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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돌이 되어라 (1) (8/193)



〈 8화 〉돌이 되어라 (1)

다가오는 쥐 떼들을 손짓 하나 하지 않고 불태워 죽인 뒤, 간단한 신체구축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 거리는 몸을 이끌고 하수도 벽에 기댄다. 더럽혀진 하복부에선 희멀건 하고 끈적한 액체들이 마구 쏟아졌다. 몽롱했다. 지독한 약이라도 맞은 듯 눈에 초점이 맞질 않았다. 미약한 숨이 아주 느리게, 불규칙적으로 퍼진다.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내려앉는다. 비교적 깨끗한 등살이 벽에 박힌 돌조각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남은 왼팔로 얼굴을 감싸고 아이처럼 쭈그렸다.


"아, 하…"

범해졌다. 남성성을 무시당한 채,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무참히 범해졌다. 비록 내가 자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느낀 공포와 절망감은 현실이었다.

눈물이 흐르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나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만족감을 느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놀고 있다.

 남자인데.
인간인데.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걸까.

나를 지키는 '선'은 남자의 거근이 하복부를 향할  찢어진 지 오래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행복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시체처럼 살아가는 나날보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몇 배는 만족스러웠다.

한 가지 분명한  예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자리에서 일어나 신체를 완전히 재구축한다.


팔이 돋아난다. 상처투성이였던 몸은 다시 새하얗고 보드라운 피부를 되찾았다. 망가진 내부 장기들은 제자리를 되찾았고, 찢긴 옷들은 재구축과 함께 돌아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얼룩 한  없이 깨끗한, 완전무결한 소녀의 몸.
조금 전까지 강간당한 모습이라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소녀가 지하수로에 서 있었다.


"하아…."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지하수로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아마 얼마 안 가 삶에 질려버리고 이런 자극을 찾게 나설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딱히 그만둘 생각도 없었기에 최대한 죽지 않기만을 빌어야겠지.

'이렇게 인간 이하로 다뤄지는 것도… 나쁘진 않네.'

아니, 뭐?
잠깐만.
내가 생각하고도 흠칫하고 놀라버렸다.


화, 확실히… 기분은 나쁠지 몰라도, 평소 자해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자극을 주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시발. 아니야.'

더 빠져들었다간 위험할  같아 허벅지에 칼을 꽂아넣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그렇게 몸과 정신을 가다듬자 잊고 있었던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맞다, 내 돈.'

나는 작게 혀를 찼다.


뭐, 그놈들의 마나 파장은 기억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었다. 만나서 죽여 빼앗든지 해야겠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돈을  써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출구까지 가기를   시간.


밖은  새벽에 들어 밤하늘 별이 빛을 내고 있었다. 나는 새벽 밤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흐으읏- 남자를 홀리는 요사스러운 목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입구를 지키는 병사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나는 병사의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치곤, 주변에 마나를 퍼트렸다.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흘러나온다. 넓게 퍼진 마력은  제국을 뒤덮어 그들의 위치를 찾아낼 것이다.

'한 놈은 사창가에 있고….'


창녀촌에 있는 놈은 높은 확률로 털보일 것이다.


'한 놈은 여관에서 자고 있네.'

멀지 않은 곳에 후드남의 마력 파장이 느껴졌다.

후드남을 생각하니 다리가 절로 떨렸다.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는  조르기와 산채로 잘려나가는 팔… 다시 생각해도 그만한 자극은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변태같으려나. 솔직히 말해서 대충 제압하고 날 강간하려 했다면 역으로 죽여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선 털보를 찾아가기로 했다. 돈을 나눴다 해도 그놈이 훨씬 많이 챙겼을 테니까. 후드남은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고. 무엇보다 털보 새끼는 실시간으로 돈을 쓰고 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는 거지만 저런 데 쓰인다 생각하니 절로 짜증이 솟았다.

"하아…."

또다시 나오는  숨.
팔이 잘리고 무참히 강간당한 것치곤 반응이 덤덤했다.
아크메이지의 강인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지금 나보다 더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그러고보니 재구축을 하면 처녀막도 재생되는지 모르겠네.

…시발.


이게 강간당한 사람 반응인가.


순간 자살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아냈다.

털보가 위치한 곳은 여기서 4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사창가. 나는 팔목을 그어 정신을 차린 뒤 사창가를 향해 움직였다.






* * *

브리도니아.


제국 최남쪽에 위치한 모험과 마법의 도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적색마탑이 존재하고, 주변에 미개척 지역이 하도 많은지라 모험가와 마법사들이 활동하기 편한 장소였다. 하지만 모험가들이 모험만 하고  수는 없는 노릇. 계속되는 싸움과 탐험에지친 그들은 술에 젖은 여흥을 원했다. 그리하여 나는 브리도니아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 접근했다.


누군가 밤의 시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모두 입을 모아 브리도니아 서쪽 거리를 말할 것이다.



 말대로였다.

거리를 밝히는 등불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대낮처럼 환했으며, 술에 취한 모험가들이 지천으로 널려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손님을 유혹하는 창녀들, 구석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는 모험가, 도박에 크게 실패해 내쫓기는 멍청이 등 브리도니아의 서쪽 거리는 제국의 밤은 절대 꺼지지 않노라 말하고 있었다.

'여기에 털보가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을 자랑하는 「흑장미」는 서쪽 거리를 거니는 이들에게 꿈같은 장소였다.


기본 입장비만 3실버, 사창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급진 외형과 귀족들이나 먹을 법한 와인과 양주들을 아무렇지 않게 판매한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창녀들은 말만 창녀지 준 귀족에 가깝다. 몸값이 10실버는 기본이고 심하면 50실버가 넘어가는 여자도 있었으니까.

대충 봐도 8층은 넘어 보인다.  세상의 건축은 현대와 비교해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귀족들 세상 얘기고 이렇게 사창가에 큰 건물을 지을 정도로 발달하진 않았다. 모종의 건축 계약까지 맺을 정도로 잘 나간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털보 새끼가 여기서 돈을 펑펑 쓰고 있다는 거지.

돈을 회수하긴 그른 것 같았다.


"꼬마야. 여긴 무슨 일이니?"

여길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얼굴에 잔뜩 분칠한 주황 포니테일의 여성 하나가 다가왔다.


못해도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가슴과 음부를 제외하면 속이  비쳐 보이는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그 풍만한 가슴과 커다란 골반은 존재만으로 주변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접객을 담당하는 창녀로 추측된다.

"혹시 일하러 왔니? 으음, 혹시 피부 좀 만져봐도 돼?"

고개를 저어 거절하려 했지만 문답무용으로 뻗은 손은 뺨에 도착한 후였다. 나는 눈을 찌푸리곤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쓰다듬었다.

"어머, 어쩜 이리 부드럽니? 얼굴도 귀염 상인 게 딱 좋고… 좀만 웃으면 웬만한 남자들 뻑가 죽겠는데? 너처럼 작은 체구는 수요가 많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더이상 듣기 싫었던 나는 그녀의 입술을 밀어내고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어요."
"으음~ 그건 안 되겠는데."


그녀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들 개인 정보는 비밀이야~"
"여기서 기다리는 건요?"
"그것도 안 돼."

그녀의 얼굴이 급변한다.
포근하고 고혹적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한 무표정만이 남았다.


"흑장미가 왜 다른 곳보다 비싸다고 생각하니? 우린 몸만 파는 게 아니란다. 신뢰를 파는 거야. 절대적인 비밀 보장, 그리고 그에 맞는 높은 자격. 물론 손님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야. 서로 존중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면 나도 어찌할 바가 없었다.


힘으로 밀어붙이면 뚫을 순 있겠지만, 눈앞의 여자가 표정을 바꾼 순간 느껴지는 시선들이 있었다. 흑장미에서 일하는 경비병. 그 수만 다섯 명이 넘었다.

나는 눈을 감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돈 회수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털보를 만난다 해도 빈털터리일  분명했다.


"후후. 겁먹지 마렴. 그보다 정말 일하러 온 게 아니니? 흑장미에서 여자를 험하게 굴린다는 건 다 오해란다?"
"몸을  생각은 없어요."
"남들은 창녀라 부르지만 그건 돈도, 능력도 없는 멍청한 남자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일 뿐이야. 우린 이 일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 다리 사이가 변색되거나 얼굴이 상한다거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매달 지급되는 약품이 노화와 변색을 막아주고 있으니까."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내 나이 사십을 넘었단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못하는 특급 비밀이라며 날 꼬시려 들었다.
일개 창녀에게 이렇게까지 지원하는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정말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마음 변하면 언제든지 와도 돼~"

힘없이 등을 돌린다.

돈이라도 있었으면 손님 자격으로 들어갔겠지만―남창도 취급한다―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시발 남창이라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후드남인데…


-꿀꺽.

지하수로에서 겪었던 일이 플래시백 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 * *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조용한 밤거리를 거닌다.

화려하고 소란스러웠던 서쪽 거리와 달리, 주거지가 밀집한 동쪽 거리는 풀벌레가 우는 소리만이 들릴  인기척 하나 없어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후드남의 마력 파장을 따라가자 도착한 곳은, 다소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여관이었다. 나는 최대한 소리가 안 나게 문을 열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주인은 테이블에 발을 걸치고 크게 코를 골고 있었다. 굳이 깨우진 않았다. 후드남이 체크인한 방 정도는 흘러나오는 마력 파장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여관 주인을 지나치고 나무 계단을 올라간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

이  앞에 후드남이 자고 있다는 소린가.

열쇠는 필요 없었다. 자물쇠는 내가 가볍게 손짓하자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손잡이를 쥐고 돌리기만 하면 문은 열릴 것이다.

나는 낡아빠진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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