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오 나의 주인님 (1) (26/193)



〈 26화 〉오 나의 주인님 (1)

탈출의 마지막 걸림돌은 트롤이었다.

우리가  싸운다거나 그런  아니다. 아그네스의 오러는 대부분 회복됐고, 남은 모험가까지 모두 합세하여 싸운다면 큰 무리 없이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전투 그 자체였다.


전투가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가올리스의 시선을 끌게 된다. 마법진이 약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원래 힘을 발휘하기라도 한다면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불필요한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선 서열이 가장 높은 이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지하 감옥의 간수, 미노타우로스.

소대가리는 이미  손안에 떨어졌으니, 대충 상황만 맞추면 유혈사태 없이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상황이 좋을까. 그래,  제물로 바치기 위해 밖으로 데려간다… 정도가 좋겠네.

그렇게 계획을 갈무리하고 있자니 두려움에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정말 괜찮은가?"

아그네스는 미노타우로스의 미 자만 꺼내도 지레 겁을 먹고 떨어댔다.

그녀가 소대가리를 이토록 무서워하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정신적 트라우마와 두부 손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부분적 유아퇴행으로 추측된다.


본디 기사란 검으로써 의지를 관철하는 자들. 오러를 발산했음에도 일격에 뻗어버리고, 내가 눈앞에서 무참히 강간당했는데 마음이 안 꺾일 수가 없지. 자기도 그렇게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생기기도 하고.

이론상, 뇌를 포함한 모든 신체 부위를 첫 만남 때로 돌려버린다면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을 여기까지 벌인 이는 다름 아닌 여기사였으니까.

`다 자기 업보지.`


아무리 악마가 예상외 존재라 해도 선택지는 많았다.

후퇴하고 영지 병력을 이끌고 오던가, 모험가를 다시 모으던가. 이렇게 말한 나도 전력을 안 냈으니 결국 기만이 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무도 죽지 않게 노력은 했다. 남자 모험가들도 잘 살아있고.


`그리고… 정체를 밝히면 이런 거 앞으로 못하잖아.`

사실 전부 알량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다. 나도 쓰레기인 건 매한가지였으니.


누가  악질 쓰레기이냐 우열을 가리는 것뿐.



무엇보다, 아크메이지로 소문이 난다면 `이런 짓들`을 못하게  확률이 높았다. 미쳤다고 대마법사 이상의 존재를 건들겠는가? 아크메이지가 아니더라도 실력 있는 마법사는 건드는 이가 적다. 양아치 새끼들도 제 목숨 소중한 줄은 안다.

나는 음습한 마음을 숨기고 아그네스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미노타우로스는 이제 우리 편이니까요."
"우리 편이라니? 어떻게?"
"…유혹, 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약간의 연기는 필수불가결이다.


내 입으로 미노타를 유혹했다고 하니 자기혐오가 조금 치솟았지만, 이 또한 어떠하리.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유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그네스는 내가 미노타를 유혹했다는 소리에 입을 떡하니 벌렸고, 시선을 찢어진 드레스에 두었다.


정액으로 더럽혀지다 못해 변색까지 된 드레스는 온몸에 새겨진 멍과 조화를 이루어 내 모습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내가 재구축을 하지 않고 강간 직후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데에는  이유 없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당했는데 멀쩡히 돌아오면 그거대로 이상하잖아. 신성력도 없는데 몸을 회복하면 경지를 들킬 위험도 있고.

그래서 아그네스의 착각을 가속시킬 겸, 고통의 여운이나 즐길 요량이었다.


"어, 으… 미, 미안하다…."

나를 바라보는 아그네스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것처럼 흔들린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생각하는지 대충 예상은 갔다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기로 했다.


아그네스를 대기시키고 미노타우로스의 방으로 향한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






* *

―크르릉…

코를 고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흔든다. 나는 시끄러운 코골이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미노타우로스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 한 명을 강간한 것치고는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하아…."


몬스터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그래서 좋았던 점이 없지만은 않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살짝 짜증이 치민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종아리를 그대로 차버렸다.

-퍼억!

"으윽…."


시발.
내 발만 아플 뿐이었다. 발목이 얼얼했다. 마나를 싣지 않은 발차기는 미노타의 몸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조금 한심해 보일 순 있어도 뻘짓은 아니었다.


의지는 확실했으니.

지배의 고리…. 깨어나길 바라는 나의 의지는 미노타의 정신과 공명하여 확실하게 전달됐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거다.

나는 새빨개진 발목을 부여잡고 미노타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크으음…?


미노타는 강렬하게 느껴지는 `주인`의 기운에 몸을 뒤척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 주인인가?

나와 시선이 맞는다.

―너, 너는…! 적발 암컷!!!

그는 내게 윽박지르면서도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감출  없었다. 눈앞의 인간은 분명 자기  신나게 범했던 장난감이 아니던가? 어째서 가올리스 님의 향이 나는 거지? 미노타우로스는 내가 지배의 고리를 덧씌운 것도 모르고 씩씩대며 다가왔다.


―너!! 주인 아니다!!! 주인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미노타우로스는 손을 크게 뻗어 내 몸을 쥐려 했다. 여유가 있었더라면 잠시 어울려줬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상황에 조금 질린 참이었다.


여러 의미로 위험하기도 했고.

재구축은 만능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나의` 신체를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닌 타인의 정액은 재구축으로 빼내더라도 소량 남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엔 따로 처리를 해줘야 했다.

까딱하면 임신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태아가 내 신체 일부분으로 판단되는지는 모르겠다. 임신한 적도, 할 생각도 없으니 내가 이 사실을 알아내기엔 요원했다. 반대로, 내 신체로 판단되어도 문제였다. 태아가 재구축 과정에서 분해되어 소멸했다는 건데… 그건 좀 슬프지 않은가.

촉수 아이들은 별개였다.
그것들은 환상에 불과했으니.

-콰아아앙!!

기본적인 풍風속성 마법을 사용해 주먹의 궤도를 비튼다. 나를 노리지 못하고 엄한 곳을 때려 부순 미노타우로스는 눈을 붉게 빛내며 씩씩댔다.

―너!!! 가올리스 님이 아니다!!!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저항에 혀를 내둘렀다.

지배의 고리가 덧씌워졌음에도 본래 주인을 따른단 것은, 각인을 통한 강압적 충성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충성이라는 뜻.


그러나.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미노타우로스, 「앉아」."


―우오오오!!!!

-쿠우우웅!!!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힘에 자세를 잡지 못하고 얼굴부터 처박았다. 그의 눈은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을 흘렸다.


―어째서냐!!!! 어째서 네가!!! 주인의 힘을!!!!

세상이 무너지도록 울부짖는다. 미노타우로스의 목소리에는 처절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귀가 아프기도 했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그네스가 겁을 먹고 발작이라도 하면 골치가 아팠기에 또다른 명령을 내뱉었다.


"「조용히 해」 미노타우로스."


―……!


"「따라와」.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해」."

미노타우로스라는 종 자체가 마법 저항력이 무지막지하게 높기는 했지만, 아크메이지의 언령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마왕을 하지 감옥 간수를 하겠냐고. 미노타우로스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왔다.


뭔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


아그네스는 내가 미노타우로스를 데리고 나오자 종잇장처럼 새하얘졌다. 그녀는 잠에서 깬 남성 모험가들을 구출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따로 격리되었던 남자 모험가들은 대부분이 깨어있는 상태였다.  분의 이 정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이들은 힘이 남는 자들이 들쳐메고 가기로 했다.


"저, 정말 우리 말을 듣는 겁니까?"
"으으, 괜히 기사 따라왔다가 이게 무슨…."

모험가들은 미노타우로스와 반나체의 나를 번갈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미노타가 정말로 내 말을 따르고, 자기들을 해치지 않자 두려움은 안심으로, 안심은 여유로 바뀌었다.


사고의 여유를 가진 남자들은 자연스레 홀딱 벗고 있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발정을 하는지. 어찌 보면 대단하기도 했다.

"…크흠."
"……."


다만 대놓고 나를 바라보진 못했다. 아그네스가 이런 놈들을 콕 찝어 살기를 흩뿌렸기 때문이다. 나는 삼류 개그에도 못 미치는 한심한 광경을 무시하곤, 미노타우로스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미노타우로스, 약속대로 저는 여기에 남아있을 테니… 이분들만큼은 빠져나갈  있도록 도와주세요."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애원한다.


미노타우로스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와 맺은 약속 따위는 없었으니까. 눈가가 꿈틀거린다. 그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무슨 개소-

속으로 「닥치고 있어」를 연신 생각한다.


―…….

결국, 미노타우로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모험가들을 인솔했다.

나는 떠나가는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환상세계가 아닌 실제세계에서, 몬스터에게 범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몬스터는 절제를 모르기에 항상 전력으로 나를 망가트리려 한다. 최대한 고통스럽고, 다양한 감정을 끌어내길 원하는 내게 있어 딱 맞는 상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미노타우로스는 더는 쓸모가 없었다.


겁을 먹은 짐승의 이빨은 자기보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 그는 포식자가 아닌 피식자다. 처음처럼 날 대할 수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나름의 평가를 하고 있자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험가여."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남아있던 아그네스였다.


그녀는 결연한 얼굴로 엄숙히 말했다.


"…이번 일로 내가 얼마나 오만하고, 미숙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대에겐 미안함 뿐이다."

한마디에 한 걸음.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거리가 좁혀진다. 아그네스는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니 맹세하겠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입술이 바짝 말랐다.

기사의 무릎은 가볍지 않다. 그들은 아무한테나 무릎을 굽히지 않는다. 오직 주군, 그리고 황제만을 위한 무릎. 상대가 귀족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았다면 허리조차 숙이지 않는다.


그게 기사다. 기사가 몸을 '굽힌다'는 행위는, 자신이 보여줄  있는 최대한의 예의이자 상대를 인정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아그네스는 오물로 엉망이 된 내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손등을 타고 올라온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전보다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 자격이 박탈되더라도, 설령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여기서 구하겠노라 맹세하겠다."


손을 떼기 전, 마지막 외침.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녀는  말을 끝으로 다시 일행에 합류했다.

"……."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나는 미노타우로스가 돌아올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이상한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싶어 재구축도 해봤지만 요상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이건, 부끄러움이었다.

억지로 당할  느끼는 수치심과는 조금 달랐다. 그것이 외면의 부끄러움이었다면, 이것은 내면의 부끄러움이었다.


―….

얼굴이 뜨거워진다.

아그네스가 보여준 '진심'은 내게 과분할 정도로 다가왔다. 거짓뿐인 행동으로 진실된 마음을 이끌어 내다니?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 부끄러웠던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을 억지로 밀어 눌렀다.

주제를 바꿔야겠겠다.

재구축을 시도한다. 십여분 정도가 흐르고, 정액과 멍투성이였던 몸은 새하얗고 깨끗한 피부로 돌아왔다. 동시에 넝마가 된 드레스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평상시의 복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속옷과 가터벨트, 붉은 프릴치마와 순백색의 상의, 그리고 케이프까지.

마지막으로, 자궁 안에 남아있는 정액들을 모조리 소멸시킨다.


―……!


-쿵. 쿵.


"후으…."

한숨을 돌리고, 미약하게 느껴지는 진동의 근원을 바라보자 미노타우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명령이 「닥치고 있어」였던 미노타우로스는 말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나는 흙먼지가 눈앞까지 날릴 정도가 돼서야 그에게 말했다.


"이제 말해도 돼."


미노타우로스는 기적에 가까운 재생을 목도하자 크게 흥분하며 소리쳤다.

―인간!!!! 우리를 속였다!!!!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야. 먼저 공격한 건 그쪽이었잖아?"


더는 숨길 것도 없으니 날카로운 어조로 말한다.


"변명은  받아. 「가올리스에게 안내해.」"

아무리 내가 세상일에 흥미가 없다고 해도 기본적인 호불호는 있었다.


홍차보다는 커피,
빵 보다는 스튜
코카보다는 펩시.

추위보다는, 더위.

나는 하루빨리 악마를 조지고 여름을 되찾고 싶었다.


―……!

미노타우로스는  입에서 본주인의 얘기가 나오자, 몸을 부풀리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언령에 저항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궁금했던 나는 말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저항 삼 분 째. 근육이 끊어지고 혈관이 터지기 시작한다. 본래의 탄력 있는 묵빛의 피부는 어디 가고, 흉측하고 푸르스름한 피멍만이 남아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이어 저항 십 분 째. 왼쪽 안구가 터졌다. 이빨이 박살이 나고 몸은 보기 힘들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말하느니 죽겠다는 심보였다.


"「그만.」"

나는 미노타우로스의 뇌가 폭발하기 직전, 언령을 거두었다.

―크오으….

"이렇게까지 저항하는 이유가 뭐야?"

기가 찼다.


―가올리스… 님… 살려… 부… 탁….


"하아…."

몬스터의 충성심이 이리 강할 줄이야. 나는 기절한 미노타우로스의 신체를 대충 재구축하여 보존시켜놨다. 권속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리 말을 잘 들을까.


알려주지 않는다면, 직접 찾을 수밖에.


여기사와 모험가들은 모두 탈출했으니 날 가로막을 요소는 더는 없었다.


수틀리면 메테오라도 날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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