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검은 장미 (1)
처음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딨을까. 누구나 처음은 힘들다. '첫 시작'이라는 건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자체로 미래를 위한 인내를 포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렇지 않다.
과거의 자신에게 배웠기에 현재의 나는 주저함이 없어진다. 동시에 미래의 내게서 확신을 가진다.
그렇게 익숙해지는 거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버리면서까지 찾은 자극은, 첫 시도는 무척이나 고민됐지만 금세 적응되었다. 전과 같이 혐오감이… 들기는 했지만 질질 짜면서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었다.
날 감싸고 있는 자아의 껍데기는 지하수로에서 박살이 났다. '이세계에 오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동일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소리다. 입안 가득 씁쓸함이 퍼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마법사로서의 자아가 날 좀먹고 있을 때 '진짜나'는 사라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시발.'
생각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주제는 저 멀리 집어치우고 검붉은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바라보았다.
'성분 분석은 여관에 가면 하기로 하고….'
후드남을 조졌으니 털보를 찾아야했다.
설마 지금까지 흑장미에 처박혀있는 건 아니겠지. 후드남이 말한 바로는 돈을 꽤 나눈 걸로 보였는데… 손끝에서 마나를 퍼트려 털보의 흔적을 추적한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털보와 딱 들어맞는 마나 파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서쪽 거리야?'
서쪽 거리의 환락가는 맞았으나 흑장미는 아니었다. 하긴 그 정도 돈으로 온종일 처박혀있을 리 없지. 마나 파장은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유지했다. 털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원인은 많았다. 술에 곯아 떨어졌거나, 도박장 같은 데서 죽치고 앉아있거나,
혹은 죽었거나.
사자死者에게도 마나는 남아있으니까.
여러모로 인상 깊은 기억을 남긴 후드남의 여관을 뒤로하고 서쪽 거리의 환락가로 향했다.
* * *
환락가라고 밤에만 문을 여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침에만 여는 가게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원하는 남녀를 지목하고 같이 먹고 노는, 지구에서는 보통 '룸'이라 부르는 것들. 살을 맞대는 일들은 보통 밤에 열긴 하지만, 의외로 본방 없이 기분만 내려는 사람도 꽤 많았다. 아니, 오히려 밤손님보다 많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흑장미를 포함한 유흥주점들은 아침이 밝아옴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다.
털보의 마나 파장은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흑장미 건물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뒷골목. 그곳으로 가면 털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타다닥!
"안녕~! 꼬마야!!"
순간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뒤를돌아보아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후으. 오랜만에 달려서 그런지 꽤 지치네."
땀에 살짝 젖어있는 주황 포니테일. 속옷이 비치는 네글리제는 몸에 딱 달라붙어 굴곡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흑장미 건물 앞에서 접객을 담당하던 종업원이었다. 주변 시선이 이상하게 쏠린다 했더니 그 원인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어째서 나를 부른 건진 모르겠다만 땀에 젖은 몸을 보니 급한 용무가 있는 것 같았다.
"그으게, 혹시 여기 지나가는 남자 한 명 못 봤니?"
"남자요?"
"응응. 얼굴이랑 몸에 털이 가득하고, 뚱뚱하고 못생긴 남자."
나는 곧바로 털보의 인상착의를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 남자가 왜요?"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무언갈 알아챈 것 같았다. '이년, 백퍼센트 그 남자와 관계있다.' 딱 그런 눈빛이었다.
그보다 무표정이었는데 어떻게 눈치챈 거지. 오히려 무표정이라 눈치챈 것일지도 모르겠다. 눈앞의 여자는 '흑장미'에서 사십이 넘도록 일하고 있는 고참 직원. 사람 표정 변화에서 정보를 긁어내는 데는 도가 텄을 거다.
"으음…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 말해도 되겠지."
흑장미에 들어간 털보는 한참을 서성거렸다고 한다. 화려한 분위기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호구새끼 한 마리 들어왔나 싶어서 바로 꾀려 들었는데… 아니 글쎄, 아무것도 안하고 구경만 하는 거있지?"
음식도, 술도 시키지 않고, 지나가는 창녀들과 종업원을 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뭐, 자기도 눈치는 있는지 한 번 꼽주니 뭔갈 하려더라고."
털보는 곧바로 여자를 불렀다.비용은 20실버. 꽤나 비쌌지만, 털보가 낼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화나는 거 있지!"
얼굴을 잔뜩 찡그린 그녀는 열불을 내며 털보의 끔찍함에 대해 설명했다.
"아니, 어떻게 물 한 잔 안 시키고 바로 안으려 들 수가 있어?"
보통 손님의 외형이 어떻든, 행동이 찌질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게 창녀들 사이에서 불문율로 퍼져있지만, 막 들이대는 손님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창녀도 일종의 서비스직이었고, 사람인 만큼 불쾌함을 표출할 수 있었다. 서로의 존중을 표방하는 만큼 당연한 이야기였다. 창녀 개개인의 프라이드가 높은 흑장미인 이상 더더욱 그랬고.
사건은 어린 창녀가 털보를 밀어냈을 때 일어났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그마저도 '거부'라 불릴 정도가 아니었다. 그저 털보를 밀어내고, '조금시간을 들여 천천히 관계를 맺자.'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오히려 앙탈에 가까웠다.
평범한 남자라면 곧바로 승낙하고 분위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털보는 아니었나 보다.
"하, 뭐? 창녀 주제에?"
―창녀 주제에!
털보는 자신을 밀어낸 창녀가 고깝게 보였는지 곧바로 구타를 시도했다. 비교적 신입에 속했던 창녀는 능숙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그대로 실컷 얻어맞으며 강간당했다.
눈 앞의 여성,―일단 주황 머리라 부르겠다―주황 머리와 경비병이 눈치챘을 때는 한참 늦은 뒤였다. 창녀는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온몸은 멍 자국으로 엉망이었고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털보는 창문을 깨고 도주했고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놓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다.
"내가 그 새끼 찾으면 사지를 찢어서 죽여버릴―."
이어서 들리는 헛기침.그녀는 소매로 입가를 작게 가리곤 평상시의 미소를 되찾았다.
"으흠. 흠. 조금 흥분했네. 미안해 꼬마야. 그으래서, 혹시 그 남자에 대해 아는 게있으면 말해주지 않을래? 응?물론 공짜로 말해달라는 건 아니야. 그새, 아니 그 남자를 찾아 죽- 음,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라 믿어."
보상이라, 딱히 기대는 안 됐지만 나도 털보에게 볼일이 있으니 말해주도록 할까.
"남자의 위치를 알아요."
"그래, 모르― 뭐?! 정말이니?!"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어요."
"으음, 혹시… 너도 갈 거니 꼬마야?"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주황 머리는 각자의 목적을 품고 발을 움직였다.
* * *
"여기는… 쓰레기 처리장인데, 정말 여기에 숨었을까?"
털보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흑장미의 경비를 뚫고 유유히 사라지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작해야 E급 모험가였고, 흑장미의 경비병들은 그보다 더 높은 등급의 실력자였으니까.
그런 이들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둡고 외진 곳. 일종의 사각지대. 그곳에서 기회를 노린다.
무엇보다 선명하게 퍼지는 털보의 마나 파장이 이 새끼 지금 여기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마나를 거두고 골목 안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굳이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조용히 울리는 발걸음은 털보의 심장을 조여올 것이다. 나는 주황 머리에게 입을 다물고 따라오기만 하라고 했다. 눈치 빠른 그녀는내 말을 얌전히 따라주었다.
-터벅, 터벅.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끊임없이 걷는다. 이곳에 털보가 있는 건 확실했으니까.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부스럭.
찾았다.
걸음을 멈춘다. 주황 머리도이 인위적인 소리를 들었는지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소리의 근원지는 쓰레기 더미였다. 쓰레기봉투들이 높이 쌓인 쓰레기의 산.
털보가 나타난 건 순식간이었다.
"이이익!!!"
주황머리는 신속하게 뒤로 빠져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나는 그냥가만히 있기로 했다.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꼬, 꼬마야!!"
주황머리가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털보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내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더러웃 콧김을 쉴 새 없이 뿜어냈다.
"다가오지 마! 안 그럼 이년 죽일 거야!"
나는 코웃음을 쳤다.
털보 몰래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바늘은 준비되어있는 상태. 나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주사기를 들곤, 곧바로 털보의 옆구리에 꽂아넣었다.
"크악?!"
갑작스런 통증에 당황한 털보는 멍청하게도 칼을 떨어트렸다. 주황머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멋들어진 돌려차기로 털보를 후려갈겼다. 털보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졌다. 그 충격에 쓰레기의 산이 무너졌다. 그는 쓰레기 속에 매몰되어 잠깐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성인 남자를 날릴 정도의 돌려차기. 주황머리의 겉모습은 가련한 창녀였지만 힘은 장사였다. 못해도 모험가 D급은 찍을 정도의 힘이었다.
충격에 나가떨어진 건 털보뿐만이 아니었다.
"꼬마야! 괜찮아?!"
넘어진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순수한 걱정밖에 없었다. 털보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 몸을 일으킨 주황머리는 정말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우리 일에 끌어들여서."
사과는 나중에 받도록 하자.
우선은 털보다.
그녀는 내가 눈짓하자 털보가 쓰러진 곳으로 다가갔다. 동시에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쓰레기더미를 뚫고 나온 털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씨발련들!! 다 죽여, 크악?!"
털보는 쓰레기 더미를 헤쳐나오다 말고 성대하게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또다시 넘어진다. 주황머리는 자신이 날린 킥이 이리 강했나- 하고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게 아니었다.
석화 물약.
오른 옆구리에 찔렸으니 적어도 폐 한 짝을 비롯한 몇몇 내부장기들이 돌로 변해버렸을 것이다. 범위는… 심장까지는 닿지 않았다. 왼쪽에 찔렀으면 심장까지 닿아 즉사했을 가능성도있었겠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크으, 으겍! 내 몸에 무슨, 으아악!!!"
아니다 다를까 털보의 옆구리가 회색빛으로 변해있었다. 털보는 계속해서 성을 냈지만, 힘을 빼다간 정말로 죽을 것이라 생각 했는지 시간이 지나자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씨바알…."
주황머리는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털보를 구속하곤 내게 감사인사를 올렸다.
"진짜 고마워!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 안 했네! 내 이름은 다이나 프루카이스! 브리도니아 지부의 '밤일' 총괄을 맡고 있어! 총괄이라고 해도, 애들 관리하는 것뿐이지만. 호호!"
성이 있다.
"감사 인사로 끝내는 건 조금 부족한데… 혹시 흑장미에 초대해도 될까? 내키지 않으면 거절해도 좋아! 돈이면 돈, 남자라면 남자. 우리가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들어줄 수 있으니까.
그녀는 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