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집착의 끝 1]
"그럼 어쩔 수 없는 것 같군."
턱을 매만지던 테일런이 결정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량 내부에 남은 자신의 대원들에게 간단히 브리핑을 시작하며, 각오를 다지라고 일렀다.
"잘 들어라. 대원들. 비록 우리 베테랑 소대의 인원이 절반 이상이나 갈려나갔지만, 아직까지는 희망이 없는게 아니야. 우리에겐 저 망할 악녀를 쓰러트릴 방법이 있으니까. 다들 각오는 되어있겠지?"
"예!"
"좋아. 그렇다면 다들 헬멧속에 내장된 통신망에 접속해라. 바깥에 있는년이 들으면 안되니까."
테일런의 지시에 20여명의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헬멧의 버튼을 눌렀다. 피터와 그의동료들도 그들의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다들 듣고 있지? 먼저 저년의 시선을 끌만한 시선끌이팀 4명이 최대한 속력을 내면서 차량에서 멀어진다. 퍼플 윙이 시선끌이팀에게 시선이 끌려 움직이면, 중기관포에 배치될 인원은 재빨리 중기관포를 잡아. 중기관포가 완전히 작동 가능하게 되는 순간 나머지 인원들은 바로 튀어나가 퍼플 윙에게 화력을 퍼붓는거다."
"...."
"허무맹랑한 작전 아닙니까? 인간의 달리기 속도로 뛰쳐나간다니, 퍼플 윙을 따돌릴 수 는 있는겁니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잭슨."
"맞아. 준위님이 머리 굴려서 나온게 이거라고. 크크."
"조용히들 해."
"그런데 퍼플 윙년을 어찌 속이지? 저 악마는 지금 단순히 피터 소위의 위치를 감으로 느껴서 찾아온 수준이잖아. 대체 우리 위치를 어찌 안거야?"
"뭐 한두번이야? 악마들은 지가 점 찍은걸 어떻게든 알아서 찾아온다고. *샌프랜스시스코의 소년 일을 잊었어?"
(*악마들이 어느 한 소년을 노린 사건.)
"다 됐어. 일단 나와 함께 잭슨, 미시시피, 페이스가 시선끌기팀이 된다. 다들 불만 없지?"
"준위님 뜻대로 하시죠."
"그만."
피터가 혼란스러운 통신망에 나지막히 말했다.
"말그대로 미끼에 퍼플 윙이 속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그렇습니다. 소위님."
"그럼 내가 미끼-"
"말도 안되는 소리!"
에리가 피터의 말을 순식간에 끊어버렸다.
"널 지키기 위해서 미끼 작전을 고안한건데, 네가 미끼가 되겠다면 그게 뭔 소용이야?"
"에리 말이 맞아."
코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흠... 그렇다면... 테일런?"
"말씀하시죠."
"샌프랜스시스코 사건때는 악마들이 어떻게 소년을 찾았지?"
"음, 기억이 잘 안나기는 하지만... 처음은 그의 영혼이 밝게 빛난다고 표현해야할까요. 그런 식으로 악마들을 불러모았고, 이후에는 그가 흘린 핏자국을 맛본 악마들이 알아서 기어오더군요."
"피...피라... 그럼 그때 악마들은 그 소년을 찾을때 피를 통해서 그를 구별해낸건가?"
"그렇겠죠. 그런것도 있고, 피 자체가 그 사람의 몸속을 가득 채우는 물체니까. 그 사람의 분신이라고 볼 수도 있습죠. 그래서 타락자들이 고위 악마들을 강림시킬때 피와 살점등을 제물로 이용하는거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피터는 헬멧을 벗더니 그대로 그의 글라디오를 뽑아들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에리가 피터의 손목을 붙잡았으나, 피터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치고는 장갑을 벗은 손으로 칼날을 가져다댔다.
"!"
[사악.]
"윽."
얕은 신음을 내는 피터는, 자신의 손에 약간의 자상을 냈다. 글라디오에 의해 벌어진 상처에서 그의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시선끌기팀은 앞으로 나와."
"탁월한 생각이군."
테일런이 피터의 행동에 감탄하며 박수쳤다.
.
.
.
.
[까각... 까가각...]
수송 차량의 천장 장갑을 긁던 마리는 슬슬 지루해짐을 느꼈다. 이렇게 밖에서 서서히 공포를 줘가며 마지막에 겁먹은채 심장을 진정시키고 잇는 피터를 안아들면 정말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차량 내부의 인원들은 마리의 공포에 더욱 거세게 저항하며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건, 마리가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다. 자신이 더욱 공포를 줘가며 하나하나 죽여가면, 저들이 벌벌 떨며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었는데.
"재미없어. 그냥 끝내버릴까..?"
[두쿵-]
차체가 잠시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리는 차량 장갑 위에 엎어져있다가 이상함을 감지한 후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차량 내부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기잉--]
차량 후미에 달린 두꺼운 게이트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부에서 수동 개폐 장치를 이용해 열고 있는듯 했다. 거기에 마리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4명의 무장한 병사가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와 흩어지고 있었다.
"흐응. 어떻게든 내 주의를 돌려볼 생각인 것 같은데. 내가 따라가 주진 않을거-"
"?"
무언가 이상했다. 헬멧을 푹 눌러쓰고 등을 보인 채 달리고 있는 4명의 병사들에게서, 마리는 이끌림을 느꼈다. 마치 피터가 자신 앞에 있었을때 그에게 온 신경이 쏠렸던 것처럼 흩어져 도망치는 4명에게 그녀의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소위님이 4명..."
"아냐!"
마리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혼란을 뿌리쳤다. 저 4명의 정체가 뭐든, 일단 잡아보면 알 수 있지 않는가? 마리는 자세를 잡고 일어서 그녀의 날개를 활짝 피었다.
"소위님이 4명이라면 나야 좋지!"
.
.
.
.
[턱턱턱-]
"헉, 허헉-"
잭슨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며 그의 가슴팍에 마지막 재생제 주사기를 꽂았다. 재생제의 약물이 그의 신체 곳곳으로 퍼지며 폐를 강화시켰고, 그의 피로한 육신을 깨끗히 만들어주었다.
방금 수송 차량에서 뛰어내린 4명의 가슴팍에는 피터의 피묻은 손바닥이 찍혀있었다. 피터의 생생한 피가 묻은 것은 곧 마리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슈우--]
공기를 가르는듯한 소리와 함께 자신의 위로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지자, 잭슨은 이 작전의 목표물이 자신을 먼저 점찍었음을 깨달았다. 이 빌어먹을 악마년은 자신을 피터로 오해해 미친듯이 쫓아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지랄 말라고. 왜 내가 첫번짼데. 제기랄."
잭슨은 땅에 드리워진 날개달린 그림자가 진해지는 순간,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있었던 자리는 흙먼지가 높게 피어오르며 무언가가 착지했다.
"니미..."
헬멧을 푹 눌러써 앞이 잘 보이지 않음에도 그를 노려보는 시선은 정확히 느껴졌다. 퍼플 윙. 보라색의 악마는 잭슨을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퍼플 윙의 조각같은 미모에서 약간의 균열이 일었다. 그녀는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며 분노한 표정으로 잭슨을 쏘아보았다.
"아니야."
"(뭐라는거야. 저 미친년.)"
"아니라고. 넌 아니야."
"크헉-"
퍼플 윙이 잭슨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녀의 다른 손에는 날카로운 창이 잭슨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잭슨은 바둥거리는 동시에 한 손으로는 글라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넌 소위님이 아니야. 감히... 감히 그분을 흉내내?"
"(젠...장... 이렇게 좆같은데서 미끼로 생을 마감하게 되다니... 그렇게 영광스러운 죽음은 아니잖..아...)"
글라디오의 손잡이를 붙잡긴 했으나 목이 강하게 죄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던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조금의 틈만 생긴다면, 퍼플 윙의 저 조각같은 면상에 이쁘게 칼집을 내놓을 수 있을텐데.
"그분을 흉내내지 마. 너 따위가 따라한다고 그분이 될 수 있을-"
"야-! 마리!"
"!"
갑작스레 들려온 피터의 목소리에, 퍼플 윙이 뒤돌았다. 저 멀리 떨어진 수송 차량의 천장 위에서 피터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퍼플 윙은 피터의 모습을 본 순간 강력한 황홀감에 빠지며 잭슨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잭슨은 자신의 숨통을 끊을듯 쥐고 있던 퍼플 윙의 손아귀가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글라디오를 뽑아 퍼플 윙의 면상을 대각선으로 그어버렸다.
"카아아아악-!"
눈 한쪽이 베여 비명을 지르는 퍼플 윙은 그대로 잭슨을 흙바닥에 내던지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같은 미끼 역할이었던 테일런은 잭슨이 목표물에서 벗어난 것을 확인하자 통신망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잭슨이 화망에서 빠져나왔다! 중기관포대와 나머지 인원들은 곧바로 화력을 퍼부어버려!"
중기관포의 묵직한 포구가 마리에게로 겨누어졌다. 그때까지도 마리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피터는 짜증난다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끝이다. 너와의 지긋지긋한 밀고 당기기도 끝이야."
"피터 소위님--!!!!!!!!!!"
[부아아아아아아아악-]
중기관포에서 강력한 관통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테일런의 지시를 맡았던 중화기 분대도 고폭발 유탄을 유탄발사기에 장전하며 중기관포를 얻어맞고 있는 퍼플 윙에게 조준했다.
[퐁-]
유탄 발사기에서 유탄과 바람이 빠져나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퍼플 윙의 주위에서 시뻘건 폭발이 일었다. 폭발은 퍼플 윙 주위를 확 감싸며 폭압을 뿜어냈다. 강력한 폭압에 도망치던 잭슨도 넘어지며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직 끝난게 아니다! 중기관포는 계속해서 제압사격으로 한발짝도 못움직이게 만들어! 나머지는 혹시모를 공격에 대비하며 산개해라!"
테일런이 손을 높이 치켜들고 다시 한번 통신망에 소리쳤다. 그의 지시에 맞춰 20명 가량의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수많은 화력이 퍼플 윙에게 쏟아지는 그 순간에도, 연기와 폭발의 불꽃 사이에서 간간히 보이는 퍼플 윙의 모습은 아직 팔팔해 보였다.
"젠장, 퍼플 윙의 갑주가 깨지긴 했는데... 조금 더 효과적인 타격을 입혀야 될 것 같은데."
"미시시피, 전투 산탄총은 준비 됐나?"
"걱정 마십쇼. 분쇄탄 가득 챙겨서 왔습니다."
"그럼 저년이 옴짝달싹 못할때 산탄총으로 갈아버려. 보니까 갑주 부분이 상당수 파괴되었으니까, 타격을 입힐 수 있을거다!"
"알겠습니다!"
전투 산탄총의 드럼탄창에 분쇄탄을 가득 채운 미시시피가 가만히 굳어 공격을 버텨내는 퍼플 윙에게로 접근했다. 초근접의 분쇄탄은 전차의 장갑마저 갈아버릴 정도로 흉악스러운 물건이었기에 퍼플 윙이 버틸 재간은 없었다.
"...!"
그러나 피터는 마리가 아직은 쓰러지지 않을 거란걸 알아채고는, 더 확실한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접근하는 대원들을 향해 통신망에다 외쳤다.
"안돼! 접근하면 안된다! 마리는 때를 노리고 있는-"
"어?"
연기에 가까이 접근한 미시시피의 얼굴을 향해, 퍼플 윙의 우악스러운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