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오 나의 주인님 (2)
이 세계의 인류는, 그리고 지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마魔의 일족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서로의 파멸만을 원하는 무의미한 싸움은 평행선을 달릴뿐더러, 피와 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선빵은 늘 마족이었기에 손해를 보는 쪽은 항상 인류였다. 내가 장담하건대, 그들의 이해관계는 인류와 공존할 수 없다. 사상도, 성격도, 본능도 정 반대다. 신이 인류의 대적자를 만든다면 저리 나올까 의심이 될 정도로 극상성이었다.
하지만 오늘.
몬스터와 인류의 생각이 일치하는 영광스러운 경사慶事가 있었으니.
"……."
―…….
이해불능.
귓구멍에 염산을 들이부어도 집중을 끊지 못하는 아크메이지의 정신을 이렇게까지 혼미하게 만들 줄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미노타우로스가 시종일관 침묵으로 버티니, 가올리스를 직접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체력을 회복한 미노타를 데리고 가올리스의 마나 파장을 찾기 시작했고, 위치를 특정해냈다. 마나 제어의 달인인 내게 있어 추적술은 식은 죽 먹기였다. 위치를 특정해내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가올리스는 산맥 최정상, 얼음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궁전 안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흐읏, 으응…
저게 뭐야 시발.
"미노타우로스. 닥치고, 움직이지도 마. 머리 안 굴러가니까."
혹시나 싶어 마나 실루엣을 반복해서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모서리에 음부를 대고, 유방을 입에 물린 모습은 의심의 여지 없는 `자위행위`였다. 인간들이 모두 탈출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음부를 비벼대는 가올리스의 모습은 퍽 음란해 보였다.
설마 저딴 짓거리 하느라 마법진 보수도 잊어버린 거야?
믿기진 않지만 사실 같았다.
마나 장막을 둘러 은신한 뒤, 멀리서 그 모습을 관망한다.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미노타우로스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내 눈치만 봤다.
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에게 말했다.
"알고 있었어?"
―…….
"「말해」."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하루 전, 주인을 만나러 갔을 때부터다.
하루 전이라.
내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신나게 강간당했던 날이 아니던가. 순간 망상에 가까운 가설이 하나 떠올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덮어두었다.
그녀가 음마일 리 없잖아.
악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혹한의 악마라 소개한다면, 그녀는 정말로 혹한酷寒일 것이다.
'악마한테도 성욕은 있는 거겠지.'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다.
쯧, 하고 작게 혀를 찬 나는 그녀의 자위행위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적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는 건 멍청한 짓이지만, 알몸 상태로 죽였다간 기분만 잡칠거 같아서다.
준비한다고 내가 지는 것도 아니고.
-하아응, 아앙, 으읏….
그런데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하아…."
짜증을 내며 차가운 숨을 내쉰다.
더 기다려봤자 아무 의미 없을 것 같다.
마나 장막을 유지한 채 가올리스에게 다가간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음이 커져갔다. 우리가 얼음 궁전 앞에 도착했을 즈음엔, 문 너머로 신음이 울려 퍼질 정도였다.
나는 문 앞에 미노타우로스를 세우고 말했다.
"미노타우로스, 「부숴」."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회한이 담긴 주먹질은 멋들어지게 장식된 얼음 문을 산산조각내어 앞길을 뚫어주었다.
얼음 테이블, 얼음 조명, 얼음 계단 등 온통 얼음투성이인 가올리스의 궁전은, 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구석구석 한기가 서려있었다.
"꺄으읏?! 뭐, 뭐야?!"
절찬리에 자위를 하고 있던 가올리스는 기겁을 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날카로운 고드름을 동시다발적으로 생성해낸 그녀는 알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불청객에게 마구 쏘아댔다.
-카드드득!!
미노타우로스의 몸에 꽂힌 고드름은 가루가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의도적으로 위력을 낮춘 공격이었다.
정확히는, 미노타우로스를 인지하자 공격의 위력을 낮추었다.
가올리스는 앙칼진 목소리로 미노타우로스를 타박했다.
"내가 노크하라고 했지 문을 부수라고 했어!!!"
다만,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미노타의 덩치에 가려졌던 내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너, 넌?"
경계, 그리고 분노.
가올리스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명령했다.
"「어떻게 된 건지 빠짐없이 말해!」"
―….
침묵.
주인이 바뀐 지금, 그가 대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끔 모질게 대할 때도 있지만, 늘 우직하게 그녀만을 따랐던 미노타우로스가 대답하지 않자 가올리스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정신 링크를 시도했지만, 통할 리 없었다.
명령은커녕 정신 공유마저 먹히지 않자 크게 분노한 가올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너… 내 권속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옷부터 입지그래?"
"닥쳐!!!"
주변 온도가 급격히 내려간다.
"얼어서 죽어버려!!!!"
시간마저 얼어붙을 정도의 한기가 내 주변을 감싼다. 발은 바닥에 붙어버려 움직이지 않았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추위는 몸을 좀먹으며 박제하려 들었다.
기본적인 마법 저항 덕에 곧바로 얼어붙진 않았지만, 이 역시 시간문제였다.
나는 얼어가는 몸을 슬며시 바라보곤 가올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흥! 인간 따위가 시건방지게! 미노타우로스! 따라와!"
산 채로 얼어붙는 기분이 궁금해 한동안 가만히 있었지만, 빙결과 함께 신경이 죽어버려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피부가 괴사할 때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얼어붙는 속도가 워낙 빠른지라…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 나는 이 자기 파멸적 행위를 그만두기로 했다. 쇼크로 죽을 수도 있었고.
-쩌저적!
주변 마나를 억지로 비틀어 가올리스의 마법을 파훼한다. 마나를 조작하는 것쯤이야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시에 재구축을 진행한다.
완전 재구축까지 조금 걸리는 지라 생명력을 일부 소모해 시간을 당겼다.
오른쪽 안구가 썩고 내부 장기 몇 개가 망가졌지만, 움직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멍청한 소대가리! 오늘은 내가 벌을… 어, 어?!"
마법이 파훼 됐음을 뒤늦게 눈치챈 그녀는, 멀쩡히 서 있는 나를 보곤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다 끝났어?"
새하얀 이가 부서지도록 얼굴을 일그러트린 가올리스는 새로운 마법을 준비했다.
마나의 흐름을 파악한다. 손끝에 모이는 마력, 그리고 응집되는 한기. 캐논류 마법이었다. 단순히 얼어붙게 해서는 안 되니 물리력으로 나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하아…."
평범했고, 평범했다.
악마라고 해서 특출난 마법이라도 구사할 줄 알았는데 그냥 똑같았다.
하다못해 저주나 주술이라면 해독이라도 했을 텐데.
위력도 평범했고. 저 정도면 내가 무영창으로 수천 개는 동시에 쓸 수 있다.
더이상 당해줄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나는 무심하게 손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녀의 마법을 취소시켰다.
마법 캔슬.
단순히 막는 것과 쏘기도 전에 취소시키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방어라면, 후자는 공격에 가까웠다.
마법 캔슬은 아무나 쓰지 못하고, 그리 속 편한 기술도 아니다.
마법이 짠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란 소리다.
마나를 소멸시키지 않는 한, 이미 발동된 마법은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발동된 마법의 출력은 어디로 갈까.
"커흑, 흐윽?!"
보통 시전자 체내에서 폭발한다.
-쿵.
피를 토하며 공중에서 떨어진 가올리스는 살충제를 맞은 파리처럼 한참을 꺽꺽대며 부들거렸다.
알몸으로 고통스럽게 몸을 비트는 모습은 관능적이기보다는 안습해보였다.
―우오으…!!
나는 비통한 신음을 내는 미노타우로스를 지나치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가올리스의 머리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허튼짓하면 머리 터트릴 거야."
"끄윽…."
썩어버린 오른눈을 천천히 재생시키며 명령한다.
"마법진 해제시켜."
"미, 미노타우로스… 사, 살려저…"
쓸데없는 말을 하길래 머리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녀의 머리를 뜨겁게 달군다. 가올리스는 죽음을 감지하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내게 애원했다.
"미안해! 제발, 죽고 싶지 않아… 흐윽."
"마법진만 해제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힘들어?"
"코어, 코어를 부셔야 해."
"어딨는데?"
"꼬, 꼭대기."
그녀의 말을 듣고 주변을 스캔하자, 마나가 응집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직접 가는 것도 귀찮았던 나는 대충 좌표 설정을 한 뒤 작은 유성을 하나 떨어트렸다.
-쿠우우웅!!
"히끅."
얼음 궁전이 흔들린 정도의 진동.
결계를 뚫고 주변 지역을 초토화한 유성은 코어를 흔적도 없이 파괴했다.
조금 싱겁게 끝났지만, 이걸로 겨울은 끝이다.
밖을 바라보니 세차게 내리던 눈발은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누가 마법진 보수를 안 한 덕분에 섬세한 컨트롤이 가능해져서 말이야."
"으, 으으…."
가올리스는 나를 두려워하면서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나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본신도 강력하고, 기사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의 권속을 부리는 악마가, 자위를 하느라 습격을 눈치채지 못한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그러면… 이제 어쩔까."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미노타우로스와 눈물 콧물 범벅으로 쓰러져있는 가올리스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느낀 가올리스는 내가 다가가자 겁을 먹으며 발작을 했다.
"아, 안 죽인다며!"
"내가 언제?"
솔직히 말해서, 죽일 생각은 안 들었다.
본래 나를 죽이려는 놈들은 철저하게 제거하는 편이지만, 후드남 때랑은 경우가 달랐다. 분명 나를 납치하고 산 제물로 바치려던 건 저쪽이었지만…
"…죄, 죄송해요! 죄송, 해요…! 제발 죽이지 말아주세요! 다, 다시는 눈앞에 안 나타날게요!"
"인간들도 너한테 죽을 때 똑같은 소리 하지 않았어?"
"으, 그, 그건."
격전도, 흥분도. 욕망도 없다. 가올리스는 이상할 정도로 순수했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죽이기는 싫고, 그렇다고 살려두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니… 고민 끝에 나는, 죽음보다 더할 수도 있는 벌을 내리기로 했다.
"머리 내밀어."
"뭐…? 서, 설마."
"응. 맞아."
"뭐, 뭐?! 안 돼!! 차라리 죽여!!!"
그녀는 관자놀이를 감싼 양뿔을 두 손으로 가리고 악을 썼다.
"제발! 그것만은 안 돼! 아아, 아아으윽!!!"
가올리스는 마법까지 쓰면서 날 막으려 들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경지의 차이를 생각하면 그녀가 평생을 수련해도 마법으로는 날 못 이긴다.
-콰득.
양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뿔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나는 가올리스의 뿔을 주머니에 넣고 뒤돌아섰다. 악마의 뿔은 귀중한 마법 재료다. 얻고 싶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었고, 악마를 죽여봤자 고작해야 한두 개가 끝이라 희소성도 있었다.
"아, 아아…."
가올리스는 부러진 뿔을 보더니 고장 난 기계처럼 신음을 흘렸다.
그들에게 있어 뿔은, 힘의 원천 내지는 목숨보다 소중한 명예.
뿔이 없는 악마들은 힘을 쓰지 못할뿐더러 악마들 사이에서 능멸당하고 무시당한다.
"나,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마법에 극단적으로 의존하던 그들이 신체 수련을 할 리가 있나. 뿔 없는 악마는 그냥 평범한 인간이다.
"돌려줘… 제발, 뭐든지 할게… 제발…."
부러진 뿔은 붙일 수 없다.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이유는, 앞으로 닥칠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아서겠지.
뚝, 뚝.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지며 뺨을 적신다. 뿔이 잘리고 마력이 사라지자 얼음 궁전이 녹기 시작한 것이다. 물방울은 가올리스의 얼굴 아래에 특히나 많이 떨어졌다.
나는 주인 곁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미노타우로스에게 말했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 「앞으로 인간을 공격하지 마.」"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내게 종의 구분은 의미가 없을지 몰라도, 아직은 적어도, 인간의 편이었다. 마족들이 인간을 죽이려 든다면 응당 힘을 발휘할 것이다.
`아그네스… 나중에 기사단에 찾아가야겠네.`
나는 금발 머리의 여기사를 생각하며 산맥을 내려갔다.