙이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더욱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에게 그만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반응이야말로 퍼플 윙이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스는 힘겹게 목을 지탱하며 퍼플 윙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의 당당하고 의지가 담겨 반짝 빛나는 눈이, 퍼플 윙의 죽어버려 탁한 눈과 대조되었다.

제스는 자신을 쏘아보는 퍼플 윙에게 피식, 조소를 날렸다.

"무, 무슨..?"

"하하.. 넌 끝났어. 마리. 이젠 퍼플 윙이라고 해야겠군..?"

"웃기지마. 내가 졌다고? 공포에 돌아버린게 틀림 없네."

퍼플 윙은 제스에게 반박하듯 을러댔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무언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매우 유리한 상황에 있음에도 단 하나도 굽히지 않고 오히려 당당해진 제스의 모습에 살짝 기가 밀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만 웃으라고!"

자신에게 조롱을 던지는 제스의 멱살을 더욱 단단히 쥔 퍼플 윙이 그녀를 높이 들어올렸다.

퍼플 윙은 그대로 제스를 땅에 쳐박듯이 내던져버리고는, 그녀의 창을 한손에 들어 찍어버릴 자세를 취했다.

"네년이... 어디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가본데, 넌 끝이야. 심장을 뚫어주겠어. 그러니까 내 앞길을 막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

"죽어라-"

"정말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

피투성이의 제스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씨익 웃었다. 그녀의 자신만만한 눈이 퍼플 윙에게 꽂혔다.

"잘 들어보면 알 수 있을걸. 내가 왜 네까짓 악마에게 겁먹지 않는지를."

"뭐? 지금 뭐라고 하는-"

[쾅-!]

"!!"

천장 한쪽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어두운  내부로 석양의 태양빛이 새며들어왔고,  태양빛은 방 내부에서 착지 자세를 하고 있는 자를 비추었다.

"너, 너는...!"

"저 사람이.. 내 믿을만한 구석이다."

"늦어서 미안하네. 제스."

노랑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몸 주위에서는 노란 섬광의 전기와 번개들이 파직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퍼플 윙은, 자신이 인간일적 질리도록 보았던  자를  알고 있었다.

"라미엘!"

"....아, 소위와 함께 있었던 자인가. 어쩌면 그렇게 전락해버린 것이냐. 불쌍하구나."

라미엘의 따끔하지만 안타까운 말이 퍼플 윙의 심장을 뚫었다. 퍼플 윙은 자신 옆에 널부러져있던 제스를 분노가 가득 담긴 눈으로 쏘아보았다.

제스는 그런 퍼플 윙에게 가운뎃 손가락을 힘없이 올려보이며, 이가 드러나도록 씨익 웃었다.

"이 빌어먹을 창년이-!!!"

[파직-]

퍼플 윙의 날카로운 손톱이 제스에게 닿기도 전에 라미엘의 번개가 작렬했다. 마인드 에너지가 가득 담긴 번개는 퍼플 윙의 가슴팍과 복부에 명중하며 그녀를 뒤로 날려보냈다.

"...다시 한번 미안하네. 제스. 너무나 늦었군.."

라미엘이 제스의 주위에 쓰러져 죽은 대원들을 보며 후회가 담긴 말투로 말했다. 그가 손을 툭툭 털자, 아직 남아있던 번개 조각들이 지직거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닙니다. 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라미엘씨."

[쾅-]

[쾅-]

천장이 추가적으로 부숴지며 두명의 벨라토르가  강하했다. 그들은 곧바로 라미엘의 안부를 살폈다.

"중대장님!"

"키아나, 테리우스. 제스 준위를 안전한 곳으로 호송하게. 저 악마의 처리는 내가 맡겠네."

"...괜찮겠습니까?"

제스를 안아든 키아나가 라미엘을 걱정했다.

"중대장님의 실력을 의심하지마라. 먼저 빠져나가겠습니다. 중대장님."

테리우스가 라미엘을 걱정하는 키아나를 제지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래. 난 곧 따라가도록 하겠네."

테리우스와 키아나가 제트풋을 작동시키며 천장을 뚫고 나갔다. 라미엘은 떠나는 자신들의 부하를 살짝 올려다보다, 가까이서 꿈틀거리는 퍼플 윙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보라색 갑주를 이리저리 뒤틀며 일어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답게 보라색 막이 달린 날개를 활짝 피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라미엘을 쏘아보며 손을 움직였다.

"흡!"

언제 생겨난지 모를 퍼플 윙의 창을 방어한 라미엘이 그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퍼플 윙은 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방어했으나, 벨라토르의 강력한 주먹질에 뒤로 밀려났다.

라미엘은 그녀가 잠시 틈을 보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허벅지에 있는 코발트 피스톨을 집어들어 그대로 갈겨버렸다. 강력한 32mm의 철갑 고폭탄환이 퍼플 윙의 복부에서 폭발하며 부서진 갑주의 파편을 휘날렸고, 퍼플 윙은 마침내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울부짖었다.

"카아아-!!!!"

"이젠 끝이다. 네 저주 받은 삶을 끝내주도록 하마!"

라미엘의 한손에 들린 망치가 번쩍 빛났다. 노란색의 섬광이 망치의 끝을 감싸며 번개와 전기를 파직거렸다. 마침내 어두운 방 안을 노란색 섬광으로 밝게 비춘 망치가 퍼플 윙을 향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카강-!]

망치가 퍼플 윙의 갑주를 강력하게 흔들며 어깻죽지를 깨부수었다. 퍼플 윙은 날카로운 장갑으로 라미엘의 갑주 가슴팍을 주욱 긁어버렸으나 라미엘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힘을 주었다.

"!!!"

퍼플 윙의 경악하는 표정과 함께, 라미엘에게 붙잡혔던 그녀의 팔이 뽑혀져 나갔다. 반신의 육신이 가진 압도적인 능력차는 고작 승천한 지 얼마 안된 퍼플 윙이 감당하기엔 너무 거대한 것이었다.

퍼플 윙, 마리는 악마가 된 이후 최초로 두려움을 느꼈다.

"아아아아악-!!!"

퍼플 윙이 자신의 뽑혀져 나간 팔을 보며 고통에 울부짖었다. 라미엘은 그런 퍼플 윙의 멱살을 단단히 쥐고 두들겨패며, 그녀를 벽끝까지 몰아세웠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악마들에게 잔뜩 더럽혀져 이리 불경한 모습으로 변했구나. 불쌍한 것."

라미엘의 망치에 다시금 노란 번개와 전기들이 모여들었다.

"금방 끝내주마. 네 저당잡힌 삶을 평화로이 만들어주겠다."

라미엘의 안타깝게 여기는 목소리에, 퍼플 윙은 자존심이 긁히는 비참함을 느꼈다. 이것은 자신이 원한 선택이었다. 피터를 갖고, 평생 행복하게 사는 미래를 자신이 골랐단 것이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그녀의 눈에 저멀리 떨어진 그녀의 창이 들어왔다. 강력하고도 날카로운 창은 반신 벨라토르의 육신마저도 간단히 뚫을만큼 위력적인 것이었다.

"자, 이제 죽-"

"...망할 영감탱이!"

"!"

"이거나 쳐먹어!!"

퍼플 윙의 욕설과 함께 땅에 떨어져 있던 그녀의 창이 두둥실 떠올랐다. 창은 곧바로 라미엘을 향하며 평범한 인간이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속도로 라미엘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 끝이다. 벨라토르 영감탱이야.  끝이라고!)"

[카앙-]

[푸숙!]

갑주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창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렸다. 라미엘은 퍼플 윙의 공격으로 분명히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허나 속으로 라미엘을 비웃었던 퍼플 윙은, 곧 자신의 배에 박혀 있는 자신의 창을 보게 되었다. 창은 그녀의 복부에 단단히 박혀 있어 그녀를 벽에 고정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

"고작 이런 발악을 하는겐가."

"이, 이게... 뭐야..!?"

벽에 단단히 고정된 퍼플 윙이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버둥댔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복부에 단단히 박힌 창은 깊숙히 박혀들어가고 있었다.

"모든 벨라토르는 자신의  심장을 순간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여, 순간적으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 수 있지. 난 그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자네의 창을 피하고 다시 그 창을 자네 배에 쑤셔박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네."

라미엘은 땅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망치를 주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까지도 퍼플 윙을 끝내버릴만한 번개가 모여져있던 망치는, 힘이 땅에 분산되며 칙칙한 빛을 내고 있었다.

"...비록 급히 움직이느라 망치를 떨어트려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네."

"으, 으어.. 이게! 이게..! 우아아..."

"자네가 아마 피터 소위를 사모하던 자가 맞겠지? 소위가 언제 그런 이야기를 해주더군. 자신이 좀 더 녀석의 사랑을 알아차려줬다면이라고 하면서."

"소위님?"

버둥거리며 발악하던 퍼플 윙이 피터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녀의 움직이 소름돋을 정도로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녀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라미엘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그는 내거야! 영원히 내거라고!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난 소위님을 영원히 내걸로 만들거야. 아니! 이미 그는 절반쯤 내게로 넘어왔었다고! 조금만 더하면, 조금만 더하면 내게 완전한 사랑을 약속했을텐데!!! 네놈들이 모두 망쳤어-!"

"....어떻게 이리 전락해버렸단 말인가."

라미엘은 사랑이란 아름다운 감정이, 잘못된 방향으로 솟아나면 심각하게 뒤틀리는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라미엘은 그저 이 여성을 이렇게 만든 악마들을 조용히 증오했다. 이 여자가 가진 원초적인 죄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가진 것임을 라미엘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마음을 가진 여자를 갖고  악마들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치직, 치지직!]

라미엘의 헬멧 내부에서 시끄러운 무전 신호가 지직댔다. 라미엘이 무전 신호를 연결하며 응답하자, 다급한 키아나의 음성이 울렸다.

"중대장님! 어디서 나타난 지는  모르겠으나, 지옥 군세의 악마들이 대규모로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장 빠져나오세요!"

"....알았다. 키아나."

"빨리 나오셔야 해요! 중대장-"

무전을 끊은 라미엘이 벽에 꽂힌 퍼플 윙을 측은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망치는 퍼플 윙의 숨통을 끊을만큼의 마인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퍼플 윙을 끝장내려면 다시금 마인드 에너지를 모아 수차례 공격해야만 했다.

"크으으으."

"그으."

천장의 무너진  사이로, 나이트 크롤러와 타이니 몇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놈들은 라미엘을 흥미롭다는듯이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노을빛에 반사되어 반짝이자, 라미엘은 자신이 이곳에 오래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퍼플 윙. 넌 피터 소위를 갖지 못할게야. 그는 너를 혐오하고 있다. 악마로 전락해버린 너를 혐오하고 있어."

"닥쳐! 그는 나를 사랑하려고 했어. 나는 그를 사랑했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지마!!!"

퍼플 윙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네가 소위를 계속해서 노린다면 언젠가 또 만나겠지. 그때는 지금같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악마야."

라미엘이 퍼플 윙의 복부에 박힌 창을 더욱 깊숙이 쑤셔박고는, 조용히 뒤돌아 그의 제트풋을 작동시켰다.

"이, 이 개자식! 도망가는거야?! 내게 소위님을 돌려줘!!  망할 새끼들아--!!! 안돼, 안돼, 안돼!!"

피터를 잃은 슬픔에 절규하는 마리를 뒤로하며, 라미엘은 그대로 천장을 부수며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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