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얼어붙은 산맥 (2)
토벌령 신청서에 사인하고 하루 뒤.
브리도니아 북서쪽. 칸타라 평원.
평원 입구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모험가였다. 토벌이 시작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모였다. 아쉽게도 기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추워.'
나는 시린 손을 비비며 기사를 기다렸다. 아마 토벌은 8시쯤 돼서 시작될 것이다.
현재 시각은 7시 27분.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뺨을 적시는 눈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여름에 눈이라니.'
어디 깊은 곳 빙룡이라도 깨어났나. 대지 마나 농도를 확인해봤지만 평소와 같았다. 오랜만에 마법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였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으음….'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붙드는 것도 미련한 짓. 나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브리도니아가의 기사를 기다렸다.
모닥불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를 삼십 분.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출정을 직감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의 모습을 찾았다.
기사는 쉽게 눈에 들어왔다.
우선, 그녀는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닿는 멋들어진 금발.
흐트러짐 없는 승마자세.
전신갑주를 입고 있지만 가려지지 않는 건강한 육체미.
무엇보다 강한 추위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아름다운 미모.
말을 타고 온 여기사는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등장했다. 그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외형은 둘째 치고, 모험가 같은 어중이떠중이가아닌 진짜 기사였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아님에도 온몸에 흐르는 마나.
선명한 오러의 흔적.
'신기해.'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자연스레 흥미가 동했다. 맘 같아선 사지를 결박한 뒤 세포 단위로 분석해보고싶었지만, 미약하게 남은 인간성이 이를 저지했다.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으로 남기자.
"휘유! 엉덩이 죽이는데!"
하지만 몇몇 멍청한 모험가들은 제 욕망을 숨길 줄 몰랐다.
여기사는 눈을 부릅뜨고 성희롱을 한 작자를 찾기 시작했다. 기사의 감은 날카로웠다. 남자와 여기사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실실 쪼개었다.
-촤아악!
"그아아악!!!!"
"팔 한 짝으로 봐주도록 하지."
제 딴에는 칭찬이었을 것이다. 그야 배워먹은 게 저속한 단어들밖에 없었으니.
모험가들이 괜히 모욕죄로 목이 잘리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모욕죄로처벌받기가 더 힘들다. 상식이 있다면 귀족부인의 앞에서 '가슴이 탐스럽네요' 따위의 말을 날리지 못할 테니까.
"더 지껄일 멍청이 있나?"
주변은 고요했다.
"곧 출정이니 짐을 꾸려라! 부상자는 열외 한다! 명령 불복종은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선두다! 평원을 가로질러 하크나르 산맥으로 향하니 모두 따라오도록!"
기사가 크게 소리친다.
"정확히 오 분 후 출발한다! 아직 오지 않은 자들은 무시한다!"
출정이었다.
기사는 인원을 세 조로 나누었다.
기사와 함께 산맥 깊은 곳을 수색하는 1조.
외곽을 수색하는 2조와 3조.
나는 1조였다.
기사가 날 선택한 이유는 그저 편리하기 때문이리라. 불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는 춥고 척박한 지형에서 빛을 발하니까.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기사가 있으면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평원을 가로지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기사가 내뿜는 살기에 지레 겁먹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다만 추위에 동상이 걸린 이들이 몇 있었다. 여기사는 그들을 버리고 행군을 유지했다. 절망 어린 외침이 들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발이 얼 것 같아."
"시발. 괜히 왔어."
그리하여 도착한 하크나르 산맥. 가장 오만했던 용의 이름을 붙인 만큼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비록 눈이 내려앉아 생명의 박동은 미약했지만, 용의 아가리를 벌린 듯 구불구불한 산길은 들어오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겠노라 소리치고 있다.
'흠….'
뭔가 이상했다. 마나 농도는 정상이지만, 흐르는 방향이 좀 꼬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이를 눈치챈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삼십 분 휴식하겠다!"
-으아!
-드디어!!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야 두 시간을 걸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모험가들은 다급히 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삼십 분 남짓한 휴식시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쉬지 않았다.
'산맥의 기운이 심상치 않아.'
주변에 마나를 퍼트린다.
'마나 자체는 문제가 없어…'
이질적인 방향.
나는 마나의 흐름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맥에 일정 수준 이상 접근하면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더니, 이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위치는 산맥의 최정상.그곳에 무언가가 있다.
트롤 퇴치가 주목적이라 당장은 못 갈 테지만… 토벌이 끝나고 한 번 가봐야겠다. 한여름에 눈이 내리는 이유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일어나라! 산맥으로 향한다!"
단비 같은 휴식의 끝. 나는 쉬지 않았지만, 딱히 지치진 않았다. 모험가들은 좀비 같은 신음을 내며 자리서 일어났다.
"이 조와 삼 조는 외곽을 돌며 트롤을 처리해라! 일 조는 나와 함께 중심으로 진입한다! 도주는 허용하지 않는다!"
* * *
이곳은 산맥의 중심부로 향하는 길.
푸른 빛이 서린 검격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트롤의 목을 벤다.
-촤아악!!
"트롤이 전보다 난폭해진 느낌이군."
아이스 트롤의 재생력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오러로 머리를 잘라버리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레 기사를 제외한 이들은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기사가 다 해치우니까. 간혹 트롤들이 여러 마리가 나오거나 늑대 따위가 포위하면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있었다.
당연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참가보상 50쿠퍼는 받을 수 있었다. 기사가 나서서 처리해준다는데 마다할 이는 없었다.
여기사는 칼에 묻은 피를 힘껏 털어내고 말했다.
"그리고 너무 몰려있어. 트롤은 이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아."
트롤은 '인간형'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고블린이나 오크처럼 조직을 이루지 않는다. 굳이 모여서 사냥할 필요가 없으니 당연했다. 막대한 재생력을 바탕으로 몸을 포기하고 달려드는, 트롤 특유의 공격을 막을 몬스터는, 적어도 산맥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트롤이 뭉쳤다는건, 우두머리개체가 생겨 군락을 이룬 것이거나, 트롤을 능가하는 포식자가 생겼다는 뜻이다.
"군락이 있을 수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겠군."
군락.
그 단어에 겁을 먹은 모험가 하나가 대표로 나서물었다.
"그럼 토벌은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군락을 찾아 없앨 때까지 진행한다."
"그, 저희 인원으로 가능합니까?"
"나는 기사다. 오러를 다루는 기사. 그깟 트롤이겁이 날 것 같나? 여기서 더 토를 달면 나에 대한 모욕으로간주하겠다."
여기사는 당당했다.
하기야 걱정은 안 됐다. 오히려 여기사의 당당한 태도에 안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러를 다룰 줄아는데 트롤이 뭐가 대수겠느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거세지는 마나의 격류다.
이걸 말해야 하나. 몹시 수상했다.
나는 눈을 찌푸리고 이를 가는 여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무엇이냐. 그대도 날 모욕하려는 건가?"
"마나의 흐름이 이상합니다."
다른 주제가 나오자 여기사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오만한 표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 겁이 난 모양이군. 그리 선동까지 하려는 걸 보면 말이야."
"…?"
"내가 마법사보다 마나 감지 능력이 떨어지는 줄 아나?"
"거짓말이 아니…"
"똑같다. 혹시나 해서 오감을 끌어올려 봤지만 결과는 전과 같더군. 더 말한다면 목을 베겠다. 잔소리 말고 따라와라."
기가 찼다.
그녀는 내가 F급이라는 사실만으로 존나게 무시했다.
'개같은련이.'
나는 저런 부류의 인간을 혐오한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타인의 의견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부류들. 그런 이들은 잘못된 판단으로 타인을 지옥으로 몰고 간다.
물론 내게는 좋, 아니. 저런 인간이 좋다는 게 아니고 지옥 같은 상황을… 아니, 그게. 하. 시발.
입을 다물고 여기사를 따라간다.
트롤의 수는 점점많아졌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 중심으로 향할수록 끝없이 몰려왔다.
여기사는 지쳐갔다.
그에 따라 나머지 인원이 움직이는 횟수가 많아졌다.
치명상이 날아올 때마다 내가 절묘하게 막아준 탓에 사망자는 없었지만, 경상을 입은 이들이 속출했다.
여기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 기사님. 정말 더…"
"아직 군락을 발견하지 못했다! 닥쳐라!"
고작 트롤 때문에 퇴각하는 건 명예롭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사는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웠다. 나는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베일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겐 발언권이 없다.
답답했다. 2조와 3조는 진작에 전멸했을 것이다. 기사도 마법사도 없는 그들이 트롤을 상대할 리 만무했다. 그것도 더 난폭해진 트롤들을 말이다.
모험가와 여기사는 지쳤으며, 트롤은 건재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여기사도 이 사실을깨달았는지 이를악물고 전진했다. 이제 후퇴는 없었다.
트롤들의 저항을 깨부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산맥 최중심부에다다랐을 때.
"……어…라?"
기사의 상태가 이상했다. 기사뿐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험가들도 전부. 의식이라도 잃은 듯 눈이 흐리멍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나는 곧바로 마나의 흐름을 확인했다.
'시발. 좆됐네.'
나는 중심부에 도달하고나서야 마나의 흐름이 비정상적인 이유를 알아냈다.
'설마설마 했는데….'
이걸 왜 지금 깨달았을까.
'개념 자체는 마법진과 똑같아.'
그리고, 연성한다.
그리하여 마나를 끌어모으고, 의지를 투영한다.
마법진의 기본이었다.
문제는 마나의 흐름.
이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전부 '그리기'에 해당했다.
그러면 마나를 끌어모을 필요도, 연성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의지를 투영하기만 하면 된다.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손실되는 마나도 없으니 위력은 순수 백퍼센트.
동시에 익숙함을 느꼈다. 내가 쓰는 무영창 마법이 규모는 작지만, 이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자연현상에 가까운 마나를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법사들이 괜히 영창을 하고 마법진을 그리겠는가? 그게 다 마나를 끌어오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마법의 극에 달한 날 제외하면,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어지간한 미친놈이 아니면 시도조차 안 한다. 무리하게 사용하려 하면 체내 마나가 역류해버린다.
"내가… 뭘…."
-쿵.
"어, 라. 내가 무슨…."
-풀썩.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나, 나는… 대체…?"
-쿵.
마지막까지 정신을 붙들던 기사까지 무너졌다.
―그르읅! 크어어옳!!
―아아옳! 후옳!
주변은 어느새 트롤들이 다가와 포위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깨부수려면 산맥 전체를 파괴하거나 마나의 흐름을 억지로 비트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트롤.
그걸 트롤들이 지켜보겠느냐고. 내 몸 하나 지키고 빠져나갈 수는 있지만, 남은 사람을 버리긴 싫었다.
―푸호옳!!! 아아! 가옳!
―가옳! 가옳!
―가옳! 라오오옳, 가옳!
―가오오옳!
트롤들이 가옳, 가옳 하며 소리친다. 포위만 할 뿐 공격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트롤들의 눈치를 본다. 공격 의사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트롤의 눈치를 보며 쓰러진 이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렸다.
-터벅.
"어머, 어떻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거야?혹시 악마? 동족한테는 안 통하게 설정해놓긴 했는데….
그런가.
트롤들은 공포에 질려 다가오지 못하는 거였나.
"못생긴 트롤들. 저리 안 꺼져?!"
―가옳!
―가옳옳!
"흥. 못생긴 것들이 겁은 많아가지고."
눈 앞의 여성은 은하수같은 푸른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성을 냈다. 피부는 새하앴다. 언데드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키는 나와 비슷해보였다. 그러니까, 땅꼬마였다. 하지만 신장에 맞지 않는 풍만한 골반과 잘록한 허리, 수박만한 가슴이 부조화를 일으켰다.
짧은 가죽 핫팬츠와 가슴을 겨우 가릴 정도의 헐렁한 셔츠를 입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노곤해 보였다.
"겨우 잠에서 깨어나 힘 좀 모으려 했더니 뭐야? 악마라면 이름을 밝혀. 난 혹한의 악마가올리스. 너의 이름은 뭐지?"
머리에 달린 커다란 산양의 뿔은 그녀가 악마임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